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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8. 15:28

토토, 배우가 되다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

 

NHK 전속 토쿄방송극단 제5기생 채용시험이 끝난 건 1953년 2월이었다. 2월 1일부터 NHK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세간의 화제도 "TV"에 대한 이야기가 독차지했다. 토토를 비롯한 5기생들은 TV 시대의 1기생으로서도 기대를 받게 된 것이다.

육천 명이나 되는 응모자 중에서 남은 건 여자 열일곱 명, 남자 열한 명으로 총 스물여덞 명. 처음에 응모한 사람들 중 이백 분의 일만이 남게 되었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삼 개월 더 제1차 양성기간을 거친 뒤 약간 명의 채용자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테니 아직 방심할 순 없었다. "약간 명"이 어느 정도의 수를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스물여덞 명은 불안한 심정을 안고서 TV나 라디오 배우로서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배우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무난히 참가할 수 있도록 평일엔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토요일은 쉬고 일요일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로 시간이 정해졌다.

 

연수 첫날, 토토와 5기생들은 NHK로 가는 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관광 호텔의 일본식 방에 집합했다. 교실로서 쓰이는 곳은 타타미가 깔린 연회장 같은 방이었다.

스물여덞 명 중엔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지만 이미 영화배우나 무대배우로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학교에서 연극 공부를 했던 사람도 있어 완전한 초짜는 토토 외엔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높아진 긴장감을 안고 첫날 강의가 시작되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 몇몇이 인사를 한 후 사무 담당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 분은 낭독과 이야기를 알려주실 오오오카 타츠오 선생님이십니다. 평소엔 NHK 문예부에서 근무하고 있으십니다."

이 분은 평소 보던 양복 입고 출근한 회사원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벗겨진 머리에는 털실뭉치가 끝에 달린 니트모자를 쓰고있고 뿔테안경을 걸쳤으며 짙은 갈색 가디건을 입고 계셨다. 허리가 굽어 상반신이 쓰러지기라도 할 듯한 자세로 걸어가셨지만 절대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토토는 이 할아버지에게 갑작스러운 흥미를 느꼈다. 이렇게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과 만나게 된 건 처음인데도 뭐라 할 수 없는 부드러운 태도와 자기자신을 꾸미지 않는 느낌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과 조금 닮아보였다.

"여러분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해야 되나? 돌봐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무 담당자가 이렇게 소개를 마치자 오오오카 선생님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시더니 아이처럼 부끄러워하는 웃음을 띄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임 선생님이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잡일꾼 같은 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 여기까지 남기 위해 고생이 꽤나 많으셨겠죠?"

입을 가리고 있는 손등이 조금 부풀어 보였다. 친절한 말투를 쓰면서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윽한 면이 있어 좀 신기했다. 오오오카 선생님이 타카하마 쿄시의 문하생으로 있었던 사생문의 달인이라는 것을 토토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사십 년이 넘게 지나고서야였다.

 

매일매일 관광호텔에 다니게 되었다. 교실로 쓰이는 넓다란 방에 도착하면 자신들이 쓸 탁자와 방석을 놓고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다. 코우란에 다닐 때에도 절을 교실로 썼으니 신발을 벗고 방석에 앉아 수업을 듣는 서당 같은 수업방식이 추억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토토는 반드시 맨앞자리에 앉기로 했는데 뒷자리에 앉았다간 옆사람과 수다를 떨거라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것도 코우란에 다닐 때와 변함이 없었다.

오오오카 선생님 외에도 대사 읽는 법의 기초를 NHK 연극과장이었던 나카가와 타다히코 선생님이, 움직임 등 기초연기는 훗날 TV 미술부장에 오르는 사쿠마 시게타카 선생님이, 음성학은 토쿄대와 토쿄예대에서 수업을 하시는 삿타 코토지 선생님이, 예능에 대한 강의는 훗날 NHK 회장에 오르게 된 사카모토 토모카즈 선생님이, 탭댄스는 니혼극장의 스타였던 오기노 유키히사 선생님이 맡으셨다. 관광호텔에는 홀도 있었기에 탭댄스 수업은 거기에서 받았었다.

당시 토토는 교사진이 그렇게 호화롭다는 것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지만 첫 일 주일이 지난 일요일 신바시로 가던 길에 동기생 중 한 명이 감동에 젖어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선생님들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수업을 들으려면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을 내야될지 상상도 안 돼."

양성소 친구들은 전문적이 지식이 풍부해서 연기와 방송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들 흥분해서 "대단해" "엄청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토토는 '그런가. 그 정도로 NHK가 이 교육에 열의를 다하는 거구나.'라며 감탄했다.

 

연수가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토토 님!"

낭독 수업이 끝난 뒤 오오오카 선생님이 부르셨다. 오오오카 선생님은 토토를 언제부턴가 "토토 님"이라고 부르시게 되었다.

"토토 님의 목소리와 억양은 마치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이 말하는 것 같군요."

엥,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 토토로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묵묵히 오오오카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선생님이 싱글벙글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토토 님은 머뭇거리는 구석이 없이 활발해서 감았던 태엽이 기세 좋게 풀리는 것처럼 단숨에 대사를 풀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건데 알기 어려웠나 보군요. 허, 허, 허."

"프랑스 인형"이란 말을 들었을 때엔 칭찬을 들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태엽으로 움직이는"이란 설명은 미묘했다.

오오오카 선생님은 다소 신선 같은 구석이 있으셔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시고선 이에 토토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면 마술이라도 쓴 것처럼 뿅하고 모습을 감춰버리셨다. 토토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시고선 눈 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시는 것이다.

하지만 오오오카 선생님이 "님"이라고 부르셨던 학생은 토토 뿐이었고 쉬는 시간에 토토가 동기생들 앞에서 막 배운 라쿠고 등을 선보일 때면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웃고 있으셨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오오카 선생님이 토토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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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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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8. 00:34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면

 

토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우요우음악학교 동급생 다수가 이미 취직할 곳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레코드 회사에 가거나,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을 하거나, 후지와라 가극단에 들어가는 사람까지 있는 등 졸업 후 진로 이야기를 꺼내는 동급생들의 얼굴은 빛나 보였다. 모두들 할일 없이 라면이나 구운 감자를 먹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동급생들 중엔 졸업 후 <춤추는 여자> 등 인기곡을 내며 가수로서 유명해진 미우라 코우이치 씨도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미 레코딩도 마치고 데뷔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토토만이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상당히 낙담했다.

어느 날 돌아오는 길에 있는 전신주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인형극 <눈의 여왕> 공연 긴자 코우쥰샤홀"

헤에, 긴자에서 공연하는 구나? 인형극은 어떤 식으로 하려나?: 지금이야 TV 같은 곳에서 방송되어 다들 알고 있겠지만 당시엔 알 길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토토는 <눈의 여왕>이 안데르센 동화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인형극이란 것을 본 적은 없었고 "긴자"라는 두 글자에 이끌리고 있었다. 아빠와 데이트를 했던 추억이 담긴 거리이며 스와노타이라에서 들었던 <토쿄 랩소디>의 추억도 떠올랐다. 혼자서 가기엔 다소 망설여졌지만 일요일 오후에 마음을 굳게 먹고 가보기로 했다.

어린이들로 가득 찬 코우쥰샤홀에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다소 살이 찌고 기운차 보이는 언니가 양손에 남자아이 여자아이 인형을 끼고 등장했다. 인사를 한 뒤 인형극 무대 아래로 몸을 수그리자 무대 위에는 인형만이 남은 채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토토는 몸을 조금 기울여서 무대 아래에 숨어있는 언니를 옆에서 바라보았다. 언니는 무릎을 꿇고서 양손에 낀 인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더니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도 하고 점프를 하기도 하면서 땀범벅이 되어가며 연기를 했다. 객석에 있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선 손바닥이 날아가라 박수를 쳤다. 

절정 부분이 가까워져 눈의 여왕이 남자아이인 카이와 여자아이인 게르다에게 무서운 명령을 내리자 "불쌍해"라든가 "너무해" 같은 말을 어린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토토는 신비한 감정에 휩싸였다. 영화판 <토스카>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 상냥한 것이 가득 차오른 것 같은,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인형극 <눈의 여왕>이 막을 내렸다.

신바시역까지 걸어가며 토토는 생각을 했다. 혹시 오늘 본 그 언니 같은 걸 토토도 할 수 없을까? 많은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음악학교 친구들이 차례차례 취직에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당시 말로 한다면 "직업여성"이 되는 꿈은 너무나 멀어 "결혼"이란 두 글자가 묘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기겠지. 청소, 세탁, 요리를 할 수 있는 어머니야 많이 있겠지만 인형극을 할 수 있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지 않으려나?"

집에 가는 동안 토토는 상상에 잠겨있었다.

"오늘 본 인형극 같은 걸 어머니가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잠자기 전에 베개 맡에서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그런 어머니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토토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는 거야!"

어머니가 되려면 그 전에 결혼을 해야 되는데, 토토는 그런 걸 제쳐두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는 아이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의 여왕> 인형극은 아직 젊었던 그림자 연극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 씨가 프로듀스를 했었고 음악은 모두 아쿠타가와 야스시 씨가 작곡했으며 남성 4인조 코러스는 아직 프로가 되기 전이었던 다크덕스가 맡았다는 사실을 이 당시 토토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준 높은 <눈의 여왕>을 본 것이 토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결정한 계기가 된 것은 틀림 없었다.

