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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렇게 쓰고 보니 인생은 재밌는 것이구나 싶어진다. 자기 아이에게 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많은 아동 대상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자기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유니세프 친선대사에 임명되어 전세계에 있는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전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양친이 없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안았을 때 혼자서 죽는 것보다는 나라도 안아주고 있는 편이 마음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선 뉴스 방송에서 사회자를 맡으면서 TV 드라마에 나오기도 했는데 술주정뱅이 역을 연기하고 있으려니 스태프 중 "정말 술 마신 거예요?"라고 물어본 사람도 있었지만 술을 마실 리가 있나. 하지만 자주 보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혹시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거나 하게 되면 나쁜 년이 뉴스 방송 사회 같은 걸 보고 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져 TV 드라마를 관두고 연극 무대에 집중하게 되었다.
"난, 백 살까지 살거야!"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으려니 오자와 쇼우이치 씨가 "그거 좋긴 한데 백 살이 되어서 "있잖아 그 때 말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누가 받아줄 사람이나 있겠어? 외로울 걸."이라고 하기에 우왕하고 울었었는데 이젠 그게 현실로 다가왔다.
오빠라 불렀던 아츠키 키요시 씨도 어머니라 불렀던 사와무라 사다코 씨도 돌아가셨다. 함께 노인 시설에 들어가자고 약속했던 야마오카 히사노 언니도 이케우치 쥰코 씨도 먼저 떠나버렸다. 에이 로쿠스케 씨가 "안 됐구먼. 예능계 가족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으니."라고 말해주셨지만 그 에이 씨도 떠나버리셨다.
오빠의 상태가 상당히 나빠졌던 걸 모르고 "같이 밥 먹어요."라며 전화를 했던 적이 있다. 아츠미 씨 전화에 부재중 메시지를 몇 번이고 넣어본 결과 드디어 만나게 되어선 "뭐야, 전화를 하면 받아 좀 달라고! 애인하고 온천 여행이라도 갔던 거야?"라며 내가 평소처럼 말하자 아츠미 씨는 크게 웃으며 모자를 벗고 머리에 난 땀을 손수건으로 닦은 뒤 다시금 크게 웃었다.
"어디도 안 갔어요, 아가씨."
"거짓말쟁이. 오빠는 너무 비밀주의자라고!"
그런 말을 주고 받으며 오빠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나중에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건데 그 즈음 병세가 상당히 악화되어 집에선 누워있는 모습 외엔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난 경솔한 말만 꺼냈을 뿐이니 이렇게 생각이 없을 수 있나 싶지만 평소와 다름이 없어 기뻤던 건지 땀을 닦으며 웃기만 하던 아츠미 씨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와무라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엔 매일처럼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러던 와중 야마다 요우지 씨가 전화를 걸어와 "아츠미 씨가 돌아가셨다는군요. 장례식도 마쳤고 이제야 매스컴 쪽에 발표를 한다네요. 매스컴을 통해서 아시기 전엔 알려드리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라고 알려주셨다. 야마다 씨의 친절한 태도는 기뻤지만 오빠의 죽음이 너무 슬펐다.
최근 들어서 친구였던 노기와 요우코 씨가 죽었던 것이 충격적이었다. NHK 동창생이며 아나운서와 극단원끼리 정말 사이가 좋아 옷가게에도 함께 가고 프랑스어를 같이 배우기도 했다. 툭하면 팩스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노기와 씨는 코이시카와 덴즈우인 근처에 살고 있어서 팩스 마지막에 "덴즈우인에서"라고 쓰고 나는 "노기자카에서"라고 썼다. 최근 딸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손이 노기와 씨와 쏙 닮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테츠코의 방>은 올해로 사십팔 년차를 맞이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퇴학당했던 내가 한 방송을 사십팔 년이나 할 수 있다니 정말 감사한 일로 그 <테츠코의 방>에서 배우 분들에게 세계대전 당시의 일을 빠짐없이 들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지금 들어보지 않으면 세계대전 동안 배우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잊혀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케베 료우 씨는 영화 스타가 되기 전에 육군 소위로서 샹하이에서 남부 지역으로 가는 운송선을 타고 이동하던 중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다. 배가 격침당해 태평양 한가운데를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꽤 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헤엄을 치고 있던 와중 부하 한 명이 파도를 헤치고 와선 "소위 님, 칼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군도를 보여줬다. 이케베 씨는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몸이 그것 때문에 가라앉을까봐 갑판에 버리고 왔던 건데 그걸 보고 눈물이 났죠."라며 "바다를 헤엄치는 와중이라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만."이라고 덧붙였다.
미나미 하루오 씨는 종전 직전 마주에서 체험한 소련군과의 전투를 이야기하셨다. 토치카 안에서 쏜 총알이 젊은 소련 병사에게 맞았는데 밤이 되자 토치카 안에서 조용히 머물고 있던 중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련 병사의 "마마, 마마"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결국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하는 미나미 씨의 말엔 설득력이 있었다.
아와야 노리코 씨는 위문공연차 항공대 기지에 갔었는데 노래를 하기 전에 상관이 "여기서 듣는 사람들 모두 특공대원이니 도중에 자리를 뜨거나 하는 실례가 있어도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와야 씨가 블루스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들떠서 듣고 있었지만 그러던 와중에 한 젊은 병사가 자리를 뜨면서 아와야 씨에게 경례를 하고 나갔다. "싱긋 웃으면서 저에게 경례를 하고 나가더군요. 눈물이 흘러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해주던 아와야 씨를 잊을 수 없다.
