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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잡담 2025. 2. 9. 10:31

37

아무리 정교한 지식을 쌓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논리에 기초한 의견을 펼친다 한들 유튜브에서 선동하는 사람의 영향력이 더 크다. 오죽하면 대통령에 오른 사람이 유튜브 보고서 계엄까지 일으켜서 선관위를 뒤지려다가 탄핵을 당했을까. 신문에서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한계가 있는 반면 유튜브와 댓글 선동에는 한계가 없다. 박근혜 탄핵 때와 윤석열 탄핵의 양상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신문의 영향력은 더 작아지고 유튜브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은 정교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돈보다 훨씬 큰 돈을 선동에 쏟고 있다. 아무리 봐도 효율적이지 못한 행동을 국회의원 지방의원 공무원 같은 사람들만 보면 효율적이지 못한 일만 한다고 다 잘라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게 이젠 신기하지도 않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이 스피커를 빵빵하게 틀고 있는 동안 옆에서 경을 읊고 있어봤자 들리지도 않는데 그 경을 익힐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이젠 그런 지식을 배우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알아서 다 해준다는 흐름까지 생겨났다. 인공지능에 있는 지식들은 상당수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고 조금만 파고 들어가도 틀린 답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상당수지만 그런 툴이 편하기에 사람들은 시험기간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는다며 영상을 올리는 데에 시간을 낭비할 정도로 빠져들었고 거기에 따라 관련 주식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었다. 책을 읽으면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해봤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책에서 읽은 지식은 이미 다 인공지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런 지식을 책을 통해 힘들게 익혀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흐름들은 결국 뭐가 돈이 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인 결과이다. 이런 자본주의에 반발해 나온 사상들이 있긴 했지만 그 사상들도 돈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거나 투명해져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오랜 고찰 끝에 나온 것이라 한들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뭔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 아닐까. 하긴 요즘 들어 생각도 잘 나지 않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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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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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29. 11:13

후기

 

이렇게 쓰고 보니 인생은 재밌는 것이구나 싶어진다. 자기 아이에게 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많은 아동 대상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자기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유니세프 친선대사에 임명되어 전세계에 있는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전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양친이 없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안았을 때 혼자서 죽는 것보다는 나라도 안아주고 있는 편이 마음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선 뉴스 방송에서 사회자를 맡으면서 TV 드라마에 나오기도 했는데 술주정뱅이 역을 연기하고 있으려니 스태프 중 "정말 술 마신 거예요?"라고 물어본 사람도 있었지만 술을 마실 리가 있나. 하지만 자주 보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혹시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거나 하게 되면 나쁜 년이 뉴스 방송 사회 같은 걸 보고 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져 TV 드라마를 관두고 연극 무대에 집중하게 되었다.

 

"난, 백 살까지 살거야!"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으려니 오자와 쇼우이치 씨가 "그거 좋긴 한데 백 살이 되어서 "있잖아 그 때 말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누가 받아줄 사람이나 있겠어? 외로울 걸."이라고 하기에 우왕하고 울었었는데 이젠 그게 현실로 다가왔다.

오빠라 불렀던 아츠키 키요시 씨도 어머니라 불렀던 사와무라 사다코 씨도 돌아가셨다. 함께 노인 시설에 들어가자고 약속했던 야마오카 히사노 언니도 이케우치 쥰코 씨도 먼저 떠나버렸다. 에이 로쿠스케 씨가 "안 됐구먼. 예능계 가족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으니."라고 말해주셨지만 그 에이 씨도 떠나버리셨다.

오빠의 상태가 상당히 나빠졌던 걸 모르고 "같이 밥 먹어요."라며 전화를 했던 적이 있다. 아츠미 씨 전화에 부재중 메시지를 몇 번이고 넣어본 결과 드디어 만나게 되어선 "뭐야, 전화를 하면 받아 좀 달라고! 애인하고 온천 여행이라도 갔던 거야?"라며 내가 평소처럼 말하자 아츠미 씨는 크게 웃으며 모자를 벗고 머리에 난 땀을 손수건으로 닦은 뒤 다시금 크게 웃었다.

"어디도 안 갔어요, 아가씨."

"거짓말쟁이. 오빠는 너무 비밀주의자라고!"

그런 말을 주고 받으며 오빠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나중에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건데 그 즈음 병세가 상당히 악화되어 집에선 누워있는 모습 외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난 경솔한 말만 꺼냈을 뿐이니 이렇게 생각이 없을 수 있나 싶지만 평소와 다름이 없어 기뻤던 건지 땀을 닦으며 웃기만 하던 아츠미 씨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와무라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엔 매일처럼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러던 와중 야마다 요우지 씨가 전화를 걸어와 "아츠미 씨가 돌아가셨다는군요. 장례식도 마쳤고 이제야 매스컴 쪽에 발표를 한다네요. 매스컴을 통해서 아시기 전엔 알려드리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라고 알려주셨다. 야마다 씨의 친절한 태도는 기뻤지만 오빠의 죽음이 너무 슬펐다.