토토는 엄마에게 인형극을 연기한 언니가 무척 필사적으로 임했던 것이나 어린이들이 무척 기뻐했던 것 등을 열변했다. 그러고서 엄마에게 여쭤보았다.

"동화책 읽는 법이나 인형극 하는 법을 알려주는 곳 없으려나?"

"글쎄, 신문에 나와 있으려나?"

엄마가 그리 말씀하시길래 토토는 그 날 보지도 않던 신문을 펼쳤다.

"NHK에서는 TV 방송을 시작하게 됨에 따라 전속 배우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프로 배우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 년간 최고의 선생님을 모셔 양성과정을 거친 후 채용된 분은 NHK 전속 배우가 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채용 인원수는 若干名..."

이런 우연이! 신문 정중앙에 NHK 광고를 발견하고서 토토는 바로 감이 왔다. TV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낭독 방법 등을 배우면 동화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는 아빠와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서 바로 이력서를 보냈다.

며칠 지난 뒤 NHK에서 서류가 왔다. '붙었으려나?'하는 마음에 봉투를 열어보니 토토가 보냈던 이력서가 나왔다.

"이력서를 직접 지참하고 오시라고 써놓았는데 왜 보내신 겁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실패! 그냥 관둘까 생각도 했지만 이력서 제출기간 종료까지 이틀 남았으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토토는 그 날 바로 히비야 공회당 옆에 있는 NHK로 이력서를 지참하고 갔다. 수험번호 5655번 카드를 받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응시하러 온 건가? 신문에는 "채용 인원수는 若干名 "이라고 써져 있었는데 "와카보시메이"는 몇 명을 말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가선 아빠에게 "와카보시메이"가 뭐예요?"라고 시치미를 떼고 물어보자 아빠께서 "약간 명을 말하는 거 아니니? 정확히 수를 결정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채용하겠다 그런 뜻을 담은 말이야."라고 설명해 주었다.(와카보시메이는 若干名 각 한자의 일본식 발음에서 흔히 쓰이는 발음을 이은 것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역자 주)

채용시험이 시작되었다. "아카마키카미, 아오마키카미, 키마키카미" 같은 빨리 말하기를 하는 일차 시험을 통과해 이차 필기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토토는 실패를 해버렸다. 시험장이 오챠노미즈에 있는 메이지대학교였는데 토토는 NHK로 가버린 것이었다.

이만 하면 됐다 관두자 생각하며 신바시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정기권 주머니 안에 천 엔 지폐 한 장을 비상금으로 숨기고 있었단 사실이 생각났다.

"이걸로 메이지대까지 갈 수 있나요?"

택시 운전수 아저씨에게 천 엔 지폐를 보여드리니

"갈 수 있지."

"부탁드립니다!"

메이지대학교에 도착하자 시험 담당 아저씨가 "빨리 와, 빨리!"라며 손을 흔드셨고 시험장인 계단형 교실에 오 분 지각으로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의 항목과 아래의 항목 중 연관되는 것을 선으로 연결하시오."

"카르멘 - 비제" "이사무 노구치 - 조각가"처럼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1952년도 방송부문 예술제 수상작품은? 같은 방송이나 연극에 관련된 문제는 어려웠다. 이런 문제가 총 이십 문항 정도. 토토는 자신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안경을 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토토를 흘겨보고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그야 그렇겠지.

두 번째 문제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묻는 문제. 이 정도는 괜찮겠지. 세 번째 문제는 "최근 들은 NHK 라디오 방송명을 적으시오."였다. 신년마다 방송되는 미야기 미치오 씨의 거문고와 아빠의 바이올린이 어우러진 <봄바다>를 들은 것이 생각나서 답안용지에 "미야기 미치오의 거문고와 바이올린이 이중주를 이룬 <봄바다>"라고 썼다. 아빠에게 비밀로 하고 보는 시험이라 아빠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새해에 어울리는 멋진 곡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문제는 "당신의 장점과 단점을 쓰시오"였다.

드디어 나를 알릴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는 생각에 토토는 연필을 고쳐 쥐었다. "장점"에는 망설임 없이 "정직함"이라고 적었다. 엄마께서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깐. 그 다음 "친절함"을 적고 "친구가 그렇게 말해 줍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우개로 지우고 적고를 반복하다 보니 종이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쓴 사람은 답안용지를 제출하고 계단형 교실에서 나갔고 토토가 답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거절한 남자도 "가볼게요."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좋은 사람인 건가 싶어져 신경을 쓰게 만든 걸까 하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단점"에는 원래 잘 읽어보면 장점과 연결되는 것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많이 먹음"이라든가 "정돈 못함" 같은 것만 떠올랐고 결국 이렇게 써내려갔다.

"저는 낙천적이어서 그런지 많은 것들을 곧잘 잊어먹곤 합니다. 어머니는 때때로 저에게 "참고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물어보겠는데 아까 너 실패했다면서 우왕하고 울었잖니?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깔깔 웃으면서 전병을 와구와구 먹고 있잖아? 아까 울었던 이유가 머릿속에 남아있긴 해?" 같은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럴 때 아까 일을 완전히 잊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반성이라든가 고민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 이것도 단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험시간이 끝났다.

누가 갑자기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토토가 일어섰을 때, 커다란 계단형 교실은 텅 비어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랬는데도 어째서인지 토토는 이 필기시험도 통과했다.

삼차 시험을 보기 전에 엄마께 NHK 극단 배우가 되기 위한 시험을 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동화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으니 NHK 시험을 보고 있다는 것, 아빠께선 반대하실 게 뻔하니 비밀로 해달라는 것 등을 전했다.

엄마는 토토의 마음을 이해해 주셨고 토토도 엄마께 이야기를 함으로써 외로운 싸움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삼차 시험인 판토마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앞서 한 사람을 따라했더니 어째 시험관이 크게 웃었다. 사차 시험은 노래였는데 시험관이 "이력서에 성악과를 나왔다고 적었는데 틀림 없나?"라고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물어보아서 붙을 자신이 싹 사라졌지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어 최종면접 시험에 임하게 되었다.

면접에선 수험 동기를 물어보기에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답했더니 "무슨 말을 하는 겐가?"라며 웃었다.

이력서의 아버지 성함 칸에 "불명"이라고 적어놨지만 아빠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쿠로야나기 양, 바이올리니스트인 쿠로야나기 씨와 관계 있나?"

"그게..."

역시 거짓말을 할 순 없다.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 말씀은 드렸나?"

"아버지께 말씀 드리면 그런 꼴사나운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게 뻔했기에 비밀로 하고 응시했습니다. 아, 꼴사납다는 건 아버지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거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시나?"

"이런 세계에는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지 말렴, 분명 이런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합니다."

토토가 필사적으로 답할 때마다 시험관들은 웃다가 죽을 판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이래서야 붙을 리가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면접시험 다음날 토토가 없는 사이에 NHK의 높으신 분이 집까지 찾아와선 엄마에게 토토가 내정을 받았음을 전하면서

"모리츠나 씨께서 허락해 주실지요."라고 물어보셨다는데 엄마께서 안심시켰다고 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 이 날을 평생 기억하자고 결심했다.

엄마께서 아빠를 잘 설득해주셨는지 아빠께서 토토에게 "열심히 해보렴."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2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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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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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5. 16:50

후지와라 극단에 취직한 선배로부터 오페라 연출가 아오야마 요시오 선생님이 <나비부인> 공연 조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일의 조수가 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페라 제작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기에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오야마 선생님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빠를 높이 사고 있었기에 이야기가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 참에 오페라 연출가가 되는 건 어떨까? 토토는 오페라를 좋아하고 나이에 비해 많은 작품을 접해왔다. 자신의 재능을 일 쪽으로 살릴 수 있는 건 극소수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들만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토는 아직 자신의 재능이 어떤 부분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엇이든 도전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오야마 선생님께서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어보시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저것 좀 가져오게."라고 말하시면 재빨리 가지러 가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비부인>이 무사히 상연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던 건데 아오야마 선생님이 생각하셨던 <나비부인>의 절정 부분 연출을 뉴욕 오페라 컴퍼니가 꽤 오랫동안 쓰면서 관객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토토가 보아온 선생님의 일 솜씨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였다. 가수의 움직임은 이렇게, 의상은 이렇게, 음악은 이렇게, 미술은 이렇게. 연출가가 작품에 정통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오야마 선생님의 정통함은 장난이 아니었다. 토토로선 발끝에도 못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쫄게 되었다.

미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토토의 재능은 대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고민으로 둘러싸인 음악학교 시절에 토토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점심 시간에, 수업 후에, 때로는 수업을 땡땡이 치고서 먹는 라면 한 그릇이었다. 토토가 라면 맛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토우요우음악학교에 다니게 된 뒤부터인데 마음에 들어하는 라면집도 학교 근처에 있었다.

가게 이름은 "타카라켄". 흔히 보는 동네 중국요리집으로 라면 한 그릇에 삼십오 엔이었다. 수타면을 잘 만드는 곳으로 이렇게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딸랑딸랑하고 문을 열자마자 국물이 자아내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카운터 쪽에 앉으면 사장님이 일심불란하게 면 제작에 열중하는 과정을 볼 수도 있었다.

