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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8.07 :: 속 창가의 토토 16
문화/책 2024. 8. 7. 22:58

배는 기뢰에 맞거나 하지 않고 아오모리에 도착했지만 토우호쿠선 플랫폼 또한 시장통이었다. 기차시간표도 엉망이라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았는데 스와노타이라 직행 기차는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야 될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어쩔 수 없구나. 모두들 지쳤을 테니 일단 역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오는 기차를 타자꾸나."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동안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왔다. 토토는 왠지 몰라도 이 기차에 꼭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이 기차 타요."

엄마는 즉각 "안 돼."라고 말했다. "이 기차는 시리우치까지밖에 가지 않는단다."

"시리우치까지 갈 수 있음 괜찮잖아요."

"이렇게 혼잡한데 시리우치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려다가 못 탈 수도 있잖니."

평소대로라면 엄마 말씀에 따랐을 토토지만 이 때만은 이 기차를 타고 한시라도 빨리 아오모리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리우치에서 걸어서 가도 그렇게 멀지 않아요."

토토는 그렇게 고집을 피우며 열차 승강구에 있는 철제 손잡이를 잡고서 "탈래, 탈래, 탈래!"라며 떼를 썼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토토에게 엄마도 손을 들며 기차를 타게 되었다.

시리우치에 도착했을 때엔 해도 거의 저물어 있었다. 스와노타이라로 향하는 기차는 언제나 올 수 있을런지 알 수 없는 체 시리우치역의 작은 대합실에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야 했다.

살짝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는데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7월 28일에 일어난 아오모리 대공습이었다. B-29기가 떨어뜨린 소이탄 수만 발이 아오모리에 있는 마을 곳곳에 떨어져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시가지 태반이 소실되었다. 만약 그 때 아오모리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면 토토네 가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도망을 다녔을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오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토토네는 시리우치에 도착한 순환선을 타고서 간신히 스와노타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엔 엄마의 야생의 감을 의지해온 토토가 어째 그 때만은 "이 기차를 타야만 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으로서도 신기할 따름이다.

 

채소시장의 추억

 

1945년 8월 15일. 그 날엔 아침부터 스와노타이라 역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어른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디오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알려준다나벼."

점심 즈음이 되자 어른들이 너도나도 스와노타이라역 근처로 모여들었다. 토토도 신경이 쓰여 채소시장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와중에 가게에 놓여져 있던 라디오를 둘러싸고 모여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숨을 죽이고 천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른들이 모여있는 곳 한구석에서 토토도 열심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방송이 끝나자 어른들은 모두들 "전쟁이 끝났다는구먼."이라고 했다. 근처에 있던 아저씨의 셔츠를 잡아당기며 "전쟁이 끝났다니 정말이에요?"라고 물어보자 아저씨는 다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엄마에게 알려야겠다 생각했지만 농협에서 일하고 있으실 시간이었다. 정말 전쟁이 끝났다는 건지 어쩐다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누마하타 아저씨 댁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달리고 달려 아저씨 댁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아저씨, 전쟁이 끝난 거예요?"

라고 여쭤보자

"그려, 끝났데이..."

라고 답해주셨다.

토토는 안심했다. 기쁘다기보단 안심했다는 말이 딱 맞았던 것 같다. 이제 공습을 당할 일도 없을 거고, 아빠가 돌아올 것이고, 토쿄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같은 걸 생각했더니 점점 기뻐졌다. 토토는 아저씨 댁에서 사과창고까지 들뜬 마음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났지만 토쿄엔 돌아갈 집이 없었다. 토토네는 사과창고에서 역 앞에 있는 연립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홍수가 일어나 강이 범람해 사과창고가 잠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집은 스와노타이라역과 꽤 가까웠고 채소시장과도 붙어있다시피했다. 학교에 다니기 쉬워진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스와노타이라 채소시장엔 먼 곳에서 물건을 사러 온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 첫 기차를 타고 왔다. 토쿄 방면에서 오는 사람도 있어서 어느 아침에 토토가 학교에 가려고 나왔더니 키가 작은 아저씨가 서있는 게 보였다. 채소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건가 했는데 왠지 토쿄 사람 같아 보였다.