최근 들어서 친구였던 노기와 요우코 씨가 죽었던 것이 충격적이었다. NHK 동창생이며 아나운서와 극단원끼리 정말 사이가 좋아 옷가게에도 함께 가고 프랑스어를 같이 배우기도 했다. 툭하면 팩스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노기와 씨는 코이시카와 덴즈우인 근처에 살고 있어서 팩스 마지막에 "덴즈우인에서"라고 쓰고 나는 "노기자카에서"라고 썼다. 최근 딸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손이 노기와 씨와 쏙 닮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테츠코의 방>은 올해로 사십팔 년차를 맞이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퇴학당했던 내가 한 방송을 사십팔 년이나 할 수 있다니 정말 감사한 일로 그 <테츠코의 방>에서 배우 분들에게 세계대전 당시의 일을 빠짐없이 들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지금 들어보지 않으면 세계대전 동안 배우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잊혀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케베 료우 씨는 영화 스타가 되기 전에 육군 소위로서 샹하이에서 남부 지역으로 가는 운송선을 타고 이동하던 중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다. 배가 격침당해 태평양 한가운데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꽤 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헤엄을 치고 있던 와중 부하 한 명이 파도를 헤치고 와선 "소위 님, 칼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군도를 보여줬다. 이케베 씨는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몸이 그것 때문에 가라앉을까봐 갑판에 버리고 왔던 건데 그걸 보고 눈물이 났죠."라며 "바다를 헤엄치는 와중이라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만."이라고 덧붙였다.

미나미 하루오 씨는 종전 직전 마주에서 체험한 소련군과의 전투를 이야기하셨다. 토치카 안에서 쏜 총알이 젊은 소련 병사에게 맞았는데 밤이 되자 토치카 안에서 조용히 머물고 있던 중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련 병사의 "마마, 마마"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결국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하는 미나미 씨의 말엔 설득력이 있었다.

아와야 노리코 씨는 위문공연차 항공대 기지에 갔었는데 노래를 하기 전에 상관이 "여기서 듣는 사람들 모두 특공대원이니 도중에 자리를 뜨거나 하는 실례가 있어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와야 씨가 블루스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들떠서 듣고 있었지만 그러던 와중에 한 젊은 병사가 자리를 뜨면서 아와야 씨에게 경례를 하고 나갔다. "싱긋 웃으면서 저에게 경례를 하고 나가더군요. 눈물이 흘러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해주던 아와야 씨를 잊을 수 없다.

(이 때 일본군에서 특공대는 자폭공격에 이용되는 병사들을 뜻했다 -역자 주)

2022년 마지막 방송 초대손님은 언제나처럼 타모리 씨였다. "내년은 어떤 한 해가 되려나요?"라는 내 질문에 "글쎄요, (일본이)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지만 그런 타모리 씨의 예상이 앞으로도 빗나가길 빌 뿐이다.

<테츠코의 방>이 보내온 사십팔 년간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물어온 사십팔 년간이기도 했다. 내가 체험한 전쟁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게 <속 창가의 토토>를 쓰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는 것도 이 후기에 써놓고 싶다.

최근 들어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등록되었다는 통지가 와 감사하게 생각했다. 문화공로자로도 뽑혔고 훈삼등 서보장까지 받았다. <테츠코의 방>은 이제 이 년만 더하면 오십 주년이 된다. 이전부터 곧잘 "오십 년 해보는 게 목표"라고 말했는데 최근 들어선 백 세까지 계속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까지 머리도 멀쩡히 있을 수 있다면 어머니가 되지는 못했어도 뭐 이 정도면 되었나? 하고 납득할 수 있을지도.

그 때가 되면 튼튼한 몸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빠와 엄마께 감사인사를 하고 있겠지.

나를 이해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거야.

이거 정말 기대되네!

 

2023년 8월 쿠로야나기 테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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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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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28. 14:17

아쉬운 걸 하나 꼽자면 NHK 아침 연속 TV소설 <외톨이 마유코>(1971년 4월~1972년 4월)를 도중에 하차하게 된 것이었다. NHK에는 그 해 10월부터 연기 공부를 위해 뉴욕에 갈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아침 드라마는 요즘과 달리 일 년을 잡고 방송했기에 절반만 출연하고 관두기로 약속을 했다.

양친 없이 커온 주인공 마유코가 고향인 아오모리에서 상경하여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를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로 마유코가 하숙을 하는 집의 가정부를 맡고 있는 타구치 케이가 토토의 배역이었다. 케이 아주머니는 "선원이었던 남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초등학교 오 학년생인 아들과 늙은 어머니를 돌봐오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급료를 받기 위해 상경해서 가정부가 된 중년여성"이란 인물설정을 가졌는데 케이 아주머니가 아오모리현 하치노헤 출신으로 되어있다는 걸 듣고서 깜짝 놀란 동시에 의욕이 가득찼다.