(이 때 일본군에서 특공대는 자폭공격에 이용되는 병사들을 뜻했다 -역자 주)
2022년 마지막 방송 초대손님은 언제나처럼 타모리 씨였다. "내년은 어떤 한 해가 되려나요?"라는 내 질문에 "글쎄요, (일본이)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라고 답했지만 그런 타모리 씨의 예상이 앞으로도 빗나가길 빌 뿐이다.
<테츠코의 방>이 보내온 사십팔 년간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물어온 사십팔 년간이기도 했다. 내가 체험한 전쟁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게 <속 창가의 토토>를 쓰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는 것도 이 후기에 써놓고 싶다.
최근 들어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등록되었다는 통지가 와 감사하게 생각했다. 문화공로자로도 뽑혔고 훈삼등 서보장까지 받았다. <테츠코의 방>은 이제 이 년만 더하면 오십 주년이 된다. 이전부터 곧잘 "오십 년 해보는 게 목표"라고 말했는데 최근 들어선 백 세까지 계속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까지 머리도 멀쩡히 있을 수 있다면 어머니가 되지는 못했어도 뭐 이 정도면 되었나? 하고 납득할 수 있을지도.
그 때가 되면 튼튼한 몸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빠와 엄마께 감사인사를 하고 있겠지.
나를 이해해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을 거야.
이거 정말 기대되네!
2023년 8월 쿠로야나기 테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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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걸 하나 꼽자면 NHK 아침 연속 TV소설 <외톨이 마유코>(1971년 4월~1972년 4월)를 중도사퇴하게 된 것이었다. NHK에는 그 해 10월부터 연기 공부를 위해 뉴욕에 갈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아침 드라마는 요즘과 달리 일 년을 잡고 방송했기에 절반만 출연하고 관두기로 약속을 했다.
양친 없이 커온 주인공 마유코가 고향인 아오모리에서 상경하여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를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로 마유코가 하숙을 하는 집의 가정부를 맡고 있는 타구치 케이가 토토의 배역이었다. 케이 아주머니는 "선원이었던 남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초등학교 오 학년생인 아들과 늙은 어머니를 돌봐오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급료를 받기 위해 상경해서 가정부가 된 중년여성"이란 인물설정을 가졌는데 케이 아주머니가 아오모리현 하치노헤 출신으로 되어있다는 걸 듣고서 깜짝 놀란 동시에 의욕이 가득찼다.
피난차 머물렀던 아오모리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 같은 건 괜찮았지만 지금까지 TV에서 연기해온 배역들은 도시를 누비는 아가씨 같은 캐릭터가 많았기 때문에 케이 아주머니의 캐릭터에 맞출 수 있도록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우선 처음으로 몸가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를 익혀보고자 했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라기보단 생활이 바빠 "신경을 쓸 수 없다"라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몸가짐에 대해 우둔한 표현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머리모양이 우선일 것이니 NHK의 토코야마 씨에게 짧은 머리에 파마롤을 꽂고선 대충 감은 듯한 가발을 부탁드렸다. 이마가 극단적으로 좁아보이도록 가발을 깊게 쓰고서 우유병 밑바닥 같은 도수 강한 안경을 걸치고 보라색에 가까운 빨간 볼터치에 챙모자를 눌러쓰니 얼굴 쪽 이미지가 거의 잡혔다.
얼굴 다음엔 옷차림.다소 구세대적인 느낌이 나는 옷을 찾아서 솜을 넣어 몸집을 키우자 그야말로 "신경을 쓰지 않는" 외견이 완성되었다. 허리 쪽을 집어보자 토쿄 전화번호부 정도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두꺼워져 있었다. 거울 앞에 서자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토토라고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처음 녹화하는 날에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마친 뒤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에 이 차림 그대로 NHK 식당에 가보니 마침 <외톨이 마유코> 감독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앉자 감독님은 흘끔 토토를 보더니 "네."하고 적당히 대답을 한 후 바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스기 료우타로우 씨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기 씨도 <외톨이 마유코>의 출연자였다.
"저기요."
토토가 한번 더 말을 걸었지만 감독님은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토토라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나.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저, 쿠로야나기인데요."
라고 큰소리로 말해보았다. 그러자 감독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토토 얼굴을 보고선
"정말이네!"
비둘기가 콩알탄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런 표정을 지으며 "전혀 몰랐어요."라고 말해주었다.
녹화 시작 후 방송이 나가기 전까지 이 개월 동안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토토가 케이 아주머니 모습을 하고 NHK 안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다들 아직 토토가 이런 분장을 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가는 곳마다 "잘못 들어온 아주머니" 취급을 받았다. 복도에서 인사를 해도 무시를 당하고 식당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평소 활짝 웃으며 받아주는 웨이터 분도 묵묵히 짤그랑 소리를 내며 두고갈 뿐. 화장실에서 줄을 서도 나중에 온 젊은 여자가 차례를 무시하고 새치기를 해버렸다. 동작이 느리고 요령이 없는 아주머니가 있으면 추월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인 듯하다.
토토는 무척 슬퍼졌다. 배역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애를 경험해 보는 건 곧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강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외톨이 마유코>는 대호평을 받았다. 4월에 방송이 시작되면서 "쿠로야나기 씨는 어떤 장면에 나왔던 거예요?"라는 질문이 NHK에 쇄도했다고 한다. 변신의 효과가 대단했다! 뉴욕 유학을 위해 타구치 케이 출연은 반 년 뿐이라고 약속했지만 NHK 측에선 마지막까지 나와줬으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다음 해에도 일본에 있게 되고 일본에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게 뻔했으니 정한대로 10월까지만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토토는 출국하기 전 아슬아슬한 날짜까지 출연을 이어갔고 "타구치 케이는 뉴욕에 있는 집의 가정부를 하러 미국에 갔다."는 결말이 맺어졌다.
