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2025. 1. 4. 15:29

꽤 나중 일이지만 코우란여학교 동창회지에서 토토는 이런 문장을 썼다.

"공부를 조금도 하지 않아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성적이 나빴던 저입니다만 최소한 교가 가사처럼 살아가겠다는 마음만큼은 항상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토토는 예배시간에 부른 찬송가뿐 아니라 "산 속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도"로 시작하는 코우란여학교 교가를 무척 좋아했다.

 

산 속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도

정원으로 옮기면 아름다워지니

시간과 장소는 세상의 천성이요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라는 가사가 학생들에게 일종의 슬로건처럼 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학교에 익숙해지면서 친구도 늘어나 방과후에 친구집에 들러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그럴 때에도 "장래엔 어떻게 할 거야?" "넌 어떻게 할 건데?"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경우가 많아 요즘 여자애들처럼 아이돌 이야기로 꺄악꺄악거리는 발랄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락거리가 적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말하면 그렇긴 하지만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라는 것을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토토도 "어떻게 하면 자신을 피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항상 멍하니 생각하곤 했다.

당시에 "자신을 피워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많은 여성들이 선택한 건 결혼이었다. 담임선생님이었던 아오키 시노부 선생님이 결혼으로 퇴직하게 되어 조례시간에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아오키 선생님은 결혼을 위해 교사 일을 그만두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토토는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라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다가 순사 아저씨에게 혼난 뒤로는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 때만큼은 다른 애들과 같이 우왕하고 소리를 높여 울었다.

담임 선생님 같은 멋진 분이 결혼을 했다. 교사 일을 계속 할 수 없으시다.

그래도 사람 눈을 신경쓰지 않고 울 수 있게 된 것도 토토를 비롯한 모두가 되찾을 수 있게 된 자유의 일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운다 한들 순사 아저씨에게 혼날 일은 더는 없었다.

 

실연

 

센조쿠교회에는 어릴 적부터 훗날 NHK 일로 바빠질 때 즈음까지 세어보면 약 이십 년 정도 신세를 졌다.

토토가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성탄 연극을 선보였다. 토토는 다소 조숙했기 때문에 예수님 역을 맡았는데 연습 중에 무릎을 끓고 양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에게 "먹으렴." 하고 종이를 입에 쑤셔넣었는데 양은 종이를 먹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폭력적이어선 못 써요!"라며 배역에서 강판당해버렸다.

토토가 양 역할을 맡게 되면서 지금까지 했던 예수님 역보다 훨씬 심심해지면서 새로이 예수님 역을 맡은 아이에게 "종이 먹을 테니깐 주세요, 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조용히 좀 못해요!"라며 결국 양 역할도 강판당했다.

세계대전 중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른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합창단에 들어가 등화관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해 현관이나 창가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따뜻한 설탕물이나 찐 고구마, 옥수수빵 같은 걸 받을 수 있었다. 설탕 같은 경우 분명 그날 밤을 위해 모으고 모아두었던 걸 주셨던 것일 것이다. 토토는 솔선해서 참가했다.

토토는 일 주일에 네 번이나 교회에 갔었다. 교회 사람들은 토토에게 친절했고 하숙하는 집이 센조쿠교회 근처였기 때문에 주일학교 외에도 화요일에 있는 신자집회, 수요일에 있는 기도회, 금요일에 있는 성서 공부회에도 출석했다.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찬송가 반주를 오르간으로 쳐주시는 분이 그만두게 되어 대신할 사람을 찾게 되었는데 이걸 알게 된 토토는 서둘러서 늙은 목사님과 직접 담판을 지었다.

"제가 하게 해주세요!"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늙은 목사님은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라며 웃으셨다.

토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토토가 그 때 젊고 잘 생긴 부목사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토는 오르간을 잘 친다고 말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칠 수는 있는 열의가 있는 오르간 연주자였다. 혹시 토토가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면 "다음 주일학교 찬송가는 몇 번 곡으로 할까요?"라며 부목사님에게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건넬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없을 때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토토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부목사님은 해군병학교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교회 옆 늙은 목사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토토는 교회 근처 엄마 친구 분 댁에서 하숙하고 있었으니 이런 점에서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교회에 가면 반드시 부목사님을 만났다. 키가 무척 컸고 테가 없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 눈이 무척 부드럽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잠버릇에 푸석푸석해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또한 매력적이었고 늙은 목사님을 대신해 하는 기도나 설교 등도 훌륭했다. 좋아하는 점을 꼽으라면 끝이 없었지만 토토는 그 중에도 특히 목소리를 좋아했다. 