피난차 머물렀던 아오모리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 같은 건 괜찮았지만 지금까지 TV에서 연기해온 배역들은 도시를 누비는 아가씨 같은 캐릭터가 많았기 때문에 케이 아주머니의 캐릭터에 맞출 수 있도록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우선 처음으로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를 익혀보고자 했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라기보단 생활이 바빠 "신경을 쓸 수 없다"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몸가짐에 대해 우둔한 표현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머리모양이 우선일 것이니 NHK의 토코야마 씨에게 짧은 머리에 파마롤을 꽂고선 대충 감은 듯한 가발을 부탁드렸다. 이마가 극단적으로 좁아보이도록 가발을 깊게 쓰고서 우유병 밑바닥 같은 도수 강한 안경을 걸치고 보라색에 가까운 빨간 볼터치에 챙모자를 눌러쓰니 얼굴 쪽 이미지가 거의 잡혔다.

얼굴 다음엔 옷차림.다소 구세대적인 느낌이 나는 옷을 찾아서 솜을 넣어 몸집을 키우자 그야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 외견이 완성되었다. 허리 쪽을 집어보자 토쿄 전화번호부 정도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두꺼워져 있었다. 거울 앞에 서자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토토라고 알아보기 힘들어져 있었다.

처음 녹화하는 날에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마친 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에 이 차림 그대로 NHK 식당에 가보니 마침 <외톨이 마유코> 감독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앉자 감독님은 흘끔 토토를 보더니 "네."하고 적당히 대답을 한 후 바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기 료우타로우 씨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기 씨도 <외톨이 마유코>의 출연자였다.

"저기요."

토토가 한번 더 말을 걸었지만 감독님은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토토라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나.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저, 쿠로야나기인데요."

라고 큰소리로 말해보았다. 그러자 감독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토토 얼굴을 보고선

"정말이네!"

비둘기가 콩알탄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런 표정을 지으며 "전혀 몰랐어요."라고 말해주었다.

녹화 시작 후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이 개월 동안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토토가 케이 아주머니 모습을 하고 NHK 안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다들 아직 토토가 이런 분장을 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가는 곳마다 "잘못 들어온 아주머니" 취급을 받았다. 복도에서 인사를 해도 무시를 당하고 식당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평소 활짝 웃으며 받아주는 웨이터 분도 묵묵히 짤그랑 소리를 내며 두고갈 뿐. 화장실에서 줄을 서도 나중에 온 젊은 여자가 차례를 무시하고 새치기를 해버렸다. 동작이 느리고 요령이 없는 아주머니가 있으면 추월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인 듯하다.

토토는 무척 슬퍼졌다. 배역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애를 경험해 보는 건 곧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강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외톨이 마유코>는 대호평을 받았다. 4월에 방송이 시작되면서 "쿠로야나기 씨는 어떤 장면에 나왔던 거예요?"라는 질문이 NHK에 쇄도했다고 한다. 변신의 효과가 대단했다! 뉴욕 유학을 위해 타구치 케이 출연은 반 년 뿐이라고 약속했지만 NHK 측에선 마지막까지 나와줬으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다음 해에도 일본에 있게 되고 일본에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게 뻔했으니 정한대로 10월까지만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토토는 출국하기 전 아슬아슬한 날짜까지 출연을 이어갔고 "타구치 케이는 뉴욕에 있는 집의 가정부를 하러 미국에 갔다."는 결말이 맺어졌다.

뉴욕 유학을 가겠다고 엄마에게 밝혔더니 커다란 눈을 빛내며 "그거 좋네. 네 나이에 안 가면 언제 가보겠니?"라며 격려해 주셨다. 롯폰기 케이크집 언니가 "테츠코 씨를 TV에서 볼 수 없다니 너무 슬프네요."라고 말해 주어서 토토는 십팔 년 간 해온 것이 헛수고 같은 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NHK 식당에서 토토를 몰라봤던 감독님도 "테츠코 씨가 해볼만 한 거라고 생각해요. 재밌는 걸 가지고 돌아오실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라며 흔쾌히 배웅해 주었다.

 

1971년 10월, 출발하는 날.

"조심하렴."

아빠가 현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다소 쓸쓸해 하셨던 것 같다.

"여유 갖고 해."

동생인 마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토토는 그 때까지의 십팔 년간 줄곧 아침에 일어나면 그 날의 스케줄을 분 단위로 정해놓고 이에 따라 보냈다. "오늘은 무얼 할까?" 같은 걸 생각을 하며 아침을 맞이했던 적은 하루도 없었다. 일과도 동료와도 무척 많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다소 지쳐있었기도 했다. 마음 한편에서 전혀 다른 무언가를 흡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창조적이면서 항상 자극이 끊이지 않는 직업인데도 어째 반복이 이어지고 참신함을 찾기 힘든 매일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기차가 쭈욱 달려왔던 레일에서 조금 벗어나 차량기지로 복귀하는 선로로 들어가는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생각했다. 복귀 선로에서 가만히 멈춰있는 기차를 레일을 달리는 기차 쪽에서 보면 뒤쳐져 홀로 남겨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솔직히 쓸쓸하다거나 불안하다거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서둘러 달려갈 때엔 보이지 않았던 경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네다 공항에선 요시다 씨가 배웅하러 와주었다. 짐을 맡긴 뒤 탑승하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서 토토와 요시다 씨는 공항 라운지에서 차를 마셨다.