벽에 뚫어놓은 구멍에서 굵은 대나무 막대가 퓨웅하고 튀어나와 있어서 그 아래에 면을 늘이기 위한 제작대가 있었고 거기에 원반처럼 생긴 면반죽이 놓여져 있었다. 사장님이 대나무 막대에 한발을 올리면 원반에 압력이 가해지도록 만든 것이다. 발꿈치를 이용해서 데굴데굴 대나무 막대를 굴리면서 사장님이 능숙하게 반죽을 늘려냈다.

통통통통.

맑은 소리를 내는 타악기처럼 대나무 막대가 내는 리드미컬한 음이 울려퍼졌다. 면이 "안 돼요, 이 이상은 못 늘어나요!"라고 비명을 지르기라도 할 정도로 얇고 넓게 퍼지게 한 다음 반죽을 접어서 가장자리부터 쓱쓱 잘라냈다. 

면을 치는 작업은 사장님의 기술을 보는 것도 맛있게 느껴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라면의 맛이 너무나 좋았다. 토토는 매일처럼 학교가 끝나고 나서 이 곳에 들렀다.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함께 키시모신 벤치에 앉아서 구운 감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키시모신은 순산을 돕는 신이어서 배가 부풀어 오른 여자들이 매일처럼 몰려와 참배를 하곤 했다. 친정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온 젊은 부인도 있었고 아이를 몇 명이고 데려와선 "또 왔어요!" 분위기를 풍기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추워보이는 표정을 하고 달려와선 절을 하고 바로 달려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배가 부풀어 오른 개가 신사 경내를 오가는 걸 보고 토토와 친구들이 폭소를 한 적도 있었다.

 

아빠의 복귀

 

그 날이 오기까지 출정 이후 오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게 되었다. 1949년 가을에 "십이 월 말에는 일본에 돌아갈 수 있다"는 엽서를 아빠가 보내왔을 때 가족 모두가 말 그대로 춤추며 기뻐했다. 할머니께서 우편 배달부 아저씨를 불러세워서 경사가 났다며 사례금을 주었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귀환하는 사람을 태운 귀환선이 일본해와 접해 있는 쿄토 마이즈루항에 입항한 뒤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이즈루에 가족들을 위한 연락소가 설치되어 거기에 편지를 부치면 아빠가 받아볼 수 있다는 걸 알고서 토토는 편지를 써서 마이즈루에 보냈다.

"아빠 어서 오세요. 오랫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가족들이 신이 나서 아빠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 집은 오오이마치선이 지나는 키타센조쿠에, 전과 같은 장소에 세워놓았어요. 빨간 지붕과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에요. 얼른 돌아오세요."

십이 월이 끝나갈 무렵 아침에 근처 약국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달려와 "오늘 아침 여섯 시 뉴스에서 남편 분이 귀국했다고 말하더군요."라고 하셨다.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있던 아빠가 드디어 일본으로 돌아온다.

노리아키는 아홉 살, 아빠가 출정했던 해 봄에 태어난 여동생 마리는 아빠에 대한 기억도 없는 채 다섯 살이 되었다. 그야말로 긴 시간이 지났지만 시베리아 포로 귀국사업이 1947년에서 1956년까지 이루어졌으니 비교적 빠르게 귀국한 편일 것이다.

가족이 모두 시나가와역까지 마중을 나가자 오랜만에 본 아빠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소중히 안고서 열차에서 내리셨다.

"토토스케! 많이 컸구나!"

아빠는 오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셨다. 그리움과 기쁨으로 토토의 가슴이 뜨거워져 가득 차올랐다.

그날 밤에 정말 오랜만에 아빠를 포함해 온가족이 단란하게 식사를 했다. 메뉴는 물론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출정하기 전까지 아빠는 부엌에 서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식사가 끝나자 가정부 분이 아빠의 그릇을 치우려 하자 아빠가 바로 일어나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라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모두들 당황했고 엄마도 "어머머?"라고 하는 듯 눈을 둥글게 뜨시고서 아빠를 바라보셨다. 수용소에서의 습관 때문일까? 가정부 분이 곤란해 했지만 엄마께서 "하게 내비둬요. 어차피 이삼 일도 못 갈테니."라고 말하셨다. 이 말대로 일 주일도 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온 아빠는 가사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귀국한 뒤 얼마간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연이어 찾아와 집이 무척 붐볐다. 아빠는 토쿄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가 되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이전처럼 움직이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었을 당시 이야기만 꺼내면 아빠의 입이 무거워지셨다.

"아빠는 시베리아에서 어떤 일을 했어요?"

토토가 이런 질문을 하면

"시베리아는 추웠어. 영하 이십 도 정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이 수용소 저 수용소로 지붕도 없는 트럭을 타고 가선 바이올린을 켰지."

이 정도 밖에 답하지 않으셨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체험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아빠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추려보면 아빠가 시베리아에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 같다.

아빠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소련군에 무장해제를 당해 전원 시베리아 수용소에 보내졌다. 처음엔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했는데 노동환경이 너무나 가혹했고 일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좋은 음식이라는 것도 고량을 섞은 밥이 조금에 소금을 친 오이와 청어절임 정도였고 생선을 싫어하시는 아빠는 이마저도 드실 수 없었다 한다.

아빠가 끌려가셨던 탄광에서는 러시아 민간인도 함께 일을 했는데 그 중 어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게 되었다.

"가족은 있어요?"라고 물어보기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가족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가 "이런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 여기서 도망치려다 총 맞거나 하면 안 돼요. 꼭 살아서 돌아가요."라는 말을 몸짓을 섞어가며 전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 할머니의 말에 상당한 기운을 얻었다고 하셨다.

어느 날 소련군 고관이 불러선 이런 말을 했다.

"듣자하니 자네는 일본에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더군. 이제부턴 일본인 수용소에서 위문공연을 해주게."

시베리아에서 억류되어 언제 조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포로들이 일본 노래를 듣고 싶다 희망했다고 한다. 아빠는 바이올린을 받아 음악을 좋아하는 전우들을 모아 위문음악단을 만들어 여러 일본인 수용소를 돌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황성의 달>이나 <유머레스크> 등을 연주하며 성대한 갈채를 받았다. <토쿄행진곡>이나 <언덕을 넘어> 같은 아빠가 알지 못하는 곡을 요청받았을 때엔 잘 아는 사람이 반복해서 부른 것을 참고해 악보를 만들기도 했다. 지붕이 없는 트럭 짐칸에 타고서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가는 설원을 몇 시간이고 이동하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활동을 하실 수 있었다니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군가를 연주해 달란 요청을 거절해 왔던 아빠가 시베리아에서 이를 악물고 강제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요청곡이라면 군가든 뭐든 열심히 연주하셨다. 귀환 후 토쿄의 거리를 거닐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며 "시베리아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습니다."라며 감사말을 전해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셨다고 한다.

소련군 장교가 "모스크바로 가서 음악학교 선생님으로 남아주지 않겠나?"라는 권유를 해왔을 때 마음이 조금 동하기도 하셨다는데  "일본 여성들은 모두 미군의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빠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모스크바행을 거절하셨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추위와 영양실조로 줄줄이 죽어갔다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아빠가 일본에 돌아오셔서 정말 기뻤다. 만약 아빠가 시베리아땅에서 돌아가셨다면 토토는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누군가를 증오하며 남은 생을 보내야 했을지도 몰랐을 테니.

시베리아에서 귀국한 아빠가 입고 있던 코트의 가슴 주머니엔 그 날 찹쌀떡과 함께 전해드렸던 가족사진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2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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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4. 23:03

헤맴

 

토우요우음악학교는 야마노테선 메지로역에서 도보로 십오 분 정도로 소우지가야의 키시모신이 보는 앞에 있었다. 입학한 후에도 토토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오페라를 보려 했고 그러면서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곡이 좋아!"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같은 구체적인 목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중 하나가 모차르트의 걸작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불리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였다.

"하아아아 앗하하하하하하하 하~"

이 부분의 가창법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 불리며 데굴데굴 굴러가는 듯한 노래법을 쓰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는 소프라노곡 중에도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가곡이었다.

토토는 혼자 있을 때 불러보기도 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높은 음을 내보니 소리를 굴릴 수 있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숙달하고 싶어."

토토는 결의를 굳혔다.

참고로 <테츠코의 방> 오프닝으로 쓰이는 곡은 원래 가사가 있는 곡으로 "콜로라츄라"라는 단어가 쓰인다.(콜로라투라는 이탈리아 단어로 이를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콜로라츄라가 된다 - 역자 주)

 

높은 소리를 낼 때엔 눈이 모이지 않도록

웃을 때엔 되도록 콜로라츄라로

와사비 겨자 후추 등은 피하도록~

담배는 특히 절대~ 하지 말아요~

하지만 술은 절대~ 끊을 수 없네~

 

이 노래는 소프라노 가수 시마다 유우코 씨가 공연했던 <즉흥음악극>이란 콘서트의 테마송으로 "끊을 수 없네~" 뒤에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하~~"라고 콜로라투라 기법으로 부르는 부분이 있다.

