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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4. 10:34

긴자 산책, 스키, 해수욕

 

"해마다 한 번은 토토스케를 긴자에 데려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빠가 그런 말을 했는데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매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언제나 엄마와 둘이서만 외출을 하는 아빠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별일이다.

아빠는 우선 시세이도우파라에서 은으로 만든 컵에 담긴 반구형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웨하스도 올려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반짝반짝거리는 스푼으로 한 숟갈을 떠내 입에 쏙 넣으면 차가움과 달콤함이 입 안에서 정수리까지 퍼지는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진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엔 긴자의 도로를 거닐며 쇼윈도우를 쳐다보기도 하고 가게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아이를 보는 것이 익숙치 않은 아빠는 토토가 어떤 물건을 잠시 봤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갖고 싶니?"라고 물어보며 사주려 들었다.

토토는 "갖고 싶은 게 아니어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바이올린과 엄마에게 푹 빠져 살아온 아빠로선 여자아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라고 말해도 이해를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윈도우 쇼핑을 할 때엔 보고 싶어도 멈추지 않고 곁눈질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츠코시 백화점 옆에 있었던 킨타로우라는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건 아빠가 사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엄청 고심한 끝에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화 같은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엿보기 상자" 같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던 적도 있다.

장난감을 포장한 상자를 안은 토토는 딸에게 장난감을 사줬다며 만족해하는 아빠와 니혼극장(현재의 유라쿠쵸우 마리온) 지하에 있는 영화관으로 갔다. <뽀빠이>나 <미키마우스> 같은 영화를 본 뒤 택시에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한번씩 아빠와 했던 우아한 긴자 데이트는 전쟁이 격해지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즐거운 일이나 맛있는 것들을 앗아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돌아보면 토토는 상당히 축복받은 소녀시절를 보냈던 것 같다.

겨울이 되면 가족과 함께 시가고원으로 갔다. 당시 시가고원은 무척 국제적이었던 곳으로 샹하이나 홍콩, 유럽에서까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한가득 놀러오는 관광지였다. 아빠가 시가고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지휘자 사이토우 히데오 씨로부터 연주 아르바이트를 권유받은 것을 계기였는데 오자와 세이지 씨의 은사로 알려져 있는 사이토우 씨는 첼리스트로서도 유명하여 아빠와 현악사중주 악단을 결성하였다.

토토 가족이 묵은 호텔에 들어간 순간 커다란 로비임에도 따뜻해서 깜짝 놀랐다. 식당도 복도의 구석조차도 어디를 가든 따뜻했는데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의 보이가 눈 속에서 노란 채소들을 파내고 있는 것도 보았는데 노랗고 사각사각거리는 이 채소를 "샐러리"라 한다고 보이가 알려주었다. 엄마도 토토도 샐러리를 그 때 처음 먹어봤다.

시가고원 연주회는 외국인 전용 호텔에서 열렸다. 매일 밤마다 댄스파티가 열려서 아빠가 거기에서 연주를 했는데 아빠가 정말로 목표로 하고 있었던 건 스키였다. 아빠는 시가고원을 무척 마음에 들어해서 연주여행차 갈 때마다 반드시 가족을 데리고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스키장엔 리프트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스키 플레이트를 착용하고서 자기가 직접 경사로를 올라가야 탈 수 있었다. 토토는 겨울용 두꺼운 원피스 아래에 바지를 입었을 뿐인 차림새로 어린이용 스키 플레이트를 착용하고 연습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실크 그린 머플러를 머리에 두르고서 스키를 타고 있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면 멋져 보일 거라 생각하고 그러셨다나.

스키 연습장에서 어린이를 보는 게 드문 일인지 외국인 스키어들이 곧잘 말을 걸었다.

"오, 큐트!"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칭찬을 들었다는 건 알았기에 "땡큐"라고 답했다. "땡큐"만은 알고 있어서 외국인들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머리를 숙이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어느 날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스키어가 싱글벙글거리며 다가와서

"내 스키에 타보지 않을래?"

이런 몸짓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 망설이다가 옆에 있던 아빠에게 물어봤다.

"괜찮아요?"