"야마오카 히사노 씨에게 "유학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더니 "잘 다녀와요. 모두들 가고 싶어도 가족이다 뭐다 해서 가지를 못하는데 당신이라도 내가 못 가는 걸 대신해서 가줘요."라고 말하셨어요. 사와무라 어머니는 "갔다오렴, 갖다와. 그래도 이 년이라니 좀 기네."라고 하셨고." (사와무라 사다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가 예능계의 어머니라 칭했던 배우 - 역자 주)

요시다 씨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줘서 토토는 기뻤다.

"사실,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더 자유로워져서 잔뜩 흡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런 억지를 들어줘서 요시다 씨에게 정말 감사할 뿐이에요."

요시다 씨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었다.

비행기로 들어가는 동안 앞사람도 뒷사람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덱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팔을 커다랗게 휘두르며 배웅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별은 쓸쓸하다. 하지만 새로이 도착한 행선지에 마음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토토 가슴 속에 잊고 있었던 노래가 들려왔다.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출발하는 건 기뻐

안녕 잘 있어 잔뜩 말하며

힘차게 씩씩하게 출발하자

 

<얀보 닌보 톤보>에서 새끼 원숭이 세 마리가 모험을 하나 끝내고 나서 다음 여행을 하러 떠날 때 토토와 주역 성우들 셋이서 스튜디오에서 불렀던 <출발의 노래>였다.

 

3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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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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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27. 17:28

분가쿠자에 다니며

 

현장에 임하면 임할수록 토토의 마음은 불안해져 갔다.

많은 방송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본격적인 배우수업을 해보지는 못했다는 것이 컴플렉스처럼 느껴졌다. NHK에 합격했을 때도 양성소를 다니던 때에도 배우가 되고 싶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배우라는 직업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빠와 사이가 좋아져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토토로서도 어딘가에서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토토에게서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가씨 같은 연기를 하고 있으니 우선 이걸 어떻게 해봐야겠다 생각했다. NHK 같은 커다란 조직에 속해 있으면 잘 안 된다 싶어도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지만 독립해 있는 배우가 해봐서 잘 안 될 경우 "아,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엄격한 정도가 확 바뀌는 것이다.

"컴플렉스를 극복해서 배우로서의 무기를 습득하고 싶어."

토토 안에서 이런 생각이 강해졌다.

NHK 양성소 시절에 분가쿠자의 무대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눈 앞에서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무대란 재밌는 거구나." 같은 감상문을 썼던 게 떠올라 분가쿠자의 연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이자와 선생님이 각본과 연출을 맡으신 <2호>라는 작품이었다.

분가쿠자에서 간판 중에서도 간판으로 꼽히는 스기무라 하루코 선생님의 연기를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무대경험이 풍부한 배우 분이 엄청난 연기 실력을 뽐내시는 모습은 TV 스튜디오에서도 보긴 했지만 무대에선 배우 분이 전신으로 연기하게 되는 만큼 TV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어딘가 극단에 들어가 확실히 공부를 한다면 연기를 더욱 잘하게 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토토는 스기무라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청했다.

 

"저, 분가쿠자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토토가 말을 꺼내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꼭 와주세요. 제가 한 마디만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스기무라 선생님은 여배우들을 엄하게 대하기로 유명한 분이셨는데도 토토에겐 이리 상냥하게 대해주신 건 스기무라 선생님이 아직 토토를 배우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거란 걸 알아차렸지만 토토는 '선생님이 서양 쪽 연극의 번역 버전을 나에게 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하며 큰 배를 탔다 생각하며 내부회의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스기무라 선생님이 전해오신 건 기대와 다소 다른 내용이었다.

"극단 이사회에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를 분가쿠자에 넣어달라 추천했는데 반대 의견을 비추신 분이 한 분 있었어요. 당신이 들어가면 분가쿠자의 분위기가 엉망이 될 거라네요. 하지만 마침 분가쿠자의 연극연구소가 만들어진 참이니 테츠코 씨가 거기에 들어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토토는 NHK 일을 하는 틈틈이 시간을 짜내서 시나노마치에 있는 분가쿠자 부속 연극연구소에 다니게 되었다. 에모리 토오루 씨와 동급생이었는데 에모리 씨는 당시 아직 열여덞 살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 1월에 분가쿠자 배우 대부분이 탈퇴하게 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퇴단한 사람들 대부분이 셰익스피어 희극을 번역해서 유명해진 후쿠다 츠네아리 씨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게키단쿠모"로 옮겨갔다.