"제가 저녁에 기차를 타고 돌아갈 건데 이 쌀로 밥을 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손에 쥔 마대 안에 쌀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토토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면서도 곧바로 엄마를 불러 "이 아저씨가 부탁할 게 있다나봐요."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스와노타이라역에서 그 아저씨가 커다란 상자를 지고 있는 게 보여 집에 돌아가 "엄마, 그 아저씨에게 밥 지어줬어요?"라고 여쭤보자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그랬단다."라고 말하셨다. 전쟁이 끝났어도 쌀은 아직 배급제로 돌아갔으며 바깥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엔 자신이 먹을 쌀을 반합에 넣고 가지고 다니며 일터 근처에서 밥을 짓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된 밥을 주먹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간 기후에 따라 썩어버리는 일도 있어서 소중한 쌀을 아껴 먹을 수 있도록 각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다음 날, 토토가 학교에 가려고 하자 연립주택 앞에 아저씨가 네다섯 명 서있었다.

"여기에서 밥을 지어주신다 들었습니다. 좀 부탁드립니다."

그 후 엄마는 농협 일과 병행해서 밥을 지어 주먹밥으로 만든 뒤 저녁에 대나무 껍질에 싸 건내는 봉사활동 같은 일을 시작하셨다.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으셨으니 할머니에게 밥 짓는 일을 부탁드리면 될 것 같았지만 할머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밥을 지어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토토는 어른인데도 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을 처음 봤다.

엄마께서 그런 할머니께 밥 짓는 방법을 가르쳐드리려 하지도 않고 시간을 쪼개가며 묵묵히 멀리서 물건을 사로 온 사람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셨다. "얼마인지요?"라고 사람들이 물어봐도 엄마는 "얼마예요."라고 답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오가지 않게 되면 "공양"이라는 명목으로 몇 푼 대가를 놓고 가곤 했다.

그런 일이 계속 되자 엄마가 결단을 내리셨다. 맡아둔 쌀을 밥으로 지어서 주먹밥을 만드는 봉사활동은 관두고 밥에 된장국이나 생선구이 등 반찬을 더해서 정식처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장사를 떠올리셨다.

 

"밥 짓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쓰인 종이를 문에 붙이시고 풍로, 냄비, 도마, 식칼, 식기 등을 조달해서 연립주택의 안마당을 식당처럼 차리셨다. 전쟁이 끝나자 채소시장이 점점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식사를 할 곳은 아직 부족했기에 엄마네 가게는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반찬으로 쓰인 생선은 매일 아침 하치노헤에서 오는 물건들 중 기운이 좋아보이는 걸 골라샀는데 엄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츠미나토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선 오래 쓸 수 있는 말린 오징어 등을 떼어 오셨다. 무츠미나토역 앞에는 이사바(五十集)라 불리는 생선을 다루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거 모여 시장 같은 기능을 하는 거리가 있었다.

토토도 엄마와 함께 가서 장보기를 돕기도 했다. 무츠미나토는 시리우치에서 하치노헤선을 타고 네 정거장을 가면 있었는데 타는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편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역에서 내리면 길 곳곳에 매대를 놓아두기만 한 곳에 다양한 생선과 조개와 건어물 등이 놓여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역 근처에 해산물이 주욱 늘어져 있는 그 거리는 무척 활기가 넘쳐 토토가 매우 좋아하는 곳이었다. 재밌었던 게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캇챠"라고 불리는 아주머니들 뿐이었다. 어부는 남자 일이라고 정해져 있었기에 밤중에 어선을 타고 아침엔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분류가 끝나면 그 후 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건 여자들의 차례가 되는 것이었다.

무츠미나토의 "이사바 캇챠"들은 모두 활기차고 친절했다. 어떤 생선이 제철이고 어떤 요리법이 좋은지 등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그런 시장 속에서 엄마가 "많이 샀으니깐 좀 깎아주세요."라고 말하시며 흥정을 벌이고 있는 걸 보니 "굳세지셨구나."라며 감탄스러웠다. 시장에서는 캇챠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가게에서는 토쿄 정보를 알아보며 엄마의 밥집은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는 첨단 장사를 벌이고 있었다.

 

1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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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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