작사는 야마카와 케이스케 씨, 작곡은 이즈미 타쿠 씨가 담당했다. <테츠코의 방> 스태프가 방송 오프닝 곡을 이즈미 타쿠 씨에게 부탁했을 때 이 테마송이 삼십 초 정도라 시간상으로도 딱 좋았기에 이 곡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분도 꼭 이 가사를 <테츠코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춰 불러주셨으면 한다.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쳐 주신 타카야나기 후타바 선생님은 후지와라 가극단에도 소속되어 소프라노 가수로서도 맹활약을 하셨지만 토토가 동경하고 있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부르시진 않으셔서 학교 외에서 가르쳐주실 분을 찾기로 했다. 엄마와 상담하는 길도 있었지만 이제 아이가 아니니 직접 어떻게든 해보자 생각했다.

소프라노 가수라 하면 오오타니 키요코 선생님의 이름이 바로 떠올라 전화번호를 찾아 걸어보니 맥이 풀릴 정도로 곧바로 "좋습니다."란 답변을 얻어내 주소를 여쭤서 자택 겸 레슨 장소를 찾아뵙게 되었다. 토우요우음악학교에서 꽤 가까운 곳이었다.

거실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토토가 레슨을 청하자 선생님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아이라인까지 진하게 그린 메이크업과 붉은 립스틱, 천이 엄청 들어간 드레스 같은 복장을 하고서 맞아주셨다. 토토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실 때에도 우아한 분위기를 무너뜨리지 않는 선생님을 보면서 오페라 속 세계와 현실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선생님의 매력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오타니 선생님은 당시에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에 딱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부르는 아리아인 <이상해...아,그이인가..>도 소프라노지만 토토가 매료된 가느다른 음표를 잇는 듯 데굴데굴 굴러가는 콜로라투라와는 전혀 달랐다. 유감스럽게도 오오타니 선생님 또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부르시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토토가 동경했던 콜로라투라가 나오는 오페라는 사실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었고 그 중 한 곡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쓰인 <마술피리>가 당시 일본에서 상연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토토가 콜로라투라를 가르쳐주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학교에서는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수업도 있었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부를 때에 독일어 발음이 무척 중요한 것처럼 어학은 오페라를 부르는 데에 있어서 필수요소였다.

학교 쪽도 많이 힘들었을 거라 생각이 드는 게 어학 수업은 한꺼번에 모여서 들을 수 있었지만 음악 수업을 하려면 성별로 나누고, 거기에서 또 음의 높이에 따라 나누고, 악기도 거기에 따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끝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맞춰 선생님을 모으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콜로라투라가 아니면 싫어!"라며 투정을 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토토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선생님이 골라주신 곡과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의 차이에 반발하며 꿈과 현실의 간극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툭하면 교실에서 빠져나와 이케부쿠로까지 영화를 보러갔다. 게다가 교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하면서.

땡땡이를 치거나 때론 성실하게 수업을 듣거나, 오오타니 선생님의 레슨을 받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이어나가며 음악학교 생활을 보내는 동안 토토의 마음 속에 방황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었다. 토토보다도 훨씬 노래를 잘하는 선배들조차 오페라 가수로서 활약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거나 선생님이 되거나 음악 관련 회사에 취직하는 것을 보며 세상이 얼마나 험한 것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첼로 전공 남학생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만 첼로를 빌려주지 않을래?"

라고 토토가 부탁하자 선뜻이 "그래"라고 했다.

하굣길에 갑자기 거대한 짐을 지게 된 토토는 처음엔 왠지 멋지다란 생각을 했지만 들고보니 너무나 무거워 놀라게 되었다. 토토가 하교하는 시간엔 야마노테선이 항상 붐볐기에 이런 걸 안고서 만원전차를 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패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메구로역에 도달해 메카마선을 탔다. 전차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첼로에 부딪혔는데 깡마른 여자아이가 커다란 첼로를 안고 가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집에 도착했을 때엔 땀에 푹 절어 이런 걸 왜 빌렸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모처럼 가져왔으니 일단 켜보기라도 하자 생각했다.

마침 적당히 높은 의자가 있었기에 거기에 앉아 포즈를 취해 보니 그런대로 폼이 나는 것 같았다.

왼손으로 현을 눌러보았다.

딱딱해!

첼로의 현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굵고 딱딱했다. 겨우 몇 초 눌러봤을 뿐인데 손가락 끝이 저려왔고 현 자국이 손가락에 뚜렷히 나있었다.

이거 안 되겠네.

켜본 지 삼 분도 안 되어서 토토의 첼로리스트 꿈은 무너졌다.

다음날 남학생에게 첼로를 돌려주었다.

"어땠어?"

"곧바로 켤 수 있을 거란 저의 생각이 얕았사옵니다."

오페라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왕자 타미노와 새잡이 파파게노는 마법이 깃든 피리와 방울을 써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퇴치했지만 악기를 잘 다룬다는 것이야말로 마법을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에게서 악기 쪽 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못한 토토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다섯 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도 <고양이 춤> 정도 밖에 치지 못할 정도니 말이다.

 

2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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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2. 10:36

지유가오카 영화관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 오락거리라고 하면 영화였지만 피난 중이었던 토토로선 여자 좌장님이 선보인 연극 정도는 볼 수 있었어도 영화관에는 한번도 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토쿄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이 무척 부풀어 올랐다.

근처 영화관을 꼽자면 그 어디보다도 지유가오카에 있는 난푸우자(南風座)가 제일이었다. 역과 토모에학원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어 역에서 도보로 일 분이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코우란 친구 중에도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서 함께 보러 가기도 했고 혼자 보기도 하면서 방과후 시간을 쏟아부었다.

난푸우자는 창업자가 세계대전 당시 군대 일에 종사해서 세계대전이 끝나자 필요 없어진 비행기 격납고를 받아 여기에 영화관을 차렸다고 한다. 카마보코(가로로 잘린 타원 형태 어묵 - 역자 주) 모양을 하고 있어서 "카마보코 영화관"이라고도 불렸다. 토모에학원도 필요 없어진 전차 차량을 교실로 썼는데 옛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재활용을 곧잘 했었다. 입구에는 종려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영화관 이름에 어울리는 남국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왜 난푸우자를 좋아했는가 하면 제대로 된 신작 외국영화가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굣길 도중에 어딘가 들르거나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토토와 친구는 신작을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기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난푸우자에 들어가려 필사적이었다.

코우란 선생님들 중에도 난푸우자 팬이 많다는 걸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날 난푸우자에선 인기 시리즈 최신작 상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지라 엄청나게 붐볐고 토토와 친구는 어떻게든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매표원이 "자리가 더는 없어요."라고 했지만 가장 뒤에서 서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기로 했다.

컴컴한 공간 안에서 둘이서 나란히 서서 보고 있으려니 뒤늦게 입장한 여자가 토토의 어깨에 부딪혔다.

"어머, 죄송해요."

낯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스크린의 어두운 빛이 비추었다.

"앗!"

토토가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곳짱 선생님이었다.

"쉿!"

곳짱 선생님이 검지를 입에 대면서 토토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린 뒤 아무 말도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못 본 척할 테니깐 여러분도 못 본 척해줘요. 어쨌든 영화나 재밌게 보자고요."

곳짱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그런 싸인이 느껴졌다.

이 때 상영된 영화는 밥 호프와 빙 크로즈비란 2대 스타가 같이 출연한 "~로 가는 길 시리즈" 중 하나였다.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는지 <알래스카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다리와 난쟁이 콤비가 전세계의 여러 나라로 가는 길에 벌어지는 일을 담은 뮤지컬 코미디였다.

토토는 밥 호프의 말투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상영 후에 곧바로 흉내를 내보기 시작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연습 성과를 피로하니 영화를 보지 않은 친구들도 웃었을 정도였다. 곳짱 선생님도 보신다면 더욱 웃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곳짱 선생님의 손바닥을 떠올리며 참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더욱 영화를 좋아하게 된 토토는 에비스 쪽 영화관에도 가게 되었다. 여기에선 유럽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아침 여덞 시부터 밤 아홉 시 까지 여덞 편 연속으로 프랑스 영화를 상영해서 이걸 보러 간 적도 있었다. 엄마에겐 "내일 학교 행사를 준비해야 해서 평소보다 늦을 거예요."라고 거짓말을 하고서.

그러던 어느 날 토토는 그 후 인생을 좌우할 운명 같은 영화를 만났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토스카>를 영화로 보게 된 것이다!

푸치니가 작곡한 <토스카>는 정열적인 가희 토스카와 화가 카바라도시의 비극적인 사랑이 그려진 작품으로 토스카가 카바라도시를 만나게 되는 교회 장면에서부터 산탄젤로성에서 몸을 내던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토토는 토스카의 음성과 의상에 푹 빠져버렸다.

가희 토스카는 커다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우아하게 등장해 높고 맑은 소프라노로 "아아아~"라고 화려한 노래를 불렀다. 드레스엔 호화로운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하고 커다랗게 파인 가슴엔 흔들릴 때마다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으며 머리에는 롤 형태로 만든 머리카락이 수십 가닥은 있어서 하나하나 꽃으로 장식해 놓았다.