아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태워달라고 해보지 그래?"

토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땡큐, 베리 머취!"

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따라갔다.

비탈길을 꽤 올라간 뒤 그 사람이 자기의 스키 플레이트를 나란히 해서 앞쪽에 토토를 웅크린 자세로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걸까 하는 순간 곧바로 토토를 태운 스키가 자유자재로 연습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미끄럼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고 매끄럽게 요람이 흔들리는 듯한 리듬도 느껴져 무척 기분이 좋아 이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토토가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잡아주고 있었다.

업거나 안고서 타는 게 아니라 스키 위에 아이를 올리고서 타다니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테크닉이었는데 그럴 만도 했던 게 호텔 직원 왈 그 사람은 미국 영화에도 출연했을 정도로 유명한 스키어였다고 한다.

토토는 세계적인 스키어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되어 좀 자랑스러웠다.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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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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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3. 13:55

아빠와 엄마의 신혼생활은 노키자카에서 시작했으며 토토도 노키자카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빠의 오케스트라 연습장이 있는 곳은 센조쿠이케(현재의 오오타구) 근처였기 때문에 도보로 다닐 수 있는 키타센조쿠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토토는 아빠, 엄마, 남동생, 셰퍼드 로키와 함께 살았다. 둘째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난 것도 이 집에 살았을 때였다. 무척 현대적으로 꾸며져서 붉은 지붕에 하얀 벽으로 이루어졌고 베란다도 있으며 바닥엔 판자를 깔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플로링이 되어 있었다. 잘 때에도 이불을 까는 게 아니라 침대에서 잤다.
마당엔 수련이 떠있는 연못이 있었고 베란다 위에는 포도재배용 시렁이 있어서 매년 가을이 되면 달콤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서 맛있게 먹었다. 전쟁이 격해지면서 음식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아빠는 포도 시렁에서 호박을 키웠는데 무척 잘 자라서 가족들이 기뻐했다. 온실도 있어서 아빠가 아침부터 열심히 동양란이나 장미를 돌보았다.
"토토스케, 이리로 와보렴."
아빠가 불러서 토토도 온실 식물들을 같이 돌본 적도 있었다. 장미바구미라는 코가 코끼리처럼 긴 작은 곤충을 장미 봉오리나 새싹에서 떼어내는 일도 했었다.
토토가 입은 옷은 모두 엄마가 재봉해준 것이었다. 그것도 가게에서 팔거나 하지 않을 듯한 참신한 옷들 뿐이었다. 엄마는 "외국 책을 참고한 거야"라고 말했지만 만듦새가 정말 특별났다. 마음에 드는 천을 발견하면 그걸 토토에게 걸쳐보고 토토의 체형에 맞도록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낸 다음 휙휙 꿰매어 순식간에 옷으로 만들어내었다.
"마법사 같아!"
그런 것을 입체재봉이라고 하는 걸까? 새로운 옷이 만들어질 때마다 토토는 깜짝깜짝 놀랄 뿐이었다.
요리를 해도 재봉을 해도 센스가 좋은 엄마는 즐겁게 만들어 갔던 것 같다. 토토가 다니던 토모에학원은 도시락을 그냥 열어서 먹는 게 아니라 상자를 뒤집어 열어서 밑부분부터 먹는 게 유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들 엄마에게 바닥이 윗부분처럼 보이는 그림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졸라댔다.
토토 엄마는 그런 그림 도시락도 잘 만들어내어서 밑바닥 부분에 반찬을 넣어서 뒤집으면 그대로 여자아이 얼굴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 완성도에 다들 놀라서 점심시간만 되면 다들 "보여줘!" "보여줘!"라며 토토 주변에 모여들었다. 요즘 말하는 "캐릭터 도시락"이 실은 2차 세계대전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집 근처에 있었던 센조쿠이케공원은 아이들이 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센조쿠이케는 카마쿠라시대에 니치렌쇼우닌이 샘솟는 물로 발을 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연못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했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샘솟는 개끗한 물을 담은 연못의 한구석엔 훌륭한 홍예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토토는 가재를 잡으려고 다리에 걸쳐서 손을 뻗다가 두 번이나 연못에 떨어질 뻔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바로 구해주었다. 이 근처에는 신사나 찻집, 카츠 카이슈와 그 아내의 묘도 있었기에 휴일엔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친카라원"이라는 어린이 놀이터에선 높이가 오 미터 정도 되는 미끄럼틀이 인기를 얻어서 저녁이 되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이걸 타려고 모여들었다. "햐~" 같은 환성을 자아내며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타곤 했다. 무척 높은 곳에서 한번에 내려오기 때문에 코끼리 코나 구름 같은 뭔가 특별한 것에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토는 눈을 감고서 "코끼리 코!"라든가 "다음엔 구름!"이라든가 "마법사의 양탄자!" 같은 것들을 상상하며 타곤 했다.
물론 눈을 뜨고 내려오면서 멀리까지 펼쳐있는 마을 풍경이 휙하고 사라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다. 계절에 따라서 하늘의 색깔이 진해지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했으며 구름의 모양도 변화했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 즈음엔 뭉게뭉게 적란운이 어느 새엔가 사라져 얇은 구름이 베일처럼 깔린 하늘을 보기도 했다. "아아... 여름이 끝나버리네." 조금 쓸쓸한 감정을 느끼며 그 구름 베일을 망토처럼 걸친 요정이 된 상상을 하며 내려오기도 했다.
친카라원 근처엔 누구도 살지 않는 저택이 있어서 토토는 곧잘 그 저택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타타미 위를 뛰어다니곤 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집이 카츠 카이슈의 별장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츠 카이슈는 말년에 여기에서 유유자적한 한 때를 보내며 사이고우 타카모리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유서 깊은 집을 신발은 벗고 들어갔다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뛰어다녔던 걸 생각하면 세계대전 전은 정말 관대한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쿵쾅쿵쾅 달려도 술래잡기를 해도 숨바꼭질을 해도 한번도 어른에게 혼나거나 하지 않았으니깐.
카츠 카이슈가 이 곳에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게 된 건 NHK 대하 드라마를 보고 나서였는데 그걸 본 토토는 친척 아저씨를 오랜만에 보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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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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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2. 21:35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