뉴욕 유학을 가겠다고 엄마에게 밝혔더니 커다란 눈을 빛내며 "그거 좋네. 네 나이에 안 가면 언제 가보겠니?"라며 격려해 주셨다. 롯폰기 케이크집 언니가 "테츠코 씨를 TV에서 볼 수 없다니 너무 슬프네요."라고 말해 주어서 토토는 십팔 년 간 해온 것이 헛수고 같은 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NHK 식당에서 토토를 몰라봤던 감독님도 "테츠코 씨가 해볼만 한 거라고 생각해요. 재밌는 걸 가지고 돌아오실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라며 흔쾌히 배웅해 주었다.
1971년 10월, 출발하는 날.
"조심하렴."
아빠가 현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다소 쓸쓸해 하셨던 것 같다.
"여유 갖고 해."
동생인 마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토토는 그 때까지의 십팔 년간 줄곧 아침에 일어나면 그 날의 스케줄을 분 단위로 정해놓고 이에 따라 보냈다. "오늘은 무얼 할까?" 같은 걸 생각을 하며 아침을 맞이했던 적은 하루도 없었다. 일과도 동료와도 무척 많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다소 지쳐있었기도 했다. 마음 한편에서 전혀 다른 무언가를 흡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창조적이면서 항상 자극이 끊이지 않는 직업인데도 어째 반복이 이어지고 참신함을 찾기 힘든 매일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기차가 쭈욱 달려왔던 레일에서 조금 벗어나 차량기지로 복귀하는 선로로 들어가는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다 생각했다. 복귀 선로에서 가만히 멈춰있는 기차를 레일을 달리는 기차 쪽에서 보면 뒤쳐져 홀로 남겨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솔직히 쓸쓸하다거나 불안하다거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서둘러 달려갈 때엔 보이지 않았던 경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네다 공항에선 요시다 씨가 배웅하러 와주었다. 짐을 맡긴 뒤 탑승하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서 토토와 요시다 씨는 공항 라운지에서 차를 마셨다.
"야마오카 히사노 씨에게 "유학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더니 "잘 다녀와요. 모두들 가고 싶어도 가족이다 뭐다 해서 가지를 못하는데 당신이라도 내가 못 가는 걸 대신해서 가줘요."라고 말하셨어요. 사와무라 어머니는 "갔다오렴, 갖다와. 그래도 이 년이라니 좀 기네."라고 하셨고." (사와무라 사다코.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가 예능계의 어머니라 칭했던 배우 - 역자 주)
요시다 씨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줘서 토토는 기뻤다.
"사실,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좀더 자유로워져서 잔뜩 흡수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런 억지를 들어줘서 요시다 씨에게 정말 감사할 뿐이에요."
요시다 씨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었다.
비행기로 들어가는 동안 앞사람도 뒷사람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덱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팔을 커다랗게 휘두르며 배웅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별은 쓸쓸하다. 하지만 새로이 도착한 행선지에 마음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토토 가슴 속에 잊고 있었던 노래가 들려왔다.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출발하는 건 기뻐
안녕 잘 있어 잔뜩 말하며
힘차게 씩씩하게 출발하자
<얀보 닌보 톤보>에서 새끼 원숭이 세 마리가 모험을 하나 끝내고 나서 다음 여행을 하러 떠날 때 토토와 주역 성우들 셋이서 스튜디오에서 불렀던 <출발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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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가쿠자에 다니며
현장에 임하면 임할수록 토토의 마음은 불안해져 갔다.
많은 방송에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본격적인 배우수업을 해보지는 못했다는 것이 컴플렉스처럼 느껴졌다. NHK에 합격했을 때도 양성소를 다니던 때에도 배우가 되고 싶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배우라는 직업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빠와 사이가 좋아져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토토로서도 어딘가에서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토토를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가씨 같은 연기를 하고 있으니 우선 이걸 어떻게 해봐야겠다 생각했다. NHK 같은 커다란 조직에 속해 있으면 잘 안된다 싶어도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지만 독립해 있는 배우가 해봐서 잘 안 될 경우 "아, 거기까지만"이라고 말할 것이다. 엄격한 정도가 확 바뀌는 것이다.
"컴플렉스를 극복해서 배우로서의 무기를 습득하고 싶어."
토토 안에서 이런 생각이 강해졌다.
NHK 양성소 시절에 분가쿠자의 무대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눈 앞에서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무대란 재밌는 거구나." 같은 감상문을 썼던 게 떠올라 분가쿠자의 연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이자와 선생님이 각본과 연출을 맡으신 <2호>라는 작품이었다.
분가쿠자에서 간판 중에서도 간판으로 꼽히는 스기무라 하루코 선생님의 연기를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무대경험이 풍부한 배우 분이 엄청난 연기 실력을 뽐내시는 모습은 TV 스튜디오에서도 보긴 했지만 무대에선 배우 분이 전신으로 연기하게 되는 만큼 TV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어딘가 극단에 들어가 확실히 공부를 한다면 연기를 더욱 잘하게 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토토는 스기무라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청했다.
"저, 분가쿠자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만."
토토가 말을 꺼내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꼭 와주세요. 제가 한 마디만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거예요."
스기무라 선생님은 여배우들을 엄하게 대하기로 유명한 분이셨는데도 토토에겐 이리 상냥하게 대해주신 건 스기무라 선생님이 아직 토토를 배우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거란 걸 알아차렸지만 토토는 '선생님이 서양 쪽 연극의 번역 버전을 나에게 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하며 큰 배를 탔다 생각하며 내부회의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스기무라 선생님이 전해오신 건 기대와 다소 다른 내용이었다.
