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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24. 22:26

피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신변 정리를 해야만 했다.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토에겐 소중한 것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아빠가 기원 2600년(메이지 정부가 일본 신화에 따라 기원전 660년을 건국연도로 정하면서 1940년이 2600년째에 해당한다) 축하공연 여행차 만주에 갔다왔을 때 주신 선물인 커다란 곰인형이었다. 아빠는 이 여행 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가 되었던 아이신 교로 푸이의 부탁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토토는 그 인형을 "쿠마 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하나는 좀 더 어릴 적에 미국에서 돌아온 숙부 님이 주신 얼룩곰 인형이었다. 공습경보 때도 가방에 담고서 방공호에 같이 데려가곤 했기 때문에 피난 때에도 같이 하고 싶었다. 쿠마 짱 쪽은 "짐이 너무 커지니 포기하렴."이라는 엄마의 한 마디에 두고 가는 걸로 결정되었지만 얼룩곰은 데려가기로 했다.

엄마가 가져가기로 한 건 가족 사진, 아빠 연주회 사진과 프로그램 등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었다. 짐이 꾸려지자 엄마는 응접 세트 소파의 고벨린제 천을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로코코풍 무늬가 무척 멋졌지만 엄마는 그걸로 짐을 싸서 보자기 대용으로 썼다. 소중한 물건들을 넣어서 빵빵하게 둥글어진 고벨린제 보자기는 마치 산타클로스의 주머니를 보는 것 같았다.

"기다리렴. 곧 돌아올 테니깐."

쿠마 짱을 아빠가 앉던 의자에 앉힌 뒤 토토네는 키타센조쿠 집을 떠났다.

 

토토, 피난하다.

 

혼자 타는 야간열차

 

덜커덩, 덜커덩.

토토는 어두컴컴한 밤을 달려나가는 아오모리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창 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2인석의 가운데에 앉아있었지만 토토의 양쪽에 있는 건 엄마도 노리아키 짱도 마리 짱도 아닌 생판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였다. 홀로 남아있는 토토의 오른쪽 손에는 엄마가 주신 열차 표와 "우에노, 후쿠시마, 센다이, 모리오카, 시리우치"라고 쓰여진 종이가 쥐여져 있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해의 3월 중순이었다.

그 날 아침 토토는 엄마와 노리아키 짱과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은 마리 짱과 함께 넷이서 우에노역으로 향했다. 우에노역은 사람들로 북적여 수많은 짐들을 끌어안은 어른들이 두두두하고 지진을 일으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앞다투어 개찰구로 향했다. 엄마는 등에 가방을 맸고 왼손으로 노리아키 짱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마리 짱을 아기띠로 안은 채 오른손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다. 토토가 노리아키 짱과 손을 잡으려 하자 "비켜!"라며 누군지 모를 아저씨가 밀쳐내서 넘어질 뻔 했다.

"우왓!"

토토가 소리를 지르자

"만약 어머니를 놓쳐도 일단 아오모리행 열차를 타렴. 그리고 나서 꼭 시리우치역에서 내려서 어머니하고 노리아키 짱하고 마리 짱을 찾아야 된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시면서 토토의 손에 "우에노, 후쿠시마, 센다이, 모리오카, 시리우치"라고 쓰여진 종이와 열차표를 쥐어주셨다.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시리우치"는 현재의 "하치노헤"에 해당한다.

개찰구에서 플랫폼을 향하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양 옆으로 밀고 밀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보는 아저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토토 얼굴을 향해 짐들이 날아와 아프고 숨쉬기도 힘들었으며 자신이 직접 걷는다기보다는 어른들의 짐에 끼어서 같이 운반되는 건가 싶을 정도여서 무척 무서웠다.

엄마가 점점 멀어져 갔다. 어떡한담. 열차가 보이자 어른들의 발은 더욱 빨라졌다.

"꺄악!"

토토는 플랫폼 반대편으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주저앉은 채로 열차 쪽을 바라보니 다른 사람을 밀치고서 열차에 타는 사람이나 짐을 창 안으로 던져넣는 사람들이 보였다.

엄마 쪽은 열차에 타신 것 같다.

어떡한담...

출발을 알리는 역무원 아저씨의 목소리가 플랫폼에 울려퍼졌을 때 열차 창문 너머로 엄마가 보였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시리우치역에서 기다릴게."

엄마의 입이 그렇게 움직인 것으로 보였다.

사람을 잔뜩 태운 열차가 뿌옹~하고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넘쳐났던 플랫폼이 순식간에 텅텅 비었다.

 

"다음 아오모리행 열차는 언제 오나요?"

토토는 분주히 움직이는 역무원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임시열차가 없으니 다음 차는 밤 여덞 시나 되어야 올 텐데, 꼬마 아가씨 혼자서 아오모리까지 가려고?"

"네, 아까 기차에 타지를 못해서 가족과 시리우치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토토가 그렇게 말하자 역무원 아저씨가 "힘들겠구나."라고 동정하면서 

"플랫폼에 들어올 시간이 되면 알려줄 테니 저 편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라고 말해주셨다.

토우호쿠본선 플랫폼은 피스톤 운동이라도 하듯 열차가 역에 도착하면 승객을 내린 뒤 바로 그 열차에 사람들을 태우고서 출발했다. 토토가 플랫폼 구석에서 아오모리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우츠노미야행"과 "시라카와행"이 출발했으며 그 때마다 플랫폼은 시장통이 되었다가 다시 텅 비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이에 완전히 어두워졌다.

"슬슬 저기에서 줄을 서는 게 좋겠구나. 조심해 가거라."

아까 봤던 역무원 아저씨가 가르쳐 주신대로 플랫폼 승차구 맨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두두두두 발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대거 몰려왔다. "아, 또 이러네."라는 생각에 몸을 움츠리자 여자가 "밀려나지 않도록 똑바로 서있어야 한다."라고 말해주었다. 올려다 보니 사과 같은 붉은 뺨을 가진 아주머니가 웃고 있으셨다.

아오모리행 열차의 문이 열리자 토토는 "이얍"하고 열차에 뛰어들었다. 뒤에서 사람들이 점점 들어오고 있었다. 통로 구석으로 밀려나 짜부라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으려니 아까 본 사과 뺨 아주머니가 토토의 손을 홱 낚아채서 2인석 가운데에 앉히셨다. 

"꼬마 아가씨는 말랐으니깐 여기에 앉을 수 있겠지?"

토토의 몸이 아주머니 팔에 안겨 좌석의 가운데에 쏙하고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자 네 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박스석에 어른이 여섯 명이나 앉아있었다. 좌석 사이에도 두 세 명씩 앉아있었고 통로도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토토는 운 좋게 좌석에 앉을 수 있었지만 자리며 바닥이며 순식간에 사람들로 메워진 것이다.

부옹~

증기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며 끼익끼익 기계가 마찰되는 소리가 나자 우에노발 아오모리행 완행열차가 북쪽을 향해 새까만 밤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시리우치에는 내일 점심 너머에야 도착한다고 했는데 엄마 쪽하고 만날 수 있으려나? 토토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불안함을 같이 실은 것 때문에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열차가 스피드를 천천히 냈다.

 

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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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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