배우가 부족해진 것 때문인지 연출가인 이누이 이치로우 씨가 "연극연구소가 아니라 분가쿠자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요청을 해오셨는데 그 때 함께 연기하고 싶다 생각했던 배우 분들이 죄다 새로운 극단으로 가버린 데다가 <꿈 속에서 만나요>나 <젊은 계절> 등 재미있다 생각했던 일을 잔뜩 안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토토는 "좀더 시간이 지나서 어딘가 극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분가쿠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이누이 씨에게 답했다. 그렇게 해서 토토는 연구생인 채로 연기 공부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당시 어느 금요일 스케줄을 떠올려 보니 이런 식이었다.

10시 반~14시 시나노마치 분가쿠자 부속 연극연구소
14시~16시  아오야마 국제 라디오 센터에서 <부 후 우> 녹음
19시~21시 타무라쵸 NHK 본관에서 <젊은 계절> 연습
20시~ 22시 동시에 진행된 <마법융단> 연습장에 달려가 참가
22시~다음날 2시 히비야공원 안 NHK 스튜디오에서 <꿈 속에서 만나요> 연습

 

여전히 "죽을 거예요"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죽지 않고 견뎌낸 것은 하나같이 내가 좋아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가쿠자에 다니기 시작했던 해부터 NHK 외의 일도 받기 시작했다.

처음 맡은 건 광고로 NHK 소속인데 광고에 출연해도 괜찮은 걸까 생각이 들어 예능국장님께 허가를 받으러 갔다.

"TV 광고를 하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무언가 서류를 바라보던 국장님이 황급히 고개를 들더니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토토를 바라보았다.

"엽전 받는 건가?"

NHK의 높은 분들은 어째서인지 돈을 "엽전"이라고 불렀다. 토토가 "받겠죠."라고 답하자

"뭐, 해봐. 그걸로 흥미를 가진 시청자들이 있으면 NHK 방송 봐줄지도 모르고."

의외로 간단히 OK를 받아서 토토는 CM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TBS 스튜디오라고 기억한다. 모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각본가인 무코우다 쿠니코 씨와 만나게 되었다. 다음회에 쓸 각본이 늦어져 스튜디오 건너편에서 쓰고 있는 걸 보며 딱 부러진 맛이 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며 바라봤던 게 무코우다 씨였다. 무코우다 씨는 TBS의 라디오 드라마 <모리시게의 중역독본>의 각본을 쓰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참이었다.

토쿄 올림픽이 끝났을 무렵 배우인 카토우 하루코 씨가 "놀러가지 않을래?"라고 하기에 무코우다 쿠니코 씨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하루코 씨는 무코우다 씨가 쓴 작품에 다수 출연하고 있었다.

무코우다 씨는 "카스미쵸우 맨션"에 살고 있었는데 카스미쵸우는 현재의 니시아자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목조 모르타르로 지어진 3층 건물 중 2층 "B-2"가 무코우다 씨 집이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책상 옆에 소파가 있어 샴고양이가 앉아있었으며 배가 고프면 부엌에 서서 냉장고에 남아있는 걸 착착 요리로 만들어냈다. 그런 무코우다 씨의 생활상은 아직 양친의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토토에겐 무척 자유롭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졌다.

토토는 무코우다 씨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당시 세타야에서 가족과 살고 있던 토토로선 시부야에 있는 NHK, 아카사카에 있는 TBS, 롯폰기에 있는 NET(현재의 테레비 아사히)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간이 생기면 찾아가기 쉬운 곳이었으며 무코우다 씨와 함께 있으면 왠지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 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토가 뒹굴거리며 대본을 읽고 있으면 무코우다 씨는 쓱쓱 원고를 써내려갔다. 무코우다 씨는 원고를 늦게 제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너무 빨리 주면 배우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니깐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생각을 한 다음 단번에 써내려가는 게 최선이야."라고 변명을 하곤 했다. 카스미쵸우는 당시에도 멋들어진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는데 "여자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지지."는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토토는 무코우다 씨의 존재에 의존했다. 항상 무코우다 씨가 곁에 있었기에 그런 바쁜 나날들을 달려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코우다 씨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뜬 후에야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토토가 무코우다 씨 집을 드나들게 된 시기는 카메라맨이었던 애인이 죽은 직후였다고 한다. 처음 갔을 때 어째서 "언제든 와도 좋아요."라는 말을 들었는가 의문이 들었었는데 토토가 하는 쓰잘데기 없는 수다가 무코우다 씨가 안고 있던 슬픔을 씻어준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양쪽 다 애인 이야기 같은 건 한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출발의 노래

 

토토는 NHK 전속 배우를 관두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계절> 때부터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왔던 모리 미츠코 씨에게 "누군가 좋은 매니저 좀 소개시켜 줄 수 없나요?"라고 상담하자 모리 씨가 "그럼 우리 사무소로 와요."라고 권유하셔서 모리 씨가 소속된 요시다 나오미 사무소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일은 순조로웠다.