"극단 이사회에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를 분가쿠자에 넣어달라 추천했는데 반대 의견을 비추신 분이 한 분 있었어요. 당신이 들어가면 분가쿠자의 분위기가 엉망이 될 거라네요. 하지만 마침 분가쿠자의 연극연구소가 만들어진 참이니 테츠코 씨가 거기에 들어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토토는 NHK 일을 하는 틈틈이 시간을 짜내서 시나노마치에 있는 분가쿠자 부속 연극연구소에 다니게 되었다. 에모리 토오루 씨와 동급생이었는데 에모리 씨는 당시 아직 열여덞 살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 1월에 분가쿠자 배우 대부분이 탈퇴하게 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퇴단한 사람들 대부분이 셰익스피어 희극을 번역해서 유명해진 후쿠다 츠네아리 씨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게키단쿠모"로 옮겨갔다.
배우가 부족해진 것 때문인지 연출가인 이누이 이치로우 씨가 "연극연구소가 아니라 분가쿠자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요청을 해오셨는데 그 때 함께 연기하고 싶다 생각했던 배우 분들이 죄다 새로운 극단으로 가버린 데다가 <꿈 속에서 만나요>나 <젊은 계절> 등 재미있다 생각했던 일을 잔뜩 안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토토는 "좀더 시간이 지나서 어딘가 극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분가쿠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이누이 씨에게 답했다. 그렇게 해서 토토는 연구생인 채로 연기 공부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당시 어느 금요일 스케줄을 떠올려 보니 이런 식이었다.
10시 반~14시 | 시나노마치 분가쿠자 부속 연극연구소 |
14시~16시 | 아오야마 국제 라디오 센터에서 <부 후 우> 녹음 |
19시~21시 | 타무라쵸 NHK 본관에서 <젊은 계절> 연습 |
20시~ 22시 | 동시에 진행된 <마법융단> 연습장에 달려가 참가 |
22시~다음날 2시 | 히비야공원 안 NHK 스튜디오에서 <꿈 속에서 만나요> 연습 |
여전히 "죽을 거예요"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죽지 않고 견뎌낸 것은 하나같이 내가 좋아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가쿠자에 다니기 시작했던 해부터 NHK 외의 일도 받기 시작했다.
처음 맡은 건 광고로 NHK 소속인데 광고에 출연해도 괜찮은 걸까 생각이 들어 예능국장님께 허가를 받으러 갔다.
"TV 광고를 하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무언가 서류를 바라보던 국장님이 황급히 고개를 들더니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토토를 바라보았다.
"엽전 받는 건가?"
NHK의 높은 분들은 어째서인지 돈을 "엽전"이라고 불렀다. 토토가 "받겠죠."라고 답하자
"뭐, 해봐. 그걸로 흥미를 가진 시청자들이 있으면 NHK 방송 봐줄지도 모르고."
의외로 간단히 OK를 받아서 토토는 CM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TBS 스튜디오라고 기억한다. 모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각본가인 무코우다 쿠니코 씨와 만나게 되었다. 다음회에 쓸 각본이 늦어져 스튜디오 건너편에서 쓰고 있는 걸 보며 딱 부러진 맛이 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며 바라봤던 게 무코우다 씨였다. 무코우다 씨는 TBS의 라디오 드라마 <모리시게의 중역독본>의 각본을 쓰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참이었다.
토쿄 올림픽이 끝났을 무렵 배우인 카토우 하루코 씨가 "놀러가지 않을래?"라고 하기에 무코우다 쿠니코 씨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하루코 씨는 무코우다 씨가 쓴 작품에 다수 출연하고 있었다.
무코우다 씨는 "카스미쵸우 맨션"에 살고 있었는데 카스미쵸우는 현재의 니시아자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목조 모르타르로 지어진 3층 건물 중 2층 "B-2"가 무코우다 씨 집이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일하는 책상 옆에 소파가 있어 샴고양이가 앉아있었으며 배가 고프면 부엌에 서서 냉장고에 남아있는 걸 착착 요리로 만들어냈다. 그런 무코우다 씨의 생활상은 아직 양친의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토토에겐 무척 자유롭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졌다.
토토는 무코우다 씨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당시 세타야에서 가족과 살고 있던 토토로선 시부야에 있는 NHK, 아카사카에 있는 TBS, 롯폰기에 있는 NET(현재의 테레비 아사히)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간이 생기면 찾아가기 쉬운 곳이었으며 무코우다 씨와 함께 있으면 왠지 무척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 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토가 뒹굴거리며 대본을 읽고 있으면 무코우다 씨는 쓱쓱 원고를 써내려갔다. 무코우다 씨는 원고를 늦게 제출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너무 빨리 주면 배우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하게 되니깐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생각을 한 다음 단번에 써내려가는 게 최선이야."라고 변명을 하곤 했다. 카스미쵸우는 당시에도 멋들어진 느낌이 드는 마을이었는데 "여자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지지."는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토토는 무코우다 씨의 존재에 의존했다. 항상 무코우다 씨가 곁에 있었기에 그런 바쁜 나날들을 달려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코우다 씨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뜬 후에야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토토가 무코우다 씨 집을 드나들게 된 시기는 카메라맨이었던 애인이 죽은 직후였다고 한다. 처음 갔을 때 어째서 "언제든 와도 좋아요."라는 말을 들었는가 의문이 들었었는데 토토가 하는 쓰잘데기 없는 수다가 무코우다 씨가 안고 있던 슬픔을 씻어준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양쪽 다 애인 이야기 같은 건 한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출발의 노래
토토는 NHK 전속 배우를 관두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계절> 때부터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왔던 모리 미츠코 씨에게 "누군가 좋은 매니저 좀 소개시켜 줄 수 없나요?"라고 상담하자 모리 씨가 "그럼 우리 사무소로 와요."라고 권유하셔서 모리 씨가 소속된 요시다 나오미 사무소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일은 순조로웠다.