우와 멋지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을 것도 거의 없었던 토토로선 꿈만 같은 장면이었다.

이 꿈이 토토의 모든 감각을 휘저었다.

이 사람처럼 되자! 토토가 결심했다.

 

오페라 가수가 될래

 

어릴 적 토토는 스파이와 호객꾼과 역에서 표를 파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에 발레 <백조의 호수>를 봤을 때엔 자신도 언젠가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토모에학원 코바야시 선생님 앞에서 "어른이 되면 이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좋아했던 토모에학원은 공습으로 불타버렸다. 학생이 된 토토는 옛날처럼 "ㅇㅇ이 되고 싶어"란 이미지를 명확히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께서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배웠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기에 토토는 그 "하고 싶은 것"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고 <토스카>는 그것이 보이게 된 촉매가 되어주었다.

토토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눌러담은 듯한 오페라 가수라는 직업이 토토의 눈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토토는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쓰지 않고 "오페라 가수가 될래"라고 멋대로 결정했다.

"신께선 어떤 사람에게든 뛰어난 재능 한 가지를 꼭 부여해 주신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재능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서 그걸로 생을 마친다.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 같은 사람들은 재능과 직업을 잘 맞춰낸 사람들이다."

토토가 <토스카>를 보았을 무렵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 직업과 연결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 결정했어도 어떤 걸 어떻게 배워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코우란 친구들과 상담해 보자 "그럼 역시 음악학교 같은 곳을 가야 되지 않을까?"란 말을 들었다. 토토의 엄마가 음악학교에 다니다가 아빠와 만나 결혼을 했으니 우선 엄마께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은데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로 답이 돌아왔다.

"그러니? 그거 좋네."

 

쇠뿔도 단 김에 빼라. 토토는 그 무렵 코우란여학교 4학년이었다. 당시 학제가 바뀌어 가고 있어서 6-3-3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다. 예전 제도상으론 중학교는 5년제였지만 4학년 때에 졸업을 하고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토토도 4학년에 졸업하고서 음악학교로 진학했으면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음악학교에 들어가 하루라도 빨리 능숙해지면 더 빨리 배역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척이나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리 생각하게 된 건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도에도 원인이 있었다 본다. 그 길다란 줄! 당시 토토로선 줄 앞쪽에 서야만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빠른 자가 이긴다는 발상에 젖어있었다.

토쿄를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몇 곳이나 되는 음악학교의 접수창구에 "입학하고 싶습니다만."이라고 말해보았는데 학교 중엔 "얼마나 기부하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대놓고 물어보는 곳도 있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었기에 학교 건물을 다시 짓기도 하고 변경된 학제에 대응하기 위해 커리큘럼을 보충하기도 하는 등 당장 필요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좀 생각해 보니 기부액이 합격을 결정하게 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한들 아쉽게도 이런 답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겐 비밀로 하고 시험을 보러와서 기부 같은 건 무리입니다."

"아버지에겐 비밀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여자가 일을 하는 것, 하물며 가수가 된다니 그런 업계에서 고생을 하는 꼴을 볼 수 없다 생각하는 분이라고 엄마께서 말씀하셨다.

추리고 추려낸 후보 몇 곳 중 엄마도 다니셨던 토우요우음악학교에서 기부금 같은 걸 내지 않아도 그냥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고 무사히 합격해 토토는 토우요우음악학교 학생이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토토가 보았던 <토스카>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본인이 부른 것이 아니라 다른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준 것으로 토스카 역 배우는 거기에 맞춰 입만 뻥긋했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동급생 남자애가 쓰잘데기 없이 말하길

"그 있잖아? 소프라노는 추녀고 테너는 근육 밖에 모르는 멍청이라는 말. 그거랑 같은 거야."

토토도 소프라노 지망이었다.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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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1. 17:02

하굣길에 놀러간 동급생 집에서 돌아가려 하니 "도중까지 바래다 줄게."라고 하는 친구와 둘이서 이케가미선이 지나가는 나가하라역까지 걸어갔을 때 역 앞에 "손금 봐드립니다"라고 써진 천을 걸고 앉아있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토토가 "헤에"라고 하며 남자를 바라보자

"안녕하세요, 손금 봐드립니다."

라고 말을 걸어왔다. 토토는 열여섯이었고 손금 같은 건 어른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깜짝 놀랐다. 젊은 남자는 몸집이 작고 얇은 회색 키모노를 입고 있었다. 대가 약해 보인달까? 그 시절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그랬듯이 영양부족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상냥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모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 봐줬으면 했다. 요금이 써져 있는 부분을 보니 마침 토토가 가지고 있던 용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정도였다. 지갑을 확인해 본 뒤 머뭇거리는 친구를 설득하며 "부탁드려요"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 날 토토는 토끼 인형을 안고 있었다. 코우란에 도달한 라라물자 속에서 발견한 토끼는 예전에 카메라맨 숙부님이 선물로 주신 얼룩이 인형과 마찬가지로 토토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토토는 토끼를 안고 있지 않은 쪽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은 다소 더러웠다. 토토는 걸어갈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저곳 만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기에 이 날도 손금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러운 상태였다. 이러니 엄마로부터 "손 좀 씻으렴!"이라고 잔소리를 듣지.

손금 보는 사람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토토의 손을 잡고서 당분간 빤히 돋보기를 통해 손바닥을 바라본 뒤 살며시 손을 놓았다.

"반대편 손도 보여주십시오."

그 말대로 토끼 인형을 다른 손에 든 뒤 손을 내밀었는데 그 쪽 손은 훨씬 더러웠다.

"죄송합니다, 더럽죠?"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손금 보는 사람은 웃으며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손바닥 뿐 아니라 옆면이나 손톱 등을 본 뒤 손을 놓았다. 그리고서 토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결혼이 늦을 겁니다. 무척 늦을 거예요."

토토는 무심코 친구와 마주보며 웃었다. 열여섯 먹은 여자아이로선 결혼은 아직 한참 뒤의 이야기일 텐데 그게 늦어질 거라 한다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하지만 토토와 친구가 웃고 있는 것은 상관도 않고 손금 보는 사람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돈 문제를 겪을 일은 없겠군요. 그리고..."

다시금 토토의 손바닥을 본 뒤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방방곡곡 퍼질 겁니다."

"방방곡곡"

토토가 되묻자 손금 보는 사람은 조금 곤란한 듯 헛기침을 했다.

"어떻게 퍼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오는 군요."

이런 말을 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

"이나리 신님을 숭배하면 좋을 거예요."

이 말에 토토는 더더욱 크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크리스찬 가정에서 자라 영국 성공회가 만든 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 "이나리 신님" 운운이 너무나 웃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토가 너무 웃어서인지 그 사람은 자신에 차있는 듯하면서도 친절한 어조로 단정지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토토가 감사를 표하며 요금을 지불한 뒤 역을 향해 걸어갔을 때 즈음엔 주변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에게

"방방곡곡 이름이 퍼진다네요."

라고 보고했다. 저녁밥 준비를 하던 엄마는 냄비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뭔가 나쁜 짓을 해서 신문에 나오는 것 아니니? 조심 좀 하렴."

 

그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NHK의 "꿈 속에서 만나요."에 출연했는데 연말 밤에 에이 로쿠스케 씨, 아츠미 키요시 씨, 사카모토 큐우 씨와 함께 아카사카 토요카와 이나리 신사에 새해 첫 참배를 가게 되었다. 경내에 예능의 신 변재천도 모셔져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이야기가 나오면서였는데 생각해보니 나가하라역 앞에서 손금을 보던 남자가 꽤나 용했던 것 아닐까?

 

코우란여학교 선생님들

 

코우란여학교 선생님들은 교장 선생님이나 채플린 선생님을 빼면 대부분 여자 선생님이었는데다가 코우란 졸업생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하나같이 애교심이 강한 분들이셨다. 침착성을 찾아볼 수 없는 토토 같은 학생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코우란 학생다운 정갈한 몸가짐을 가지세요."라고 주의를 주곤 하셨다.

선생님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분은 영어와 성서를 담당하셨던 시호자와 토키 선생님이셨다. 시호자와 선생님도 코우란 졸업생이었다. 코우란여학교는 영국계 학교였기에 세계대전 중엔 군부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시호자와 선생님은 영국 유학 경험도 있어 친영파로 찍혀 교회를 통해 일본의 내부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 아니냐며 스파이 혐의로 헌병의 취조를 받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 힘든 시기를 넘겨 크리스트교 신앙을 기초로 하는 교육을 다시금 펼칠 수 있게 된 시호자와 선생님의 지도는 무척 엄했다.

"쿠로야나기 양, 오전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에게 와주세요."

예배가 끝난 뒤 시호자와 선생님에게 호출당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예배시간 동안 선생님에게 혼이 나거나 할 일을 한 적은 없었기에 대체 뭐람 하고 타이코다리를 건너 교무실로 가자 이런 말을 들었다.

"쿠로야나기 양이 어제 역에서 커다란 소리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던데 코우란 학생이면 그런 큰 소리로 말을 해선 안 됩니다."