 

행복한 나날

"내일부터 매일 아침 바나나를 먹도록 하자!"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이렇게 선언했다. 어딘가에서 "바나나는 몸에 좋다"라고 들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누구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지만 옛날엔 고급과일이었는데다가 전쟁 후 당분간은 어린이가 병에 걸리거나 하지 않는 한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때만큼 아빠의 선언에 "우와~!"라며 기뻐한 적이 없었다.

보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것 같은 색과 둥글게 커브를 그리는 귀여운 모양새. 껍질을 벗기는 것도 간단하고 안에 들어있는 과실은 끈적하면서 달콤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아침 식탁에 바나나가 올라오게 되었다.

토토네 식사 메뉴는 아무래도 다른 집들과는 다소 달랐던 것 같다. 아직 전쟁의 영향을 그렇게 받지 않아서 식료품을 구하기 쉬웠을 당시 서양식으로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침밥은 빵과 커피로 고정되어 아빠는 매일 아침 사각형 목제 상자에 커피콩을 넣고서 금속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원두를 갈았다. 서걱서걱서걱! 커피의 향이 퍼져나왔다. 빵도 센조쿠역 앞에 있는 빵집에서 매일 아침 배달해주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이 조금 딱딱하고 엉덩이처럼 생긴 둥근 프랑스빵이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가족 전원이 모이는 저녁 식사 때엔 고기 요리가 나왔다. 아빠가 소고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엄마는 프라이팬에 굽기도 하고 석쇠에 굽기도 하면서 같은 요리가 되지 않도록 연구를 하셨다. 평범한 집이라면 구운 생선이나 생선조림을 먹었겠지만 토토는 아빠 덕분에 언제나 맛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엄마와 토토의 두 살 아래 동생은 생선파였지만.

아빠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신교향악단(현재의 NHK 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를 맡고 있으셨다. 러시아 출신 명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에서 따와 "일본의 하이페츠"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정기 콘서트 외에도 지방 공연, 레코드 녹음 연주까지 매일을 바쁘게 보내셨다. "일본 제일의 연주가"라는 칭호를 받았던 적도 있다.