무대 일이 많아지면서 1970년 테이코쿠극장 정월공연 <스칼렛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연출과 안무를 브로드웨이에서 <노 스트링스> 등 대인기 뮤지컬을 담당했던 조 레이튼 씨가 맡았다. 조 씨의 아내는 에블린 씨로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는 배우였지만 남편의 일을 돕는 편이 좋다며 배우 일에서 은퇴를 했다. 조 씨는 에블린 씨를 매우 신뢰해서 에블린 씨의 의견이 쇼 연출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정도였다.
에블린 씨가 연습장에서 조 씨와 함께 있을 때엔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한 마디도 않고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연습이 끝나면 근처 가게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 날 본 불만점들을 조 씨에게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조 씨는 그 말을 전부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다음날 연습 때 적용한다. 에블린 씨는 집에서 요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조 씨가 에블린 씨에게 반발을 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부부도 있을 수 있구나하고 토토는 감동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토토는 에블린 씨와 사이가 좋아진 후 어느 날 토토가 에블린 씨에게 "일을 당분간 쉴까 해요."라고 그 때까지 일본에서 일을 하며 느낀 불안점이나 컴플렉스를 토로했다. 그러자 에블린 씨는 곧바로 이렇게 답했다.
"그럼 뉴욕에서 연극학교를 다녀봐요. 뭐니뭐니 해도 메리 타사이 연극학교가 가장 좋죠. 브로드웨이에서 메리보다 뛰어난 선생님은 찾아볼 수 없을 걸요? 프로 배우만 가르쳐 줄 정도니깐요."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외국에서 연극을 배운다는 발상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에블린 씨도 바쁠 테고 공연이 끝나서 뉴욕에 돌아가면 이 정도 이야기는 금방 잊어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블린 씨가 추천했던 메리 타사이 선생님이 하늘색 국제우편을 보내오셨다.
"친애하는 테츠코 씨에게.
저는 아직 동양인 배우를 가르쳐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에블린 씨가 당신이 재능 있는 배우이며 뉴욕에서 연기를 배워보고 싶어했다고 하시기에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쯤 여기로 오실 수 있을지요? 제가 가르치는 교실은 가을부터 다음해 여름에 접어들 때까지로 기간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메리 타사이"
이 국제우편이 토토의 등을 밀어주었다. 편지를 받은 뒤 며칠 후에 토토는 마음을 먹고 매니저인 요시다 씨에게 "한두 해 정도 일을 쉬고 싶은데요."라고 말했다.
일만 놓고 본다면 "지금이 최전성기인데 어째서?"라고 생각할 만한 시기였다. "돌아왔을 때 맡을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리면 어쩌려고요?"라며 걱정해 주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토토가 한두 해 일본에서 떠나있는 정도로 잊혀질 존재였다면 자신의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라며 인정하고 포기하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요시다 씨가 "마음 먹은대로 쉬어 주세요!"라고 말해준 것이 정말 든든하게 느껴졌다. 요시다 씨는 몇 개월치는 더 예정되어 있었던 토토의 일을 정리해주시면서 둘 만의 비밀로 하기로 하고 준비까지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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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TV도 라디오도 주당 몇 개고 고정출연을 하는 곳이 있었고, 매일 다른 대본을 외우고, 연습을 해서 본방송에 들어가고, 그 틈틈이 회의도 해야 되고... 집으로 올 때엔 당연하다는 듯이 심야택시를 이용했고 침대에 누워서 세 시간만 있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그래도 누가 뭐래든 젊으니 이런 것 쯤이야 하고 무아지경 상태로 견뎌냈다.
당시의 황태자와 미치코 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무렵 드라마 본방송을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이명 현상이 일어났다. "키잉~"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상대방의 대사가 들리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토토는 친한 병원 원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용태를 설명했더니
"그대로 계속 일만 하고 있으면 죽을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 말에 펄쩍 뛰다시피 한 토토는 시간을 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생님께서 "과로가 심하네요. 곧장 입원해요."라고 말하시기에 토토는 NHK에 돌아가 감독님 등 관계자들에게 "입원을 해야 하니 쉬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예정을 갑자기 바꾸는 건 어려웠기에 "그럼 안 되는데."라든가 "다른 방송은 몰라도 이 쪽은 해줘요."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토토도 이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고 "내가 없으면 NHK가 망하려나?" 같은 농담을 하며 설렁설렁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토토는 그 때까지 건강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명 현상 정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 현상은 더더욱 심해졌다. 어떤 날 아침엔 일어나보니 양 무릎 아래에 직경 오 센티미터 정도 되는 붉은 꽃이 핀 것 같은 반점들이 상당수 보였다. 엄마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엄마도 평소와는 다르게 "바로 병원에 가렴"이라며 안절부절 못하셨다. "죽을 거예요"가 떠올랐다.
서둘러서 병원에 달려가 선생님께 진찰을 받았다.
과로는 여러가지 증상을 동반해 나타난다고 하는데 토토의 경우엔 이명 현상과 붉은 꽃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면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다리의 모세혈관이 약해진 것이다.
"일을 쉬고 입원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나을 거예요."
선생님 말씀대로 일 개월 동안 입원하기로 결정했지만 정했다 해서 방송 관계자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주는 건 아니었다. 고정출연 방송을 펑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답이 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쯤 되자 토토가 간절히 부탁드려본 결과 방송 관계자들도 "몸이 재산이니 치료에 전념하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출연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계절>을 봤을 때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이 TV 드라마에서 토토는 아츠미 키요시 씨가 연기하는 요리사의 아내 역할을 맡았다. 가게에 단골손님이 찾아와 "어라, 사모님은요?"라고 물어보자 아츠미 씨가 "잠깐 친정에 내려갔어."라고 답해주었다.