엄한 말투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반항을 용납치 않는 박력이 느껴져 토토로선 "죄송합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카네타카 로즈 씨가 오셨던 바자회 때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자회에서 나온 수익은 전액 아동보호시설이나 양로원, 특수학교, 한센병 요양소 등에 기부된다. 선생님들 중엔 "일부만이라도 학교를 위해 쓰는 게 낫지 않나요?" 같은 의견을 내비친 분이 있었는데 시호자와 선생님이 의연한 태도로 "우리는 바자회를 연 거지 시장에서 바겐세일 장사를 한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확실히 사전에서 바자회를 찾아보니 "자선사업 등의 기금을 얻기 위해 여는 판매회"라고 써져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건 "곳짱 선생님", 고토우 야에코 선생님이었다. 곳짱 선생님도 코우란 졸업생으로 영어 선생님으로서 모교에 돌아오셨다. 원예부 지도에도 열심이셔서 학교가 불탄 곳에 화단을 만드셨다고도 한다.

"가진 것이 많아 느끼는 행복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기에 느끼는 행복도 있죠. 양 쪽을 알고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라 생각해요."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사람과 어울리게 되겠지만 학교에 다닐 때 사귄 친구가 최고예요."

등등 곳짱 선생님은 많은 명언을 남기셨다. 빈번히 사전을 찾아보시는 모습도 학생들 기억에 남아 이런 자세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새로운 남자 선생님이 부임해 수학을 배운 적이 있었다. 남자 선생님은 드물었기에 토토와 친구들은 "여자들 속에서 남자는 왕따~"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선생님과는 왠지 모르게 상성이 나빴다. 수업 때에 "질문 있나요?"라고 물어보시기에

"대수학 같은 걸 왜 하나요? 무엇에 필요한가요?"

라고 물어보았는데 대수학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내일까지 생각해 올게요."

라고 말씀하신 뒤 다음날 이렇게 설명하셨다.

"기하학을 배우면 나무 위를 오르거나 하지 않아도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리를 일부러 걷지 않아도 얼마나 긴지 계산해서 알 수가 있죠."

그건 필요한 거긴 하네라고 토토는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이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대수학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무척이나 한심한 대답이었다.

수학 시험을 볼 때 답안용지에 "선생님은 거짓말쟁이.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되죠."라고 쓰기도 했다. 새로운 교과서가 배포되었을 때 "전 못 받았는데요?"라고 말한 토토에게 선생님이 뻔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빨갛고 커다란 글자로 "마이너스 10점"이라고 쓴 답안용지를 토토에게 주었다. 그 뒤로 당분간 토토가 이 선생님과는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자 며칠이 지난 뒤 복도에서 마주친 선생님이 불러세웠다.

"전에 시험지에 마이너스 10점이라고 썼던 건 교사로서 있을 수 없는 태도였다고 생각하기에 취소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꺼내기에 반성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되묻자 "0점입니다."라고 하길래 "됐어요. 취소 같은 거 필요없어요."라고 말해버렸다.

친구에게 "그 수학 선생 너무 싫더라."라고 말했더니

"수학 선생님이 싫은 게 아니라 애초 수학 자체가 싫은 거 아니야? 전에 있던 수학 선생님이 시험을 냈을 때에도 커다란 소리로 '있잖아, 모두 백지로 내지 않을래?'라고 외쳤잖아?"

라는 말을 들었다. 어라? 정말 그런 말을 했던가?

 

2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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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6. 22:34

어렸을 적부터 토토는 편지라는 것에 애착심을 가져왔다.

처음 받은 편지, 엽서는 토토가 유가와라 온천에서 치료를 하고 있을 무렵 함께 해주신 아버지 쪽 할머니로부터였다. 무척 아름다운 글자로 "네가 깜빡하고 놓고 간 납석은 내가 보관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찾으러 오렴."이라고 써져 있었다. 토토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납석은 쇼와 시절 아이들이 길에 그림을 그리며 노는 데에 썼던 것이지만 편지 수신인으로 자신의 이름이 써져 있는 걸 보니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세계대전 중에 <세계명작선>을 읽었다. 거기에 수록된 에리히 케스트너 작 <핑크트헨과 안톤>을 좋아했다는 걸 이 책 처음 부분에 써놓긴 했지만 함께 수록되어 있는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가 형에게 보낸 편지도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1886년 9월 1일 둘째 형 니콜라이에게 쓴 편지. 이건 문학작품이 아니라 편지인 것 같은데 일본에선 문학으로 소개된 것 같다. -역자 주  https://blog.naver.com/il0202/223334684045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도 마음 아파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쓰여져 있었다. 체호프가 생각하는 "상냥함"이 토토에게도 전해져서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양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를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케스트너의 팬인 토토는 열여덞 살 때에 케스트너 작품을 번역을 맡고 있던 독일문학자 타카하시 켄지 선생님께 마음을 굳게 먹고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무척 멋진 답장을 보내주셨고 그 이후로 펜팔을 하게 되었다. 타카하시 선생님께서 "서로 편지 말미에 '구호는 케스트너'라고 쓸까요?"라고 제안해 오셨을 때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치즘과 단호히 싸워왔던 케스트너의 작품은 소리내 웃을 정도로 재밌는 와중에도 어딘가 비꼬는 면이 있었다.

이러던 와중에 선생님이 힘을 써주신 덕에 무려 케스트너 본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 케스트너가! 진심을 다해 편지를 쓰면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타카하시 선생님을 필두로 한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토토는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말괄량이 삐삐)을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씨의 편지도 가지고 있다. <창가의 토토> 영어판이 나왔을 때 어떻게 해서든 린드그렌 씨가 읽어주셨으면 해서 책과 함께 편지를 보냈더니 린드그렌 씨가 직접 답장을 보내주신 것이다. "눈이 나빠져 책을 읽을 수 없지만 딸아이가 읽어줄 때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토토는 꿈을 꾸는 것처럼 기뻐 오랫동안 공부용 책상 유리 밑에 끼워놓아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린드그렌 씨가 돌아가신 것을 신문으로 알게 되었을 때엔 슬펐지만 아흔네 살이셨으니 장수하셨구나! 삐삐의 재미는 린드그렌 씨의 힘에서 나왔던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2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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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5. 16:59

카네타카 로즈 씨

 

토토는 코우란여학교에서 "라라물자"라는 걸 받았다. 라라는 Licensed Agencies for Relief in Asia의 머릿글자로 세계대전 후 당분간 미국 종교단체나 자선단체가 모은 식료품, 의약품, 학용품 등 구호물품이 일본에 보내진 것이었다. 이 물자는 옷이나 학용품 등이 벼룩시장처럼 늘어놓아져 있어서 각자 가지고 싶은 것을 입어보고 가져갈 수 있었다.

추운 계절이었기에 모두들 옷을 갖고 싶어했지만 토토는 학용품 중에 푹신해 보이는 토끼 인형이 놓여져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난 저게 좋아."

그 이후로 토토는 어디를 가든 간에 그 토끼 인형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토토는 이런 푹신한 감촉이나 반짝반짝거리고 팔랑팔랑거리는 그런 것에 굶주려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코우란에서는 언제나처럼 바자회가 열려 학생들은 모두 인형을 만들어와야 했다. 토토는 피난 중에도 계속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은 곰인형을을 본따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작은 곰인형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가족이 입지 못하게 된 스웨터를 풀어서 어린이용 양말을 짜온 아이도 있었고 "먹거리가 있는 게 좋지 않나?"라며 고구마 경단을 만들어온 아이도 있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인형 같은 것들이 팔리는 게 무척 기뻤고 그 중에도 고구마 경단은 인기가 너무 좋아 금방 매진되었다.

 

어느 졸업생이 보러 왔을 때 이 날 중 가장 큰 환호성이 울렸다.

카네타카 로즈 씨. 어떤 때엔 여행가, 어떤 때엔 저널리스트, 그리고 어떤 때엔 에세이 작가. 카네타카 로즈란 본명보다도 필명인 카네타카 카오루 쪽이 유명했던 걸로 기억한다. TV 방송 <카네타카 카오루 세계여행>으로 아는 분도 있으실 것이다. 방송은 1959년부터 삼십일 년에 걸쳐서 방문한 국가수만 해도 백오십 개국 이상. 리포터 겸 네래이션 겸 프로듀서로서 미지의 세계와 여행의 매력을 전해왔다.

"바자회에 카네타카 로즈 씨가 보러 올 예정"이란 정보는 순식간에 퍼졌는데 로즈 씨가 코우란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고 물론 TV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이었기에 유명인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 화려한 모습은 모든 재학생들이 동경하기에 충분했다. 학생 중 누군가가 필름을 마구 인화했던 건지 어째 모두들 로즈 씨 사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토도 물론 가방 속에 놓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세상에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인상이 굵고 눈빛이 살아있는 사진이었다.

예정시간이 가까워지자 다들 구품불 문 근처로 몰려들어 사진을 손에 쥐고 언제 도착하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려니 멀리서 키 큰 여성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카네타카 씨!"

"로즈 님!"

평소엔 얌전하던 상급생들이 볼에 홍조를 띄우며 있는 힘껏 이름을 외쳤다.

로즈 씨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존재감에 토토도 숨을 죽였다.

