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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샌가 엄마는 밥집 뿐 아니라 채소와 과일에서 해산물까지 식료품이라면 무엇이든 취급하는 행상인으로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돈을 바로 받는 장사다 보니 돈이 계속해서 쌓였는데 엄마에 의하면 밤중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할머니께서 지폐다발을 고무로 묶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크리스트교 신자는 돈 같은 건 하늘에 맡기는 것 아니었나?"
할머니가 돈을 세는 모습이 웃겨서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하시니 할머니는 웃으며
"돈도 고마운 존재 아니겠니."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할머니는 엄격한 크리스트교 신자이셨기에 "재물은 하늘에 맡겨라."를 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마저 "세속적인" 기쁨을 느끼게 하는 돈다발이란 대체 얼마나 두터운 존재였던 것일까?
채소시장 한편에서 연극 한마당이 열렸던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 봄이 되어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에 강을 건너는 다리가 침수되어 갈라져 버려 토우호쿠선이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큰 마을에 가기로 했던 예정이 취소되어 버린 유랑극단이 할 수 없이 스와노타이라에서 한 판 벌이기로 한 것이다.
타카라즈카극단에서 남자 역을 맡았던 미나토가와 미사요 씨라는 분이 좌장을 맡아 <유키노죠우 변화>라는 연극을 올렸다. 무대는 직접 만든데다가 객석은 아예 없어서 시장 바닥에서 대자리 같은 걸 깔고 보았지만 매일같이 관객들로 만원을 이뤘다. 토토도 친구와 함께 보거나 그냥 혼자 보기도 하면서 매일처럼 찾아가 맨 앞자리에서 성원을 보냈다.
토토는 <유키노죠우 변화>보다도 시작 전 관객몰이를 더 좋아했다. 하얀색과 갈색이 들어간 짝짝이 신발을 신은 아저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 긴자의 버드나무 아래서~"라는 가사가 담긴 <토쿄랩소디>라는 노래를 부르셨다.
긴자는 일 년에 한 번 아빠가 데려가주신 추억이 담긴 마을이다. 시세이도우파라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킨타로에서 장난감을 사고 니혼극장 지하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아저씨의 노래와 아코디언을 통해 되살아나곤 했다.
나, 긴자를 알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밀려와 토토는 애써 참았다. 함께 대자리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긴자가 보고 싶어." 같은 말을 했다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 아이를 배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참았다.
선로가 좀처럼 복구되지 못했고 짝짝이 신발을 신은 아저씨가 매일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를 불렀으며 토토도 매일 앞자리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에 빠져 친구와 함께 박수를 쳤다.
그런 어느 날, 토토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손님이 두 명 기다리고 있으셨다. 별일이네 하고 지켜보니 한 사람은 짝짝이 신발 아저씨였고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마른 여자로 낯이 익거나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분이 화장을 하지 않고 맨 얼굴을 하고 있는 <유키노죠 변화> 좌장이셨다.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가발을 쓰고 있는 모습 밖에 보지 못했으니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지, 테츠코가 연극에 한번 참가해 보는 게 어떻겠냐 물어보시네? 댁의 따님은 반드시 배우로서 성공할 겁니다. 맡겨만 주시면 미래의 좌장으로 만들어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데 어떻게 할래?"
어디를 어떻게 보신 건지 토토를 스카웃하러 오신 것이다. 순간적으로 "재밌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중학생인데다가 아빠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시고 있던 터라 상담을 할 수도 없으니 아쉽지만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토우호쿠선이 복구되어 유랑극단도 커다란 마을로 떠나갔다. 채소시장 창고는 허물어졌고 토토도 이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 좌장님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건 십이 년이나 지나서 아침 TV 방송 <오가와 히로시 쇼>에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란 코너에 출연 의뢰를 받게 되었을 때로 스태프 분께 그 때 만났던 좌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다녔던 토토를 좌장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권유해 주셨던 분을 다시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당일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송에 출연했지만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그 미나토가와 미사요 씨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으셨다. 대신에 남편 분과 스튜디오에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었는데 아직 건강하셨을 무렵 TV에 나오기 시작한 토토를 보자마자 "아, 이 아이야, 이 아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깐?"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고 한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던 토토에게 말을 걸어주시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 미나토가와 씨에게 감사인사를 한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지만 TV에 나오는 모습을 봐주셨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농협 일을 계속 해오셨고 밭일이나 재봉부터 친척 돕는 일까지 이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에 매진하셨다. 잠잘 틈도 없이 바쁘셨을 엄마가 언젠가부터 상태가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밤중에 어디론가 가시는 일이 늘어났다. 어디에서 어떻게 알아낸 건지 엄마께서 노래를 잘하신다는 평판이 돌면서 결혼식 연회 자리에 불려나가게 된 것이다.
음악학교 성악과 출신이시니 오페라 <아리아> 같은 걸 부르고 싶으셨겠지만 결혼식에선 "비단으로 짠 허리띠에서~"라는 가사가 들어간 <신부인형>을 부르며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한다. 그 외에도 <하마베의 노래>나 <달맞이꽃>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노래실력을 뽐내곤 하셔서 결혼식이 끝나면 모두들 "고마워요, 고마워요."라며 크게 기뻐해 돌아갈 때 손님용 선물을 잔뜩 안겨주었다.
엄마는 이 선물을 노리고 있었다. 과자 같은 것이 없다시피 했던 시대였으니 쌀가루를 달게 만든 미진코를 잉어 형태로 만든 분홍색 "미진코과자"를 선물로 주곤 했다. 토토와 동생들도 이 달콤한 잉어 과자를 무척 좋아했기에 엄마가 결혼식에서 돌아오자마자 잉어를 감싼 보자기를 재빨리 풀었다.
"우와~"
잉어의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토토와 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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