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만화 2022. 10. 3. 21:57

 

 

수성궤도기지 <페비 콜롬보 23>은 태양의 중력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수성 회전궤도를 미묘한 균형 하에 돌고 있다. 수성은 태양에서 겨우 5791만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아 열을 직접 받게 된다면 혈액까지 끓어오를 것이고, 반대로 수성의 그림자 부분에 들어가면 마이너스 100도보다 낮은 극한이 기다리고 있어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게다가 태양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전자파는 계속해서 시스템의 오작동을 불러일으킨다. 사소한 에러로도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이 수성에서 태양풍은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바람이다.

 

지지직하는 소리가 나면서 격납고의 조명이 검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태양 플레어 발생 경보에 기지 전체가 긴급사태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깜깜해진 기지 안으로 슬레타가 들어왔다. 아직 여섯 살인 슬레타에겐 검붉은 조명이 무서운 거겠지. 이럴 때마다 슬레타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에어리얼, 들어가도 되지?"

 

에어리얼, 내 이름. 외부엔 비밀로 하고 있지만 건담 타입 모빌슈트이다.

 

슬레타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어머니가 일 때문에 바쁘다는 이야기다. 이 수성에는 슬레타 외엔 아이가 없다. 때문에 내가 슬레타에겐 유일한 친구이다.

 

"에어리얼, 게임 실행해줘."

 

슬레타가 내 콘솔을 조작하면서 게임 화면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어떤 게임을 하려는 걸까?

 

"총 쏘는 거! 오늘이야말로 엄마를 이길 거야."

 

슬레타의 어머니는 나를 개발한 사람이자 건담 테스트 파일럿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어머니도 슬레타도 이런 게임을 잘한다. 슬레타가 이런 게임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것은 네 살 즈음이었을까.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나 슬레타의 실력은 어머니를 제외하면 수성에서 최강 수준이다. 점수가 마구마구 올라간다. 또다시 실력이 늘었다.

 

"에어리얼, 이거 봐!"

 

최고득점이다. 슬레타가 기뻐하며 시트를 흔든다.

 

슬레타, 나의 조그마한 파일럿.

 

***

 

어느 날, 아홉 살이 된 슬레타가 울면서 나한테 찾아왔다. 수성 노인이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슬레타는 이런 일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걱정할 테니까."

 

어머니는 딸과 단 둘이서 이 수성으로 도망쳐 왔다. 숨겨주기는 했지만 모두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귀찮은 존재를 왜 받아들이냐며 추방하자 주장한 노인들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슬레타와 어머니에겐 이 곳 수성 밖에 없다. 이 곳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있잖아, 에어리얼."

 

 왜 그래?

 

"지구는 어떤 곳이야?"

 

슬레타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수성 밖에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라이브러리를 통해만 봐온 지구권에서의 삶에 흥미진진하다. 학교나 마을, 친구와 아이들... 지구권에선 당연한 존재겠지만 여기에선 아니다. 있는 것은 태양풍에 벌벌 떨며 자원채굴을 하는 일상사 뿐. 그런 생활을 계속하니 수성 노인들도 고약해진 것이겠지.

 

라이브러리로 볼래? 슬레타에게 메뉴를 표시해주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골랐다. 애니메이션도 영화도 소설도 대부분 지구권을 무대로 한다. 그런 걸 보는 동안엔 슬레타가 수성 일을 생각지 않겠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다 본 뒤 슬레타는 작게 중얼거렸다.

 

"도망치면 하나, 나아가면 둘."

 

이것은 슬레타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이다. 슬레타가 다섯 살이었을 무렵, 주사를 싫어하는 슬레타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잘 들으렴, 슬레타. 주사에게서 도망치면 주사를 안 맞겠지?"

 

"."

 

"아프지 않아를 얻을 수 있어."

 

"."

 

"그럼, 주사를 맞으면 어떻게 될까?"

 

"병에 안 걸려."

"그렇지. 또 다른 건?"

 

"다른 거?"

 

"그래. 주사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면 그것 외에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있어. 예를 들어, 엄마가 기뻐할 거야."

 

"우우웅..."

 

"수성인들도 슬레타가 장하다고 인정해 줄 거야."

 

"그런 거야?"

 

"슬레타의 레벨이 올라 주사가 아프지 않아질 거야"

 

"그렇구나!"

 

"그래. 그러니깐 어른들은 주사를 무서워 하지 않는단다."

 

"그런 거였구나~"

 

"알았지? 도망치지 않으면,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단다."