커다란 눈동자에 장미색 입술, 섬세하게 땋은 세 갈래 머리를 카츄샤처럼 묶은 헤어스타일. 양모 코트는 칼라 부분만 모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코트 아래엔 당당한 판타롱 수트. 그야말로 서양 남자에게 어울릴 듯한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코우란 선생님들이 "모피도 판타롱도 너무 화려합니다."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코우란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절 문을 통과하는 로즈 씨 뒤를 학생들이 뒤쫓았다. 뒤에서 신발 쪽을 보니 굽이 있는 구두가 살짝 보였다.

로즈 씨는 지참해 온 물품을 마구 팔아댄 뒤 선생님들에게 계산을 부탁한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날 매상 넘버원은 로즈 씨였다. 계속해서 로즈 씨 사진을 찍는 상급생도 있었기에 토토가 "저한테도 인화해 주세요."라고 부탁한 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 뒤로 삼십 년 가까이 지나 카네타카 카오루 씨가 <테츠코의 방>에 출연하게 되었다. 바자회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로즈 씨와 나눈 여행 추억담이 지금도 토토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토토는 쭈욱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을 여쭤보았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세계여행> 중에 아프리카 오지에 갔던 방송이 있었는데 촌장님이 매우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표하는 방식이었던가요? 입 안에서 우물우물 씹던 걸 뱉어서 드세요라고 했더니 그걸 카네타카 씨가 바로..."

"촌장님으로선 어쩌면 먹지 않지 않을까? 아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마음이 다소 있었던 거겠죠. 그러니 그걸 제가 먹어야 안심하고 친구가 되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나중에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친선대사로서 세계 각지에 있는 병원과 난민캠프 등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죽음 근처까지 가있는 아이와 만났을 때 토토는 그 아이를 양팔을 모아 안아주었다. 일본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코우란여학교 선배님이 건네주신 바통을 손에 쥐고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방과후의 두근거림 

 

코우란을 다닌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 태어나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받았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가려고 역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쿄는 대단하구나 싶은 게 출발시간을 암기하지 않아도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십 분 내로 전차가 온다는 것이다. 피난 중엔 한번 기차를 놓쳤다간 다음 기차까지 두 시간은 기다려야 했으니깐.

이 날은 혼자였는데 플랫폼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학생복을 입은 낯선 중학생이 토토에게 달려왔다.

"저기..."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너무나 머뭇거리기에 토토가 명확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무 말도 않고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토토가 그 봉투를 받자 또다시 아무 말도 않고 발을 돌려 맹렬히 대쉬. 너무 놀라 다섯 번 정도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와중에 그 중학생은 역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거, 연애편지라는 건가?"

집에 돌아와 조금 두근거리며 편지를 열어보았다. 봉투가 꽤 단단히 붙어있어서 어거지로 열었더니 봉투의 삼각형 부분이 찢어져 버렸지만 편지는 찢어지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편지지를 살며시 펼쳤다.

"막 삶아낸 고구마 같은 당신에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문장을 읽으며 토토의 두근거림은 열받음으로 바뀌었다.

잠깐만!

이게 정말 러브레터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막 삶아낸 고구마"는 아니잖아? 자신의 외모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좀더 로맨틱한 단어를 쓸 수 없나?

너무해! 토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뒷부분은 한 줄도 읽지 않고 박박 찢어서 버려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표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계대전 후 식량난이 계속되어 피난해 있었던 아오모리라면 모를까 토쿄에서 삶은 고구마라면 충분히 호화로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촉촉하고 달고 따뜻한 "막 삶은 고구마"란 그 중학생이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척 좋아하는 토토를 거기에 비유한 것이 그 학생에겐 최대의 찬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춘기로 돌입한 토토에게 거기까지 생각할 힘은 없었다.

그 중학생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글을 썼던 걸까? 학생복을 입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막 삶은 고구마"가 너무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다른 것을 몽땅 잊어먹었다.

 

2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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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나중 일이지만 코우란여학교 동창회지에서 토토는 이런 문장을 썼다.

"공부를 조금도 하지 않아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빴던 저입니다만 최소한 교가 가사처럼 살아가겠다는 마음만큼은 항상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토토는 예배시간에 부른 찬송가뿐 아니라 "산 속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도"로 시작하는 코우란여학교 교가를 무척 좋아했다.

 

산 속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도

정원으로 옮기면 아름다워지니

시간과 장소는 세상의 천성이요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라는 가사가 학생들에게 일종의 슬로건처럼 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학교에 익숙해지면서 친구도 늘어나 방과후에 친구집에 들러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도 "장래엔 어떻게 할 거야?" "넌 어떻게 할 건데?"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 요즘 여자애들처럼 아이돌 이야기로 꺄악꺄악거리는 발랄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락거리가 적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말하면 그렇긴 하지만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라는 것을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토토도 "어떻게 하면 자신을 피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항상 멍하니 생각하곤 했다.

당시에 "자신을 피워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많은 여성들이 선택한 건 결혼이었다. 담임선생님이었던 아오키 시노부 선생님이 결혼으로 퇴직하게 되어 조례시간에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아오키 선생님은 결혼을 위해 교사 일을 그만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토토는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다가 순사 아저씨에게 혼난 뒤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 때만큼은 다른 애들과 같이 우왕하고 소리를 높여 울었다.

담임 선생님 같은 멋진 분이 결혼을 했다. 교사 일을 계속 할 수 없으시다.

그래도 사람 눈을 신경쓰지 않고 울 수 있게 된 것도 토토를 비롯한 모두가 되찾을 수 있게 된 자유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운다 한들 순사 아저씨에게 혼날 일은 더는 없었다.

 

실연

 

센조쿠교회에는 어릴 적부터 훗날 NHK 일로 바빠질 때 즈음까지 세어보면 약 이십 년 정도 신세를 졌다.

토토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성탄 연극을 선보였다. 토토는 다소 조숙했기 때문에 예수님 역을 맡았는데 연습 중에 무릎을 끓고 양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에게 "먹으렴." 하고 종이를 입에 쑤셔넣었는데 양은 종이를 먹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폭력적이어선 못 써요!"라며 배역에서 강판당해버렸다.

토토가 양 역할을 맡게 되면서 지금까지 했던 예수님 역보다 훨씬 심심해지면서 새로이 예수님 역을 맡은 아이에게 "종이 먹을 테니깐 주세요, 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조용히 좀 못해요!"라며 결국 양 역할도 강판당했다.

세계대전 중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합창단에 들어가 등화관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현관이나 창가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따뜻한 설탕물이나 찐 고구마, 옥수수빵 같은 걸 받을 수 있었다. 설탕 같은 경우 분명 그날 밤을 위해 모으고 모아두었던 걸 주셨던 것일 것이다. 토토는 솔선해서 참가했다.

토토는 일 주일에 네 번이나 교회에 갔었다. 교회 사람들은 토토에게 친절했고 하숙하는 집이 센조쿠교회 근처였기 때문에 주일학교 외에도 화요일에 있는 신자집회, 수요일에 있는 기도회, 금요일에 있는 성서 공부회에도 출석했다.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찬송가 반주를 오르간으로 쳐주시는 분이 그만두게 되어 대신할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이걸 알게 된 토토는 서둘러서 늙은 목사님과 직접 담판을 지었다.

"제가 하게 해주세요!"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늙은 목사님은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라며 웃으셨다.

토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토토가 그 때 젊고 잘 생긴 부목사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토는 오르간을 잘 친다고 말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칠 수는 있는 열의가 있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혹시 토토가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면 "다음 주일학교 찬송가는 몇 번 곡으로 할까요?"라며 부목사님에게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건넬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토토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부목사님은 해군병학교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교회 옆 늙은 목사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토토는 교회 근처 엄마 친구 분 댁에서 하숙하고 있었으니 이런 점에서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교회에 가면 반드시 부목사님을 만났다. 키가 무척 컸고 테가 없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 눈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잠버릇에 푸석푸석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또한 매력적이었고 늙은 목사님을 대신해 하는 기도나 설교 등도 훌륭했다. 좋아하는 점을 꼽으라면 끝이 없었지만 토토는 그 중에도 특히 목소리를 좋아했다. 

부목사님을 보며 "멋지구나"라고 생각한 사람은 토토 외에도 많이 있었는데 신자 수가 꽤 늘어난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부목사님의 인솔 하에 함께 병에 걸린 신자 문안을 간 적도 있었는데 토토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도 부목사님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져 추위를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부목사님이 히로시마에 있는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 충격에 놀랄 여유도 없이 교회에서 누군가가 퍼뜨린 말에 토토의 마음은 짓눌려 산산조각 났다.

"부목사님이 결혼을 한다네요!"

상대는 토토보다 훨씬 연상이고 아름다운 신자 분이었다. 그 분도 일 주일에 네 번은 교회에 왔으며 교회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토토는 경솔하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와, 어떡하지...

최소한 기념이 될 수 있는 물건이라도 드리고 싶어.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돈도 없었다.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여 하숙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 멀리서 무척 신기한 것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머쉬멜로우가 붙은 것처럼 새하얗고 푹신푹신해 보였다.

아름다워! 토토는 그 나뭇가지를 상자에 넣고서 리본으로 묶어 멋진 선물을 완성시켰다.

부목사님과 헤어지는 날에 토토는 토쿄역까지 배웅하러 달려왔다.

