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2024. 7. 23. 22:23

아빠의 출정

 

아빠가 전쟁터로 가게 된 그날 밤에 어린 마리 짱과 노리아키 짱을 이웃집에 맡기고서 토토와 엄마는 시나가와역으로 향했다. 밤이 된 시나가와역에선 등화관제가 이루어져 컴컴했다. 토토네와 비슷하게 온 가족이 스무 집단 정도 모였다. "여기에서 배웅해주십시오."라고 들었던 야마노테선 플랫폼에서 아빠가 있을 먼 플랫폼을 바라보니 어렴풋한 빛 속에서 군인 아저씨들이 야간열차에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먼데다가 어둡기까지 하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빠는 분명 일장기 부채를 흔들어 줄 것이다. "아버지~"라고 될 수 있는 한 큰 소리를 내어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군인 아저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른 가족들도 똑같이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열차에 탄 군인 아저씨들이 일제히 일장기 부채를 펼쳐 이 쪽을 향해 흔들었다. 모두가 가지고 있던 일장기 부채를 표식으로 삼은 건 아빠와 엄마의 실수였다.

어쩌면 평생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토토는 어느 사람이 아빠인가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토토네의 모습을 잘 봐두었으면 했다.

토토와 엄마는 눈에 불을 켜고 아빠를 찾았지만 이 사람인가 하고 손을 흔들어보면 그 사람도 여기를 향해 흔드는 것처럼 보이고 저 사람인가 하고 손을 흔들어보면 그 사람도 이 쪽을 향해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저기 있는 게 아버지 아냐?" 같은 말을 하며 필사적으로 찾았다. 마침내 혼자서 독특한 리듬을 타고 부채를 흔드는 사람을 찾아내 토토와 엄마는 "저 사람이 아빠일 거야."라고 결정했다. 토토네가 손을 흔들자 그 부채만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열차가 조금씩 달리기 시작하자 거기에 맞춰 토토와 엄마도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면서도 플랫폼의 가장 끝부분까지 달려가며 아빠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야간열차는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져갔다.

 

"분명 그 사람이 아버지였을 거야."

토토와 엄마는 그런 말을 하며 플랫폼보다 훨씬 어두운 시나가와역 지하통로를 걸어갔다. 저벅저벅 소리가 들려와 토토네는 가까이에서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군인 아저씨들에게 길을 비켜주려고 한 순간 토토가 통로 측면에 파여져 있던 도랑에 빠져버렸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무릎까지 푹 젖어버린 토토의 옆을 저벅저벅 군인 아저씨들이 지나갔다.

"어머니!"

토토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저벅저벅 발소리를 높여 행진하던 군인 아저씨들의 대열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테츠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어보니 놀랍게도 거기에 아빠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아빠가 속한 부대는 지금부터 열차에 타려고 했던 것이다.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심코 아빠의 손을 잡아보니 거기엔 틀림없이 토토가 제일 좋아하는 뼈가 두텁고 손가락이 긴 커다랗고 커다란 아빠의 손이었다.

"어머니, 여기에 아버지가 있어요!"

토토는 소리 높여 엄마를 불렀다.

서둘러 달려온 엄마가 아빠가 거기에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면서 기뻐하셨다. 하지만 한두 마디를 나누었을 뿐 아빠는 서둘러 대열에 복귀해 걸어가셨다.토토네는 다시 한번 더 아빠를 배웅하기 위해 야마노테선 플랫폼으로 돌아갔다.

역시나 플랫폼은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엄마는 말했다.

"괜찮아. 다른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도록 부채를 지휘봉처럼 흔들어 달라고 아빠에게 말했으니깐."

엄마 말대로 일제히 일장기 부채를 흔드는 군인 아저씨들 가운데 한 명만이 지휘봉처럼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토토와 엄마는 저 사람이 틀림없이 아빠라 믿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진정한 작별인사를 했다.