 

"그래서, 나아가면 둘인 거야?"

 

"그래, 둘보다도 많이"

 

이후, 그 말은 슬레타의 등을 떠밀어주는 주문이 되었다. 이 말은 틀림 없이 어머니에게 있어도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어린 슬레타를 안고 여자 혼자서 이 수성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머니 자신의 주문.

 

"도망치면 하나, 나아가면 둘"

 

한 번 더, 슬레타가 작게 되뇌었다. 엉클어진 실을 풀 듯이 정성스럽게. 난 이 주문이 들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슬레타의 온몸이 용기로 물들어, 공포라는 저주를 깰 수 있을 때를.

 

괜찮아, 슬레타는 내 안에서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말은 강하니깐.

 

 

 

***

 

 

 

"에어리얼, 긴급발진 준비. 수성 지표면 챠오몬프 채굴기지 부근에서 사고 발생!"

 

발진기지에 긴박한 방송이 울려퍼졌다. 자원채굴 중에 모빌 크래프트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열한 살이 된 슬레타가 내 콕핏에 뛰쳐들어왔다.

 

"태양광 활발, 고에너지 프로톤 현상 관측. 하지만 지표강하엔 문제 없어. 서둘러 줘!"

 

수성은 인류가 생활하기엔 아직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니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들이 차출된다. 우리는 수성 최강 콤비니깐.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노인들의 목숨을 구해왔다.

 

덕분에 어머니와 슬레타에게 감사하는 사람들도 늘면서, 전처럼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노인도 적어졌다.

 

"강하궤도 상에 오브젝트 없음. 발진을 허가한다."

 

"양호. 에어리얼, 발진 후에 바로 지표강하 기동으로 이행."

 

우리가 게이트에서 우주로 뛰어내리자마자 작열하는 태양빛이 기체를 덮쳤다. 슬레타는 곧바로 크레이터의 그림자로 돌진했다. 이걸로 태양광을 직접 맞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대로 크레이터의 그림자를 따라 사고현장을 향해 서둘렀다.

 

"시그널을 로스트한 뒤로 얼마나 지났어요?"

 

"97분이야. 시그널 수신을 할 수 없으니 현재위치도 알 수 없어. 서둘러 주렴, 슬레타."

 

작전관제관 멜리사 벨더가 비는 듯이 말했다. 로스트된 사람이 멜리사의 남편인 에르고 벨더인 것이다. 에르고는 아직도 슬레타에게 심술맞게 구는 노인들 중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 애초 숨겨주는 것부터 반대한 데다가, 며칠 전 어머니가 출세를 하게 되면서 에르고가 어머니의 부하가 되어버렸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슬레타에게 심술맞게 굴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철 좀 들라지.

 

하지만 슬레타는 곧장 답했다.

 

"괜찮아요, 멜리사 씨. 맡겨만 주세요."

 

슬레타는 착한 아이다.

 

 

 

우리는 태양을 피하면서 현지로 향했다. 산맥, 계곡, 저지대 등 수성의 어떤 지형을 이용하는 것이 최단거리인지, 어떤 루트가 기체 부담을 가장 덜 수 있을지, 슬레타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신호가 잡혀 내 모니터에 데이터가 표시되었다.

 

"찾았어요. 지금 회수할게요."

 

"슬레타 부탁해."

 

멜리사의 애원을 들으며 지면의 균열된 부분에서 날아오른 우리를 태양열과 고에너지 입자가 덮쳤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나라도 위험하다. 슬레타는 침착하게 바라보면서 곧바로 모빌 크래프트를 발견했다. 굴착작업 중에 붕괴사고가 발생한 듯하다.

 

"기체 쪽은 틀린 것 같네."

 

모빌 크래프트는 붕괴한 퇴적물에 끼어있었다. 콕핏을 억지로 열어서 파일럿만 구해내는 수 밖에. 슬레타가 빔 사벨을 뽑았다.

 

"에어리얼, 출력은 내가 조정할게."

 

슬레타가 출력을 낮추었다. 잘못하면 파일럿도 절단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빔 사벨을 살짝 기체에 갖다대어 조심스럽게 콕핏 부분을 베어내었다. 마치 외과 수술과도 같은 빔 사벨 조작법이다. 수성기지 관제센터에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어설프게 지시하는 것보단 슬레타에게 맡기는 것이 정답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에르고 씨, 들려요? 구하러 왔어요!"

 

"슬레타! 늦었잖아! 빨리 좀 하라고!"