아빠와 엄마의 인연을 이어준 것이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토토는 무척 놀랐다.

어느 연말, 아빠는 오케스트라 동료들과 히비야공회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공연장을 꽉 채우기 위해선 표를 팔아야 했고 제9번이 여기에 알맞은 곡이었기 때문이다. 제9번의 뒷부분에는 "환희의 노래"라는 코러스가 있기 때문에 음악학교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데다가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표를 팔아주었기 때문에 히비야공회당을 손쉽게 채울 수 있었다.

그 코러스 담당 학생들 중에 토우요우음악학교(현재의 토쿄음악대학교)에 다니던 엄마가 있어서 아빠와 만나게 되었다.

그린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그린 베레모를 쓴 모습이 잘 어울렸다고 하는데 모두 엄마가 직접 뜨신 것이었다. 엄마는 무척 아름다웠기에 아빠는 한 눈에 반해버려 아빠가 사는 맨션 일 층에 있는 노기사카 클럽이라는 찻집에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 권유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아빠도 잘 생기셨고.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졌다가 전차도 버스도 모두 끊기고서야 정신을 차렸고 아빠는 노기사카 클럽 위에 있는 아빠의 방으로 엄마를 초대했다. 엄마는 당시 코우지마치에 있는 숙부님 집에서 신세를 지며 통학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봤자 다들 자고 있었을 시간이었기에 할 수 없이 아빠를 따라가게 되었다.

엄마는 그로부터 꽤 지난 훗날에도 이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스무 살이나 먹고서 아빠가 가자는대로 순순히 따라갔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원."이라고 하셨지만 엄마 입장에서도 오케스트라 콘서트 마스터에 잘 생기기까지 한 아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조금 기쁘게 받아들이셨는지도. 그건 그렇고 베토벤이 교향곡 제9번을 만들지 않았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일이 없었고 토토도 두 분의 아이가 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참 신기한 일들이 많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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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1. 23:28

난 지금도 셰퍼드가 걸어다니는 걸 보면 작은 목소리로 "로키!"라고 부르게 된다. 로키는 내가 어릴 적 같이 살았던 애완견이었으니 지금도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웃어버린다. 로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세계대전 당시 기운이 좋은 셰퍼드들은 군용견으로 삼기 위해 일본군이 끌고 갔다고 한다. 지금도 전쟁터에 끌려간 로키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난 <창가의 토토>라는 책에 토모에학원에 다녔던 초등학생 시절 있었던 일들을 썼다. 누군가는 코바야시 소우사쿠 교장 선생님의 교육방식을 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쓰게 된 것이었는데 기대도 않았던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면서 어린이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 그게 1981년 일이니 벌써 사십이 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난 "토토 짱"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촌장님이 마을 사람들을 모을 때 "XXXX 토토" "토토 XXXX"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어딘가의 작은 마을에서도 들은 말로 내 이름 같은 게 전해졌을 리 없을 텐데 왜 이러나 싶었더니 스와힐리어로 어린이를 "토토"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런 우연이!

난 어릴 적에 "테츠코"라는 이름을 잘 말할 수 없어서 "이름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테츠코"가 아니라 "토토!"라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들 "토토 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테츠코 짱"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아버지만은 어른이 다 되어가도록 날 "토토스케"라고 부르셨다. 혹시 아버지가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나조차 "토토"라는 이름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토토스케" 덕분에 "토토 짱"이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창가의 토토>는 내가 아오모리로 피난 가는 시점에서 끝나게 된다. 토쿄 대공습이 일어난 후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사십이 년 전에 썼던 책의 속편을 읽고 싶다는 목소리는 확실히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창가의 토토>보다 재밌는 걸 쓸 수 없다 싶었다. 내 인생에서 토모에학원 시절만큼 매일이 즐거웠던 때는 없었으니깐.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의 "그 이후"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면 써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되었다.

해보자! 라고 생각하기까지 무려 사십이 년이 걸려버렸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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