그런가. "친정에 내려갔어."라는 한 마디로 정리가 되는구나. 토토가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연기했던 배역이란 그 정도였던 건가.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친정 가는 길에 죽었어."가 되어버리려나...
사회를 맡았던 방송을 보니 더욱 슬펐다. 토토 대신 나온 분이 "쿠로야나기 씨는 병으로 인해 쉬게 되었습니다만, 한 달이 지나면 복귀하실 겁니다. 그 때까진 제가 대신해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면 토토도 병실에서 안심하며 지켜볼 수 있었겠지만 토토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안녕하세요"라며 방송을 바로 시작해 버렸다.
"이럴 수가 있어? 병원에서 확실하게 나은 다음 반드시 저기에 다시 설 테다!"
복귀를 향한 정열을 불태우게 되었다.
현장이란 비정한 곳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온정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현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입원하고 있던 한 달 동안 토토는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퇴원했을 때 토토는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셨다.
"좀처럼 듣기 힘든 질문이네요. 지금까지 그런 걸 물어본 사람은 아예 없었고요. 그래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토토는 그런 거야 간단하다는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즐거운 것들을 차례차례 입에 담아봤다.
"내일 연극을 보러가고, 모레엔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고, 그 다음날엔 영화관에 가고, 그 다음날엔 백화점에 가고..."
"누가 놀기만 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한 건 자기 스스로가 하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들을 골라서 해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병에 쉽게 걸리거나 하지 않아요. 하기 싫어, 너무 싫어라고 생각하면 이게 쌓이면서 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죠."
당시엔 아직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토토는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기 싫다고 생각되는 일은 받지 않도록 하고 자기가 맡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만 해왔다. 물론 TV 일도 연극 일도 즐거우니 계속해 온 것이다.
퇴원일을 맞이해 NHK 관계자들에게 "퇴원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모든 현장에서 "당장 돌아와주세요."란 답이 돌아왔다. "이제 당신이 있을 곳은 없어요."라고 하는 현장은 하나도 없었다.
오빠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은 매우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토토가 출연했던 방송을 몇 개 소개하자면 우선 <부 푸 우>가 있었는데 TV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인형극으로 1960년 9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육 년 이상에 걸쳐 방송되었다. 이것도 이이자와 선생님의 작품으로 아기돼지 삼형제가 주인공인데 투덜투덜대는 부, 의욕이 없는 후, 노력가인 우 중에서 토토는 막내인 우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1961년 4월부터 방송된 <마법융단>은 헬리콥터에서 공중 촬영을 하거나 영상 합성 기술을 구사했던 아동 대상 방송이었다. "아브라 카타브라!"라는 주문을 외우면 아랍풍 의상을 입은 토토와 터번을 두른 두 초등학생이 탄 마법융단이 그 아이들의 초등학교 상공까지 날아가는 방식을 이용해 호평을 받았다.
교정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인간문자를 만들어서 환영해 주기도 하는 등 아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토쿄 올림픽 중계를 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하다며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아 종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 년 넘게 이어온 인기방송이었던지라 지금도 가끔씩 "융단에 탔던 초등학생입니다."라며 모습이 완전히 영감님으로 변한 분들이 말을 걸어주시곤 한다.
성인 대상 방송도 많이 나오게 되어 1961년 4월부터 시작한 두 방송에 토토가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만나요>는 토요일 밤 열 시에 방송되어 오 년간 계속된 전설적인 음악 버라이어티 방송이었으며 <젊은 계절>은 긴자의 프랭탕이라는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지금은 대하드라마가 고정적으로 편성되어 있는 일요일 밤 여덞 시에 방송되었으며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도 사카모토 큐우도 죄다 출연해서 "스타가 마흔다섯 명이나 나오는 방송"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꿈 속에서 만나요>도 <젊은 계절>도 실시간 방송이었는데 대본은 이틀 전에야 나와서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하려면 지금으로선 절대 있을 수 없는 빡빡한 스케줄로 움직여야 했기에 수 년 동안 주말에 제대로 잔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많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할 수 있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젊은 계절> 대본이 지연되어 방송 당일에야 완성된 일이 있었다. 대본을 따로 인쇄할 틈도 없어 복사본을 돌렸는데 당시 복사본은 지금과 달리 진한 보라색으로 찍혀 나왔고 축축한데다가 가지고 있으면 식초 냄새가 풍겨왔다. 몇 부고 쌓여있는 탁상 아래엔 물방울이 떨어져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아츠미 키요시 씨와 만난 건 1960년 TV 드라마 <아버지의 계절> 스튜디오에서였다. "에노켄"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에노모토 켄이치 씨가 주연을 맡았으며 <젊은 계절>의 전신 격인 드라마로 아츠미 씨는 토토의 맞선 상대 역할로 도중참가를 하게 되었다.
아츠미 씨는 아사쿠사에 있는 프랑스자라는 스트립 극장에서 코미디언으로서 활약해온 일류 개그맨이었다. 프랑스자에서는 아즈마 하치로우 씨나 세키 케이로쿠 씨를 필두로 훗날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코미디언들이 즐비했으며 콩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 씨도 있었다.
"아사쿠사 극장에서 좌장을 맡으셨던 분이세요."
NHK 사람이 소개해 주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아츠미 씨는 작은 눈 안의 검은 자위를 휙 움직였다.
우와, 이렇게 눈초리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가 토토가 아츠미 씨에게 품은 첫 인상이었다. 어깨에 힘을 주며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온 아츠미 씨는 거기 있던 사람들 전원에게 경계심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아츠미 씨는 무척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연습이 시작되자 토토가 맞선을 봐서 결혼까지 갈 수 있는 상대방 역할로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가 끝나자 다시금 퉁명스러워졌지만 주 1회씩 연습과 본방송 촬영을 들어가니 이러면서 익숙해지겠거니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이래 몇 주가 흘러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토토가 뭔가 말하자 아츠미 씨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뭐야 이 년은!"
