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2024. 7. 12. 21:35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

 

행복한 나날

"내일부터 매일 아침 바나나를 먹도록 하자!"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이렇게 선언했다. 어딘가에서 "바나나는 몸에 좋다"라고 들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누구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지만 옛날엔 고급과일이었는데다가 전쟁 후 당분간은 어린이가 병에 걸리거나 하지 않는 한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때만큼 아빠의 선언에 "우와~!"라며 기뻐한 적이 없었다.

보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것 같은 색과 둥글게 커브를 그리는 귀여운 모양새. 껍질을 벗기는 것도 간단하고 안에 들어있는 과실은 끈적하면서 달콤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아침 식탁에 바나나가 올라오게 되었다.

토토네 식사 메뉴는 아무래도 다른 집들과는 다소 달랐던 것 같다. 아직 전쟁의 영향을 그렇게 받지 않아서 식료품을 구하기 쉬웠을 당시 서양식으로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침밥은 빵과 커피로 고정되어 아빠는 매일 아침 사각형 목제 상자에 커피콩을 넣고서 금속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원두를 갈았다. 서걱서걱서걱! 커피의 향이 퍼져나왔다. 빵도 센조쿠역 앞에 있는 빵집에서 매일 아침 배달해주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이 조금 딱딱하고 엉덩이처럼 생긴 둥근 프랑스빵이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가족 전원이 모이는 저녁 식사 때엔 고기 요리가 나왔다. 아빠가 소고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엄마는 프라이팬에 굽기도 하고 석쇠에 굽기도 하면서 같은 요리가 되지 않도록 연구를 하셨다. 평범한 집이라면 구운 생선이나 생선조림을 먹었겠지만 토토는 아빠 덕분에 언제나 맛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엄마와 토토의 두 살 아래 동생은 생선파였지만.

아빠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신교향악단(현재의 NHK 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를 맡고 있으셨다. 러시아 출신 명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에서 따와 "일본의 하이페츠"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정기 콘서트 외에도 지방 공연, 레코드 녹음 연주까지 매일을 바쁘게 보내셨다. "일본 제일의 연주가"라는 칭호를 받았던 적도 있다.

아빠와 엄마의 인연을 이어준 것이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토토는 무척 놀랐다.

어느 연말, 아빠는 오케스트라 동료들과 히비야공회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공연장을 꽉 채우기 위해선 표를 팔아야 했고 제9번이 여기에 알맞은 곡이었기 때문이다. 제9번의 뒷부분에는 "환희의 노래"라는 코러스가 있기 때문에 음악학교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데다가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표를 팔아주었기 때문에 히비야공회당을 손쉽게 채울 수 있었다.

그 코러스 담당 학생들 중에 토우요우음악학교(현재의 토쿄음악대학교)에 다니던 엄마가 있어서 아빠와 만나게 되었다.

그린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그린 베레모를 쓴 모습이 잘 어울렸다고 하는데 모두 엄마가 직접 뜨신 것이었다. 엄마는 무척 아름다웠기에 아빠는 한 눈에 반해버려 아빠가 사는 맨션 일 층에 있는 노기사카 클럽이라는 찻집에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 권유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아빠도 잘 생기셨고.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졌다가 전차도 버스도 모두 끊기고서야 정신을 차렸고 아빠는 노기사카 클럽 위에 있는 아빠의 방으로 엄마를 초대했다. 엄마는 당시 코우지마치에 있는 숙부님 집에서 신세를 지며 통학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봤자 다들 자고 있었을 시간이었기에 할 수 없이 아빠를 따라가게 되었다.

엄마는 그로부터 꽤 지난 훗날에도 이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스무 살이나 먹고서 아빠가 가자는대로 순순히 따라갔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원."이라고 하셨지만 엄마 입장에서도 오케스트라 콘서트 마스터에 잘 생기기까지 한 아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조금 기쁘게 받아들이셨는지도. 그건 그렇고 베토벤이 교향곡 제9번을 만들지 않았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일이 없었고 토토도 두 분의 아이가 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참 신기한 일들이 많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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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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