무대 일이 많아지면서 1970년 테이코쿠극장 정월공연 <스칼렛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연출과 안무를 브로드웨이에서 <노 스트링스> 등 대인기 뮤지컬을 담당했던 조 레이튼 씨가 맡았다. 조 씨의 아내는 에블린 씨로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는 배우였지만 남편의 일을 돕는 편이 좋다며 배우 일에서 은퇴를 했다. 조 씨는 에블린 씨를 매우 신뢰해서 에블린 씨의 의견이 쇼 연출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정도였다.

에블린 씨가 연습장에서 조 씨와 함께 있을 때엔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한 마디도 않고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연습이 끝나면 근처 가게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 날 본 불만점들을 조 씨에게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조 씨는 그 말을 전부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다음날 연습 때 적용한다. 에블린 씨는 집에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조 씨가 에블린 씨에게 반발을 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부부도 있을 수 있구나하고 토토는 감동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토토는 에블린 씨와 사이가 좋아진 후 어느 날 토토가 에블린 씨에게 "일을 당분간 쉴까 해요."라고 그 때까지 일본에서 일을 하며 느낀 불안점이나 컴플렉스를 토로했다. 그러자 에블린 씨는 곧바로 이렇게 답했다.

"그럼 뉴욕에서 연극학교를 다녀봐요. 뭐니뭐니 해도 메리 타사이 연극학교가 가장 좋죠. 브로드웨이에서 메리보다 뛰어난 선생님은 찾아볼 수 없을 걸요? 프로 배우만 가르쳐 줄 정도니깐요."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외국에서 연극을 배운다는 발상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에블린 씨도 바쁠 테고 공연이 끝나서 뉴욕에 돌아가면 이 정도 이야기는 금방 잊어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블린 씨가 추천했던 메리 타사이 선생님이 하늘색 국제우편을 보내오셨다.

"친애하는 테츠코 씨에게.

저는 아직 동양인 배우를 가르쳐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에블린 씨가 당신이 재능 있는 배우이며 뉴욕에서 연기를 배워보고 싶어했다고 하시기에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쯤 여기로 오실 수 있을지요? 제가 가르치는 교실은 가을부터 다음해 여름에 접어들 때까지로 기간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메리 타사이"

 

이 국제우편이 토토의 등을 밀어주었다. 편지를 받은 뒤 며칠 후에 토토는 마음을 먹고 매니저인 요시다 씨에게 "한두 해 정도 일을 쉬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다.

일만 놓고 본다면 "지금이 최전성기인데 어째서?"라고 생각할 만한 시기였다. "돌아왔을 때 맡을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리면 어쩌려고요?"라며 걱정해 주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토토가 한두 해 일본에서 떠나있는 정도로 잊혀질 존재였다면 자신의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라며 인정하고 포기하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요시다 씨가 "마음 먹은대로 쉬어 주세요!"라고 말해준 것이 정말 든든하게 느껴졌다. 요시다 씨는 몇 개월치는 더 예정되어 있었던 토토의 일을 정리해주시면서 둘 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고 준비까지 해주셨다.

 

3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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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26. 13:39

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TV도 라디오도 주당 몇 개고 고정출연을 하는 곳이 있었고, 매일 다른 대본을 외우고, 연습을 해서 본방송에 들어가고, 그 틈틈이 회의도 해야 되고... 집으로 올 때엔 당연하다는 듯이 심야택시를 이용했고 침대에 누워서 세 시간만 있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그래도 누가 뭐래든 젊으니 이런 것 쯤이야 하고 무아지경 상태로 견뎌냈다.

당시의 황태자와 미치코 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무렵 드라마 본방송을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이명 현상이 일어났다. "키잉~"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상대방의 대사가 들리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토토는 친한 병원 원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용태를 설명했더니

"그대로 계속 일만 하고 있으면 죽을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 말에 펄쩍 뛰다시피 한 토토는 시간을 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생님께서 "과로가 심하네요. 곧장 입원해요."라고 말하시기에 토토는 NHK에 돌아가 감독님 등 관계자들에게 "입원을 해야 하니 쉬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예정을 갑자기 바꾸는 건 어려웠기에 "그럼 안 되는데."라든가 "다른 방송은 몰라도 이 쪽은 해줘요."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토토도 이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고 "내가 없으면 NHK가 망하려나?" 같은 농담을 하며 설렁설렁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토토는 그 때까지 건강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명 현상 정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 현상은 더더욱 심해졌다. 어떤 날 아침엔 일어나보니 양 무릎 아래에 직경 오 센티미터 정도 되는 붉은 꽃이 핀 것 같은 반점들이 상당수 보였다. 엄마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엄마도 평소와는 다르게 "바로 병원에 가렴"이라며 안절부절 못하셨다. "죽을 거예요"가 떠올랐다.