이라며 한층 위압을 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년"이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건 처음이라 심술을 부리거나 비꼬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담아 "이 년이라 하심은?"이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츠미 씨가
"아아, 됐다됐어. 이런 여자는 정말 싫다니깐."
이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사쿠사에서 고생하며 힘을 길러온 아츠미 씨가 보기에 종교 계열 여학교에서 음악학교를 거쳐 NHK 극단 소속으로 들어온 토토가 고생 따위 모르는 온실에서 자라난 아가씨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츠미 씨 자신도 NHK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음향 스태프로부터 "마이크가 망가지지 않게 조금 작은 목소리로"라고 주의를 받으면 "아사쿠사에선 얼마나 목소리가 큰가로 승부를 했단 말야."라며 분개했다. 토토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 녹음 일정 전에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골라서 이걸 선물해 보기로 했다.
"저기 이봐요. 세상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다고요. 이 자슥아 하고 외치기만 하지 말고 이런 책도 좀 읽어봐요."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를 내밀자 아츠미 씨는 잿빛 별 위에 금발 소년이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머뭇머뭇거리며 책을 받아들고서 "고마워"라고 부끄러운 듯 말을 꺼낸 뒤 현장을 떠났다.
아츠미 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사쿠사에 대한 것, 영화에 대한 것, NHK에 대한 것, 그리고 항상 모두 같이 가는 중화요리점 같은 것도.
아츠미 씨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해서 어느 새부턴가 아츠미 씨는 토토를 "아가씨"라고 불렀고 토토는 아츠미 씨를 "오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토토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오빠는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실력이 있는 녀석은 말야, 혼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도 사십 분이든 오십 분이든 계속 할 수 있단 말이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너덜너덜한 신문 같은 걸 안고 있는 아저씨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같은 걸 물어보고 하다가 확 분위기를 끌고 당기고 하면서 그런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게 좋은 배우, 능숙한 배우라고 다들 믿으면서 그런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안게 되는 눈물 같은 것도 있어. 대본 작가가 쓴 걸 이해하기 전에 우선 어떻게 자신을 내보일 것인가 다들 생각하게 되지. 하루 세 번 공연을 하는데 정월엔 하루에 여섯일곱 번으로 늘어나. 첫날부터 사흘 정도는 성의를 다해서 하지만 어느 정도 되면 모든 배역들이 할머니 가발을 쓰고 떼우려 하는 경우도 생기지. 그걸 저 녀석들 너무 엉터리네 하고 웃고 구르고 하지 손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빠와는 <꿈 속에서 만나요>와 <젊은 계절>에서도 함께 연기했다. 그 후 오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토라 씨"를 연기했으니깐.(<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에서 맡은 배역의 애칭으로 TV 드라마로 시작해서 영화만 마흔여덞 편을 찍어낸 장수 인기작이었다 - 역자 주) 오빠가 말해왔던 "실력이 있는 녀석"은 아츠미 키요시 자신을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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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인가요, 수컷인가요?
토토는 <홍백가합전> 사회를 맡게 되었다. NHK 전속배우가 된 지 오 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이야 국민적인 노래방송으로서 누구나 알고 있는 홍백가합전이지만 방송 초창기인 제1회 홍백가합전은 1951년 1월 3일 밤 여덞 시부터 방송된 한 시간 특별방송 수준이었고 가수는 홍팀 백팀 각각 일곱 명씩 출연했다. 아직 TV 방송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NHK 스튜디오에서 라디오로 실시간 방송되었다.
1953년 2월에 NHK TV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그 해 8월에 민방 TV 방송도 시작되었다. 노래 방송이 TV의 인기를 받쳐주는 든든한 기둥이었으니 NHK에서는 1954년 1월 제4회 홍백가합전 방송을 앞두고 "정월 홍백가합전을 라디오와 TV로 생중계하자"고 결의하며 커다란 홀을 빌리려 했다. 하지만 대극장은 어디든 인기가수의 정월 공연으로 예약이 꽉 차있는 상황이었기에 홍백가합전 일정을 어쩔 수 없이 연말로 변경하게 된 것이다.
1955년 이후로 한 해 마지막 날 밤엔 민방 방송국들도 극장 중계 방식 노래 방송을 밀어붙이게 되었고 인기가수들은 아직 홍백가합전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NHK와 민방 쪽의 실시간 방송 양 쪽에 일정을 잡고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시대에 1958년 제9회 홍백가합전이 열리게 되었다.
홍백가합전 사회는 토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크나큰 무대였다. "역대 최연소 사회자"로 주목받기도 했고. 하지만 노래방송이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애초 일에 치여 사느라 노래방송을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기에 얼굴과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가수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 토토가 사회를 맡을 수 있을까 불안한 생각만 들었지만 무대용 의상으로 준비된 금색 원피스를 주문제작품으로 받게 되었을 때엔 "만세!"라며 마음 속으로 춤을 추었다. 옷깃 부분을 상당히 벌려놓고 허리는 최대한 조이고 스커트는 풍선과 같이. 치맛단을 무릎 정도까지만 내려서 걷기 쉽도록 했다. 스테이지를 달려가거나 해도 괜찮아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해 홍백가합전은 개관 이 년째를 맞이한 신주쿠 코마극장에서 열렸다. 니혼테레비는 유우라쿠쵸우에 있는 니혼극장, KR테레비(현재의 TBS)는 히비야에 있는 토쿄 타카라즈카 극장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노래방송을 실시간 중계했다. 홍백가합전에 출연하는 가수들 상당수 어딘가의 방송에 출연한 다음 신주쿠 코마극장으로 달려오는 식으로 출연하는 식으로 다리를 걸쳐댔다.