그 날 토토는 하얀 블라우스와 고블랭직 바지에 빨간 신발을 신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스와노타이라에서 일본군이 버린 낙하산을 배급받아 엄마께서 만들어주신 것이고 고블랭직은 원래 키타센조쿠 집에선 소파 천이었던 걸 피난 당시 보자기 대신 쓰고 스와노타이라에선 인테리어 재료로 썼던 걸 엄마께서 바지로 다시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빨간 신발은 토쿄에서 배급받은 하얀 운동화를 페인트집에 부탁해 빨갛게 만든 것이었다. 페인트집 아저씨는 "마르면 엄청 뻣뻣해질 텐데?"라고 했지만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영화에서 본 발레용 신발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빨간 신발을 만든 페인트는 아저씨의 걱정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쩍쩍 갈라졌다. 그래도 당시엔 빨간 신발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으니 토토에겐 자랑스러운 신발이었다.

작별선물을 담은 상자는 토쿄역에서 "우주에서 보내온 물건이에요."라며 농담조로 건넸다. 토토는 찢어져라 손을 흔들며 부목사님이 탄 기차를 교회 사람들과 함께 배웅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 <오가와 히로시 쇼>의 "첫사랑 이야기"라는 코너에 출연하게 되었다. 좌장님 때도 그렇고 이 방송에 많은 신세를 졌는데 이 때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지만 부목사님과 만날 수 있었다. 부목사님은 목사직을 그만두고 다시 자위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부목사님은 토토의 선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머쉬멜로우 같아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이 토토가 가장 싫어하는 사마귀의 알이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부목사님이 히로시마에 도착해 상자를 열어보니 부화한 사마귀 유충들이 와글와글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토토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키타센조쿠역 부근에 빨간 지붕을 얹은 새하얀 집이 완성되어 스와노타이라에서 돌아온 엄마와 할머니, 노리아키, 마리와 함께 다섯 가족이 살게 되었다. 빨간 지붕을 얹은 하얀 집은 무척 눈에 띄었다. 토토도 하숙집에서 이사를 하면서 다시금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어 기뻤다.

자, 남은 건 아빠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2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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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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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4. 00:04

토토는 현관에서 나막신을 벗고 건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머뭇거리며 문을 열고 보니 타타미가 깔린 넓은 방이 보였고 안쪽 문 너머로 또다른 방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방 주변에 판자가 깔려있어 더할 나위 없이 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게 이층 건물로 되어 있는 게 신기했다.

수업 전에 예배가 있다고 들었기에 판자 바닥 쪽에 놓여있는 피아노 옆에서 기다리고 있자 곧바로 학생들이 들어와선 안쪽 문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타미방이 두 배로 넓어졌고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하며 학생들이 속속히 들어왔다. 모두들 너덜너덜한 성가집을 들고 있었는데 찬송가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토토도 서둘러 가방에서 성가집을 꺼내 뒷편에 섰다.

점퍼스커트 형태 교복을 입기로 규정이 되어있긴 했어도 제대로 그런 교복을 입은 학생은 한 명도 없이 토토도 다른 학생들도 하얀 블라우스 같은 걸로 교복을 입은 모양새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백 명 정도 되는 학생이 타타미 위에 정렬하자 입구 근처 문을 열고서 "채플린"이라 불리는 학교소속 남자 목사가 들어와 조용히 예배를 시작했다. 채플린은 검고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장자리가 하얀 만다린 칼라가 인상적이었다.

토토는 오랜만에 찬송가를 불렀다. 토토가 주일학교를 다녔던 센조쿠교회에선 오르간을 썼기에 피아노 반주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긴 했지만 피아노의 음색을 듣는 것만으로도 짠해졌다. 엄숙하면서도 들뜬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며 음악은 좋구나 싶었다.

그런데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던 토토의 귀에 익숙찮은 목소리와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칭~, 나무아미타불...

찬송가에 집중하고 있었던 토토 머릿속에서 두 멜로디와 리듬이 뒤섞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건 십대 소녀들이고 불경을 외우는 것은 나이가 드신 스님이었다. 찬송가가 하늘까지 닿을 듯한 투명한 소리라면 불경은 인생을 통달한 듯한 힘이 넘치는 울림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토토는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에게 불려 앞으로 나왔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쿠로야나기 테츠코 양이에요."

전교생 앞에서 소개를 받은 토토는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께서 "쿠로야나기 양은 교실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걸 도와준 뒤 저기 있는 학생들과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가세요."라고 지시를 내리자 "저기 있는 학생들"이 토토를 향해 작게 손짓했다.

땋은 머리를 한 명석해 보이는 학생이 "수업을 하려면 교실 준비를 해야해. 여기는 목조건물이라 이 층에 한꺼번에 올라가면 무게 때문에 문틀이 내려앉아서 문이 끼워지지 않을 수 있어서 올라가기 전에 끼우지 않으면 안 돼. 쿠로야나기 양, 저 쪽 좀 잡아줄래?"라고 했다. 타타미가 몇십 장은 깔려 있는 방을 학년별로 나눠서 쓰는데 모두들 함께 척척 문을 끼워넣은 뒤 수업 준비를 마쳤다.

어느 샌가 불경은 들리지 않게 되었고 대신에 짹짹짹 새소리가 울려퍼졌다. 피아노에 찬송가, 목탁에 불경, 그리고 새소리. 어딘가에서 건물을 짓고 있는 건지 공사하는 소리도 들려왔고 전차가 달리는 소리도 들려 반갑게 느껴졌다.

토토가 토쿄에 돌아왔다!를 실감하게 되었다.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

 

영어 수업은 영국인 여성 교사가 "레이디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학생들은 벽장에서 자신들의 방석을 가져와 네 명당 한 개씩 쓰는 긴 책상 앞에 앉았다. 타타미 방이 꽉꽉 들어차 영어를 공부하는데 서당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재밌었다.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선생님은 긴 머리를 가운데에서 갈라 좌우로 세 갈래로 땋아 내리셨다.

타타미방의 맨 앞에 서서 무척 커다랗게 잘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레이디스, 굿모닝!"이라고 아침 인사를 하셨다. 영국 영어는 미국 영어와는 다르다는 자신감에 찬 발음이었다.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날카로운 리듬에 토토는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를 곧게 폈다.

"이거 엄청난데."

그런 토토의 생각은 신경쓰지도 않는 듯 영어 수업이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일본어를 전혀 쓰지 않고 "내 말을 암송하세요." 같은 말씀을 하셨다.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하기에 토토는 그 따라하기를 따라했다. 선생님의 복장은 하얀 블라우스에 트위드제 갈색 재킷과 롱스커트였다. 꽉 조이는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여서 척 보기에도 영국 숙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언가 말을 할 때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토토는 다소 기가 죽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 토토는 공부를 따라잡는 것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오모리에서 방언을 터득했을 때를 떠올리며 귀로 들은 것이 자신의 입이 익숙해지도록 하며 점점 영어의 리듬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그대로 암기할 뿐인 영어라 해도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즐겁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분명 선생님이 무척 활기가 넘쳐 "고개를 들고 인생을 의연하게 걸어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토토는 이것이 영국식인가 하고 생각했다.

구품불 건물에서는 겨울이 되어도 난방을 틀지 않았다. 산노헤 학교에선 교실에 장작 난로를 놓아서 따뜻했는데 전엔 스모 연습장이었던 토쿄 건물은 틈새로 바람이 불어들어와 무척 추웠다. 그래서 다들 오버코트를 입고 수업을 받았다.

영국 선생님은 양복 차림으로 다녔는데 토토의 흥미를 끈 건 양말 쪽이었다. 타타미방이니 양말을 곧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두꺼운 갈색 솜양말을 신으며 영국 방식을 고집했다. 반면 일본인 선생님들 중엔 당시로선 최첨단이었던 나일론 스타킹을 신은 멋쟁이 선생님도 있었다.

 

토토는 음악 중 <코르위붕겐> 수업을 좋아했다. 이건 합창곡 악보를 제대로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독일 교재로 고음과 저음으로 파트를 나누었는데 부르자마자 다른 파트에 휘말려버리는 아이도 있었지만 토토는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영어와 음악 수업에 유럽 방식을 도입한 것이 토모에 학원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종일 학생들이 일어섰다 앉았다, 책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나다 보니 타타미가 무척 빨리 상했다. 게다가 수업이 재미없을 때면 모두들 타타미를 뜯어서 시험 중이나 크리스트교, 대수학 수업 중엔 타타미 뜯기 대회가 열려 얼마나 타타미가 상했는가로 시험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토토는 당연히 상습범이었다. 토토 자리는 가장 앞이었으므로 선생님이 토토 눈 앞에 서 있으셨는데 타타미에서 뜯어낸 줄기를 긴 끈처럼 만들어서 선생님의 발목에 돌려 책상 다리와 연결하는 장난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그 상태에서 걸어가면 어떻게 될지 보고 싶었지만 끈이 너무나 약했기에 몇 번 시도를 해도 곧바로 끊어져 토토의 상상처럼 선생님이 고꾸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토모에 학원 때부터 시작된 수업 중 뭔가를 저지르고 싶어하는 토토의 버릇은 학생이 되고 나서도 고쳐지지 않았던 건가 싶어진다.

 

2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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