 

도움을 받는 입장인 에르고가 거만하게 구는데도 슬레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에르고를 모빌 크래프트에서 꺼냈다.

 

"에르고 씨, 공기는 남아있어요?"

 

"예비분이 사고로 망가졌어. 앞으로 7분 밖에 없잖아? 아이고 사람 죽네~"

 

"괜찮아요. 4분이면 되니깐."

 

"뻥치고 있네. 여기에서 기지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다. 슬레타가 4분이라 했으면 4분이다.

 

"눈 감고 있으세요."

 

난 태양빛을 가리기 위해 에르고를 품 안에 감싸고 크게 도약했다. 에르고의 우주복엔 이상이 없다. 이 정도면 4분 쯤은 버티겠지. 꼬매기라도 하듯 지면의 균열을 달려나갔다. 슬레타는 별일 없다는 듯 나아가지만 에르고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공포를 느낄 만한 속도다. 그래도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건 공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이야기므로 생존확인을 따로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슬레타가 빔 라이플로 낭떠러지를 쏘자 벽이 갈라지면서 또다른 균열이 나타났다. 지름길인 것이다. 챠오몬프 기지의 게이트가 보이자 우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게이트가 천천히 열려 거기에 뛰어들었다. 삼중 기밀벽을 통과해 거주 지역까지 딱 4. 슬레타가 말한대로다.

 

거주지역 게이트 안에는 기지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슬레타는 공기가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에르고를 내려놓았다.

 

"웃기지마! 노인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내가 죽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거지!"

 

에르고는 헬멧을 벗자마자 고함을 질러댔다. 정정하기도 하시지. 하지만 멜리사가 달려와 에르고를 껴안았다.

 

"잘 돌아왔어요 에르고."

 

아내에게 안긴 에르고는 얌전해졌다.

 

"다녀왔수."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안심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렴 슬레타."

 

모니터에 어머니가 비춰졌다.

 

"엄마! 돌아왔어?"

 

어머니는 출세한 뒤 더더욱 바빠졌다. 지구권에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랜만에 돌아온 참에 마침 딸의 활약상을 볼 수 있었던 듯하다.

 

"잘했구나, 슬레타.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엄마가 만들어준 에어리얼 덕분이야."

 

"에어리얼도 슬레타도 둘 다 대단했어."

 

어머니가 웃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기대에 부응했구나.

 

"엄마, 이번엔 얼마나 있을 거야?"

 

"네 생일까지는 있을 거야. 그러니 올해는 작년과 합쳐서 이 년분 파티를 열자꾸나."

 

"만세!"

 

슬레타가 뛰어오르듯 말했다. 하지만 슬레타가 어머니와 함께 생일을 축하한 것은 이 열한 살 생일이 마지막이었다.

 

 

 

***

 

 

 

슬레타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빠서 지구권과 수성을 왔다갔다 하느라 딸의 생일에도 함께 있지를 못했다.

 

"있잖아 에어리얼?"

 

외톨이 슬레타가 내 안에 틀어박히는 날이 더욱 늘어났다.

 

"학교는 어떤 곳이야?"

 

글쎄, 나도 가본 적이 없으니...

 

"이 만화처럼 생겼으려나?"

 

그건 픽션이지. 그리고 그거 너무 옛날 만화야.

 

"가보고 싶다, 학교..."

 

열다섯이 된 슬레타에게 흥미가 생길 만한 건 학교 뿐이다. 같은 나이대 아이들이 한가득 모여 즐겁고 자극적인 매일을 보내는 만화나 영화에 그려진 학교는 눈부신 곳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슬레타, 우리는 지구권에 돌아갈 수 없어. 넌 모르겠지만 저 쪽에선 어머니를 마녀라고 부르며 전세계가 증오하고 있어. 나도, 건담이란 게 들키면 곧바로 부숴질 거야. 그러니 네 꿈이 이뤄질 순 없어.

 

하지만 괜찮아.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해줄게. 학교 같은 게 없어도, 친구 같은 게 없어도, 내가 함께 있어줄게.

 

"있잖아 에어리얼. 내가 학교에 가게 된다면..."

 

살며시 비밀을 터놓듯이 슬레타가 말했다.

 

"함께 가자."

 

 

 

***

 

 

 

오랜만에 어머니가 수성으로 돌아와 슬레타는 무척 기뻐했다. 어머니가 없는 동안 배운 것이나 열심히 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제 열여섯이 되었는데도 어린 아이처럼 일찍 잠들어버린 그날 밤, 어머니가 홀로 격납고에 찾아왔다.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어서오세요 어머니. 우리 둘만 있는 건 오랜만이네요. 슬레타가 기뻐했어요.