서둘러서 병원에 달려가 선생님께 진찰을 받았다.

과로는 여러가지 증상을 동반해 나타난다고 하는데 토토의 경우엔 이명 현상과 붉은 꽃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면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다리의 모세혈관이 약해진 것이다.

"일을 쉬고 입원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나을 거예요."

선생님 말씀대로 일 개월 동안 입원하기로 결정했지만 정했다 해서 방송 관계자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주는 건 아니었다. 고정출연 방송을 펑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답이 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쯤 되자 토토가 간절히 부탁드려본 결과 방송 관계자들도 "몸이 재산이니 치료에 전념하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출연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계절>을 봤을 때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이 TV 드라마에서 토토는 아츠미 키요시 씨가 연기하는 요리사의 아내 역할을 맡았다. 가게에 단골손님이 찾아와 "어라, 사모님은요?"라고 물어보자 아츠미 씨가 "잠깐 친정에 내려갔어."라고 답해주었다.

그런가. "친정에 내려갔어."라는 한 마디로 정리가 되는구나. 토토가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연기했던 배역이란 그 정도였던 건가.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친정 가는 길에 죽었어."가 되어버리려나...

사회를 맡았던 방송을 보니 더욱 슬펐다. 토토 대신 나온 분이 "쿠로야나기 씨는 병으로 인해 쉬게 되었습니다만, 한 달이 지나면 복귀하실 겁니다. 그 때까진 제가 대신해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면 토토도 병실에서 안심하며 지켜볼 수 있었겠지만 토토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안녕하세요"라며 방송을 바로 시작해 버렸다.

"이럴 수가 있어? 병원에서 확실하게 나은 다음 반드시 저기에 다시 설 테다!"

복귀를 향한 정열을 불태우게 되었다.

현장이란 비정한 곳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온정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현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입원하고 있던 한 달 동안 토토는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퇴원했을 때 토토는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셨다.

"좀처럼 듣기 힘든 질문이네요. 지금까지 그런 걸 물어본 사람은 아예 없었고요. 그래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토토는 그런 거야 간단하다는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즐거운 것들을 차례차례 입에 담아봤다.

"내일 연극을 보러가고, 모레엔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고, 그 다음날엔 영화관에 가고, 그 다음날엔 백화점에 가고..."

"누가 놀기만 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한 건 자기 스스로가 하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들을 골라서 해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병에 쉽게 걸리거나 하지 않아요. 하기 싫어, 너무 싫어라고 생각하면 이게 쌓이면서 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죠."

당시엔 아직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토토는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기 싫다고 생각되는 일은 받지 않도록 하고 자기가 맡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만 해왔다. 물론 TV 일도 연극 일도 즐거우니 계속해 온 것이다.

퇴원일을 맞이해 NHK 관계자들에게 "퇴원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모든 현장에서 "당장 돌아와주세요."란 답이 돌아왔다. "이제 당신이 있을 곳은 없어요."라고 하는 현장은 하나도 없었다.

 

오빠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은 매우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토토가 출연했던 방송을 몇 개 소개하자면 우선 <부 푸 우>가 있었는데 TV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인형극으로 1960년 9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육 년 이상에 걸쳐 방송되었다. 이것도 이이자와 선생님의 작품으로 아기돼지 삼형제가 주인공인데 투덜투덜대는 부, 의욕이 없는 후, 노력가인 우 중에서 토토는 막내인 우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1961년 4월부터 방송된 <마법융단>은 헬리콥터에서 공중 촬영을 하거나 영상 합성 기술을 구사했던 아동 대상 방송이었다. "아브라 카타브라!"라는 주문을 외우면 아랍풍 의상을 입은 토토와 터번을 두른 두 초등학생이 탄 마법융단이 그 아이들의 초등학교 상공까지 날아가는 방식을 이용해 호평을 받았다.

교정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인간문자를 만들어서 환영해 주기도 하는 등 아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토쿄 올림픽 중계를 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하다며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아 종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 년 넘게 이어온 인기방송이었던지라 지금도 가끔씩 "융단에 탔던 초등학생입니다."라며 모습이 완전히 영감님으로 변한 분들이 말을 걸어주시곤 한다.