혹시 토토가 도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머니!"라고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아예 토토가 도랑에 빠진 순간과 아빠 부대가 토토 옆을 지나는 순간이 몇 초라도 어긋났다면 토토와 엄마는 다른 군인 아저씨를 아빠라고 생각한 채 집에 돌아갈 뻔 했다. 아빠는 아빠대로 토토네가 진작에 떠나간 플랫폼을 향해 분명 가족이 거기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부채를 흔들며 출정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구멍이 뚫린 곳이나 공사중인 곳, 위험한 곳을 일부러 골라서 걷는 토토의 보행법은 어른들에게 항상 주의를 들어왔지만 이 밤만큼은 그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시나가와역에서 아빠와 재회할 수 있었던 건 신이 계획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빠가 그 때 언제나처럼 "토토스케"가 아니라 "테츠코"라고 불렀던 건 주변 사람들에게 창피하다 여겼기 때문일까? 전쟁터로 향한 아빠에게서 편지가 딱 한 통 왔었는데 "군사우편"이란 글자가 붉게 찍혀있는 엽서에 "다들 잘 지내나요?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 조심하며 힘내세요."라는 특별한 문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을 뿐이었다. 검열을 당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거였겠지만.

그 후 아빠의 소식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토쿄대공습

 

정원에 있었던 온실 가운데에 깊은 구멍을 파서 방공호로 쓰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직접 판 구멍이라 그렇게 크게 팔 수는 없었지만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가족이 모두 거기에 들어가 숨을 죽였다. 토쿄 공습은 아빠가 출정한 뒤 갑자기 심해지면서 매일같이 토쿄 어딘가가 B-29의 공습을 받게 되었다.

그날 밤도 사이렌이 울려서 언제나처럼 방공호에 피난해 있었다. 0시가 지났을 무렵인 늦은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매일 밤 방공호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수면부족 상태가 이어져 얼른 경보해제 사이렌이 울렸으면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만은 상황이 좀 달랐다.

바깥이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방공호 틈새로 올려다 보니 붉게 물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이 붉어지는 현상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봤지만 소이탄이 떨어져 화재를 일으키며 만들어낸 그날 밤 하늘은 무서울 정도로 새빨갰다.

너무나 밝아서 토토가 방공호를 뛰쳐나와 집에 들어가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 정원 가운데에서 펼쳐보니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밤인데도 그 정도로 밝았으니 집에서 가까운 곳에 대화재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토토는 방공호로 들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큰일 났어요.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바깥이 밝아요. 분명 오오오카야마 쪽에서 불이 난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바깥으로 나와본 엄마가 더욱 붉어진 하늘 한편을 응시하며 "괜찮아."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밤에 일어나는 불은 가까운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훨씬 먼 곳에서 일어나는 거란다. 그러니 괜찮아."

엄마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으셨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서 토토는 조금 안심하게 되었다.

그날 밤엔 추위와 배고픔을 잠시도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피로감에 절어있던 다음날 아침에 토나리구미(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있었던 지역조직) 사람이 왔다.

"한 집에서 남자 한 명씩 삽을 가지고 모여주세요."

"남편이 출정을 가서 어른 남자가 없어요."

"그럼 삽만이라도 빌려주실 수 있나요?"

"그건 괜찮긴 한데 무슨 일 있나요?"

"어제 공습 때문에 시타마치가 꽤나 타버렸다네요. 사람들도 많이 죽어서 지금부터 다함께 유골을 정리해 드릴까 해요."

1945년 3월 10일, 악몽과 같은 하룻밤이 지나갔다. 삼백 기에 가까운 B-29가 후카가와나 혼죠 같은 곳을 중심으로 소이탄을 비처럼 쏟아부어 하룻밤만에 십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다.

토쿄대공습.

전날 밤에 하늘이 붉게 물든 것이 그 때문이란 걸 알았다.

그 새빨갛게 타오른 하늘이 지금도 머릿속 깊숙한 곳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토토네 집이 있던 키타센조쿠에서 시타마치로 가려면 지금도 전철로 한 시간은 가야 한다. 그렇게 멀리에서 일어난 화재인데도 정원에서 책을 읽을 정도로 밝아지려면 얼마나 극심한 공습이 이루어졌던 걸까?

미국 쪽에서 나무와 종이로 만들어진 일본 가옥을 공격하려면 건물을 폭발시켜 파괴하는 폭탄보다 불을 붙여 태워버리는 소이탄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밝혀졌다. B-29가 떨군 소이탄은 여러 개로 분산되어 불이 붙은 채 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엄마는 이 이상 토쿄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최종판단을 내렸다.

"이제 여긴 위험해. 될 수 있는 한 빨리 피난하자. 사과와 채소를 보내주신 누마하타 아저씨네로 가보자."

 

1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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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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