부목사님을 보며 "멋지구나"라고 생각한 사람은 토토 외에도 많이 있었는데 신자 수가 꽤 늘어난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부목사님의 인솔 하에 함께 병에 걸린 신자 문안을 간 적도 있었는데 토토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도 부목사님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져 추위를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부목사님이 히로시마에 있는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고 그 충격에 놀랄 여유도 없이 교회에서 누군가가 퍼뜨린 말에 토토의 마음은 짓눌려 산산조각 났다.

"부목사님이 결혼을 한다네요!"

상대는 토토보다 훨씬 연상이고 아름다운 신자 분이었다. 그 분도 일 주일에 네 번은 교회에 왔으며 교회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토토는 경솔하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와, 어떡하지...

최소한 기념이 될 수 있는 물건이라도 드리고 싶어.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돈도 없었다.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여 하숙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 멀리서 무척 신기한 것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머쉬멜로우가 붙은 것처럼 새하얗고 푹신푹신해 보였다.

아름다워! 토토는 그 나뭇가지를 상자에 넣고서 리본으로 묶어 멋진 선물을 완성시켰다.

부목사님과 헤어지는 날에 토토는 토쿄역까지 배웅하러 달려왔다.

그 날 토토는 하얀 블라우스와 고블랭직 바지에 빨간 신발을 신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는 스와노타이라에서 일본군이 버린 낙하산을 배급받아 엄마께서 만들어주신 것이고 고블랭직은 원래 키타센조쿠 집에선 소파 천이었던 걸 피난 당시 보자기 대신 쓰고 스와노타이라에선 인테리어 재료로 썼던 걸 엄마께서 바지로 다시 만들어주신 것이었다.

빨간 신발은 토쿄에서 배급받은 하얀 운동화를 페인트집에 부탁해 빨갛게 만든 것이었다. 페인트집 아저씨는 "마르면 엄청 뻣뻣해질 텐데?"라고 했지만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영화에서 본 발레용 신발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빨간 신발을 만든 페인트는 아저씨의 걱정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쩍쩍 갈라졌다. 그래도 당시엔 빨간 신발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으니 토토에겐 자랑스러운 신발이었다.

작별선물을 담은 상자는 토쿄역에서 "우주에서 보내온 물건이에요."라며 농담조로 건넸다. 토토는 찢어져라 손을 흔들며 부목사님이 탄 기차를 교회 사람들과 함께 배웅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 <오가와 히로시 쇼>의 "첫사랑 이야기"라는 코너에 출연하게 되었다. 좌장님 때도 그렇고 이 방송에 많은 신세를 졌는데 이 때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지만 부목사님과 만날 수 있었다. 부목사님은 목사직을 그만두고 다시 자위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부목사님은 토토의 선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머쉬멜로우 같아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이 토토가 가장 싫어하는 사마귀의 알이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부목사님이 히로시마에 도착해 상자를 열어보니 부화한 사마귀 유충들이 와글와글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토토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키타센조쿠역 부근에 빨간 지붕을 얹은 새하얀 집이 완성되어 스와노타이라에서 돌아온 엄마와 할머니, 노리아키, 마리와 함께 다섯 가족이 살게 되었다. 빨간 지붕을 얹은 하얀 집은 무척 눈에 띄었다. 토토도 하숙집에서 이사를 하면서 다시금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어 기뻤다.

자, 남은 건 아빠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https://aglowfly.tistory.com/628

'문화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 창가의 토토 23  (0) 2025.01.06
속 창가의 토토 22  (0) 2025.01.05
속 창가의 토토 20  (0) 2025.01.04
속 창가의 토토 19  (0) 2024.12.29
속 창가의 토토 18  (0) 2024.12.28
posted by alone glowf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