성인 대상 방송도 많이 나오게 되어 1961년 4월부터 시작한 두 방송에 토토가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만나요>는 토요일 밤 열 시에 방송되어 오 년간 계속된 전설적인 음악 버라이어티 방송이었으며 <젊은 계절>은 긴자의 프랭탕이라는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지금은 대하드라마가 고정적으로 편성되어 있는 일요일 밤 여덞 시에 방송되었으며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도 사카모토 큐우도 죄다 출연해서 "스타가 마흔다섯 명이나 나오는 방송"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꿈 속에서 만나요>도 <젊은 계절>도 실시간 방송이었는데 대본은 이틀 전에야 나와서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하려면 지금으로선 절대 있을 수 없는 빡빡한 스케줄로 움직여야 했기에 수 년 동안 주말에 제대로 잔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많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할 수 있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젊은 계절> 대본이 지연되어 방송 당일에야 완성된 일이 있었다. 대본을 따로 인쇄할 틈도 없어 복사본을 돌렸는데 당시 복사본은 지금과 달리 진한 보라색으로 찍혀 나왔고 축축한데다가 가지고 있으면 식초 냄새가 풍겨왔다. 몇 부고 쌓여있는 탁상 아래엔 물방울이 떨어져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아츠미 키요시 씨와 만난 건 1960년 TV 드라마 <아버지의 계절> 스튜디오에서였다. "에노켄"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에노모토 켄이치 씨가 주연을 맡았으며 <젊은 계절>의 전신 격인 드라마로 아츠미 씨는 토토의 맞선 상대 역할로 도중참가를 하게 되었다.

아츠미 씨는 아사쿠사에 있는 프랑스자라는 스트립 극장에서 코미디언으로서 활약해온 일류 개그맨이었다. 프랑스자에서는 아즈마 하치로우 씨나 세키 케이로쿠 씨를 필두로 훗날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코미디언들이 즐비했으며 콩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 씨도 있었다.

"아사쿠사 극장에서 좌장을 맡으셨던 분이세요."

NHK 사람이 소개해 주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아츠미 씨는 작은 눈 안의 검은 자위를 휙 움직였다.

우와, 이렇게 눈초리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가 토토가 아츠미 씨에게 품은 첫 인상이었다. 어깨에 힘을 주며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온 아츠미 씨는 거기 있던 사람들 전원에게 경계심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아츠미 씨는 무척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연습이 시작되자 토토가 맞선을 봐서 결혼까지 갈 수 있는 상대방 역할로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가 끝나자 다시금 퉁명스러워졌지만 주 1회씩 연습과 본방송 촬영을 들어가니 이러면서 익숙해지겠거니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이래 몇 주가 흘러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토토가 뭔가 말하자 아츠미 씨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뭐야 이 년은!"

이라며 한층 위압을 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년"이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건 처음이라 심술을 부리거나 비꼬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담아 "이 년이라 하심은?"이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츠미 씨가

"아아, 됐다됐어. 이런 여자는 정말 싫다니깐."

이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사쿠사에서 고생하며 힘을 길러온 아츠미 씨가 보기에 종교 계열 여학교에서 음악학교를 거쳐 NHK 극단 소속으로 들어온 토토가 고생 따위 모르는 온실에서 자라난 아가씨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츠미 씨 자신도 NHK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음향 스태프로부터 "마이크가 망가지지 않게 조금 작은 목소리로"라고 주의를 받으면 "아사쿠사에선 얼마나 목소리가 큰가로 승부를 했단 말야."라며 분개했다. 토토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 녹음 일정 전에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골라서 이걸 선물해 보기로 했다.

"저기 이봐요. 세상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다고요. 이 자슥아 하고 외치기만 하지 말고 이런 책도 좀 읽어봐요."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를 내밀자 아츠미 씨는 잿빛 별 위에 금발 소년이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머뭇머뭇거리며 책을 받아들고서 "고마워"라고 부끄러운 듯 말을 꺼낸 뒤 현장을 떠났다. 

 

아츠미 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사쿠사에 대한 것, 영화에 대한 것, NHK에 대한 것, 그리고 항상 모두 같이 가는 중화요리점 같은 것도.

아츠미 씨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해서 어느 새부턴가 아츠미 씨는 토토를 "아가씨"라고 불렀고 토토는 아츠미 씨를 "오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토토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오빠는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실력이 있는 녀석은 말야, 혼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도 사십 분이든 오십 분이든 계속 할 수 있단 말이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너덜너덜한 신문 같은 걸 안고 있는 아저씨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같은 걸 물어보고 하다가 확 분위기를 끌고 당기고 하면서 그런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게 좋은 배우, 능숙한 배우라고 다들 믿으면서 그런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안게 되는 눈물 같은 것도 있어. 대본 작가가 쓴 걸 이해하기 전에 우선 어떻게 자신을 내보일 것인가 다들 생각하게 되지. 하루 세 번 공연을 하는데 정월엔 하루에 여섯일곱 번으로 늘어나. 첫날부터 사흘 정도는 성의를 다해서 하지만 어느 정도 되면 모든 배역들이 할머니 가발을 쓰고 떼우려 하는 경우도 생기지. 그걸 저 녀석들 너무 엉터리네 하고 웃고 구르고 하지 손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빠와는 <꿈 속에서 만나요>와 <젊은 계절>에서도 함께 연기했다. 그 후 오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토라 씨"를 연기했으니깐.(<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에서 맡은 배역의 애칭으로 TV 드라마로 시작해서 영화만 마흔여덞 편을 찍어낸 장수 인기작이었다 - 역자 주) 오빠가 말해왔던 "실력이 있는 녀석"은 아츠미 키요시 자신을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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