 

"다녀왔다 에어리얼. 기뻐하렴. 문을 열어냈어."

 

? 무슨 말씀인가요 어머니?

 

"아스티카시아 고등전문학교에서 모빌슈트 결투대회가 열릴 거야. 여기에서 이긴 사람이 데링의 외동딸과 결혼할 수 있다는구나."

 

데링이라는 사람은 베네리트 그룹의 총재다. 이 수성기지도 베네리트 그룹 소유이고. 그러니 수성인들이 우리를 받아들이는 걸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마녀사냥에 세워 낙인을 찍은 사람이야말로 데링 총재였으니깐.

 

"에어리얼, 너희는 학교에 가렴."

 

, ?

 

나와... 설마 슬레타!?

 

"내가 만든 최고걸작. 네가 슬레타의 검이 되는 거야."

 

안 돼.

 

안 됩니다 어머니.

 

전 괜찮아요. 하지만 슬레타는 안 돼요. 그렇게 착한 아이를 어떻게...

 

복수는 우리가 하는 거예요. 슬레타를 이용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두고 보라고 모두들. 우리의 딸이 원한을 갚아줄 테다!"

 

 

 

***

 

 

 

다음날.

 

아무 것도 모르는 슬레타가 기뻐하며 보고해왔다.

 

"있잖아 에어리얼! , 학교에 가게 되었어!"

 

알고 있어. 어젯밤 어머니가 말하셨거든.

 

"엄마가 말이지, 입학 절차를 다 밟아놓으셨대. 수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공부를 하라고 말야. 나 열심히 할 거야. 누구도 죽지 않는 수성을 만들기 위해서 말야. 마을도 가게도 학교도 잔뜩 유치하고 말이지..."

 

아아, 넌 아무 것도 모르는 구나. 모든 걸 알려주고 싶어. 어머니가 널 복수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거역할 수 없어. 그 분은 날 만드신 어머니니깐.

 

"하지만 나 잘할 수 있으려나? 인간 친구를 만든 적 자체가 없는 데다가 공부도 자신이 없네..."

 

라며 슬레타가 불안해 했다.

 

"...무서워. 난 수성 밖에 모르는 걸. 엄마도 같이 가줄 수 없대."

 

그래 슬레타. 혼자서 지금 당장 학교에 간다니 무리야. 공부라면 수성에서 해도 되고 네가 없으면 수성인들도 모두 힘들어 할 걸? 어머니의 도구가 될 필요는 없어. 저주를 이어받지 않아도 돼.

 

"거절하는 게 좋으려나? 가면 실패할 수는 없잖아? 입학금도 공짜가 아닌 걸. 엄마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될 거고. 어떡하지..."

 

괜찮아, 슬레타. 거절해 버려. 도망치자.

 

"어떻게 할까? 생각이 정리되질 않네. 그래도 가는 편이 좋으려나..."

 

도망쳐 슬레타.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이런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슬레타는 내 말에 답이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도망치면 하나."

 

!

 

"나아가면 둘. 맞지, 에어리얼?"

 

놀랍다. 슬레타가 도망치치 않겠다고 말했다. 어릴 적엔 내 안에 도망쳐 오기만 했던 울보 슬레타가 지금은 앞을 향하고 있다. 어머니의 말을 자신의 힘으로 바꿔서.

 

... 그렇구나 슬레타. 너는 매우 성장했구나. 이젠 내 안에 숨어있던 작은 여자아이가 아니야. 여태껏 널 돌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슬레타가 날 가르치고 있었던 거야.

 

"있잖아 에어리얼, 나아가면 틀림없이 두 개 뿐 아니라 엄청난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공부는 물론이고 친구라든가, 선배라든가, 데이트를 한다든가..."

 

그거 좋네 슬레타. 잃을 수 있는 걸 세는 것보다 얻고 싶은 걸 세는 편이 훨씬 나아.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게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용기를 얻은 것이 어머니의 말에 의한 것이라 해도.

 

슬레타, 넌 그 이상을 쥐어낼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가자 에어리얼. 함께라면 분명 괜찮을 거야!"

 

그건 내가 슬레타에서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물론이야, 함께 있어줄게.

 

우리는 가족이니깐 말야.

 

나는 동의하는 뜻을 담아 모니터를 두 번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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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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