그 때엔 "카미카제 택시"라는 단어가 유행을 탔는데 1955년 이후로 도로가 심하게 정체된 와중에 신호나 규정속도를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운전을 하는 택시를 일컬었던 말로 요즘이라면 유행어 대상에 올라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쓰였다.
민방 쪽 방송과 홍백가합전에 양다리를 걸치는 무시무시한 스케줄을 구사하는 가수들을 카미카제 택시에 빗대어 "카미카제 탤런트"라고 불렀다. 하지만 차로 이동하면서 신호를 무시하고 규정속도도 무시해선 목숨이 위태롭기에 이 시절엔 놀랍게도 유우라쿠쵸우나 히비야에서 신주쿠 카부키쵸우까지 오는 택시를 경찰차나 경찰 오토바이가 길을 열어서 가게 해주었다.
그게 말이 돼?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때엔 말이 된다고!였다.
"선서. 우리들은 아티스트 정신에 입각하여 정정당당히 적이 KO 당할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1958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 제9회 대회 출장선수대표, 쿠로야나기 테츠코"
홍백가합전이 토토의 선수선언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목소리는 아직도 NHK에 남아있다.
백팀은 오카모토 아츠오 씨를 선두타자로 하여 코사카 카즈야 씨, 미나미 하루오 씨, 프랭크 나가이 씨, 딕 미네 씨, 다크 덕 여러분, 카스가 하치로우 씨 등이 이어지면서 이 년 연속으로 미하시 미치야 씨가 대미를 장식하는 진영이었다.토우요우음악학교에서 동급생이었던 미우라 코우이치 씨도 있었다. 홍팀은 마츠시마 우타코 씨, 유키무라 이즈미 씨, 에리 치에미 씨, 코시지 후부키 씨, 페기 하야마 씨, 아와야 노리코 씨, 시마쿠라 치요코 씨가 출연했고 역시 이 년 연속으로 미소라 히바리 씨가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홍팀 백팀 각각 스물다섯이나 되는 가수가 모여 한 해의 마지막을 호화현란하게 물들이는 무대는 노래가 있고 응원전도 있으며 심사위원 선생님들도 참석해 이미 현재의 스타일의 원형을 거의 마련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홍백가합전과 매우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대본이 있어봤자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가수 중 누가 도착했는지 확인해서 사회자에게 실시간으로 지시를 해줄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가수가 탄 차에게 길을 터준 경찰차 사이렌이 스테이지 위에 있는 토토에게까지 들려오면 코마극장 주차장에 있던 스태프가 무대 쪽 스태프를 향해 커다란 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여자, 왔습니다!"
"이어서 남자가 왔습니다!"
모두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기 일쑤였다. 연말이라 길이 꽉 막혀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드디어 코마극장에 도착했다 한들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느라 막 도착한 가수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밖에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허둥지둥대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토토는 전반부터 커다란 실패를 벌이고 말았다. 마츠시마 우타코 씨를 "와타나베 하마코 씨입니다!"라고 소개해 버린 것이다.
당시 마이크는 스탠드 형식으로 스테이지 중앙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츠시마 씨는 곡의 인트로가 흐르면서 토토가 곡을 소개해 주는 동안 마이크를 향해 걸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노래가 시작하기 직전에야 마이크 앞에 서게 된 마츠시마 씨는 잘못 소개된 이름을 정정할 틈도 없이 노래를 불러야 했다.
"마츠시마 우타코 씨를 잘못 말한 거 마지막에 정정해줘!"
스태프가 이런 말을 하기에 노래가 끝날 즈음에 마이크를 향해서 "죄송합니다, 마츠시마 우타코 씨였습니다!"라고 외치며 머리를 숙였다.
이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물론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는 가수 분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는데도 토토가 바로 "앗!"하고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낸 건 샹송 가수 아와야 노리코 씨였다. 아와야 씨는 토우요우음악학교 출신으로 엄마와 토토의 선배이시기도 하다. 엄마와 무척 사이가 좋아서 집에 곧잘 놀러오기도 하셨다.
집에 놀러오실 때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홀연히 혼자 오시곤 했다. 테이블 위에 메이크업 도구를 펼쳐놓고선 "이 눈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밝힐 때다!" 같은 말을 하시며 몇 번이고 아이라인을 그리시고선 인조눈썹을 붙이셨다. 물론 홍백가합전에서는 메이크업도 굵직하게 해놓으셔서 토토도 "아와야 노리코 씨가 부르는 <장밋빛 인생>, 라비안 로즈입니다!"라고 침착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
백팀 사회는 타카하시 케이조우 씨였다. 케이조우 씨는 육 년 연속 백팀 사회를 맡아 위기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이지조차 않는 듯한 훌륭한 사회를 선보이셨다. 하지만 응원전 시간대가 되자 요즘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다음 차례에 부를 가수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케이조우 씨도 토토도 식은땀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무대에는 백팀을 응원하러 백호대 분장을 하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시간을 어떻게든 벌어야 되는데! 개가 무대에 같이 올라와 있는 걸 발견한 토토는 케이조우 씨가 사회를 보는 와중에 끼어들어 개에게 다가가선 개의 코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당신은 암컷인가요, 수컷인가요?"
개가 당황스러워 하는 듯 보였다.
"암컷이라면 홍팀을 응원해야 하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더니 극장 여기저기서 소리를 높여 웃었다.
계속해서 박장대소가 이어지는 와중에 "여자, 왔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크게 안심했다.
"개에게 성별을 물어보다니 너 배짱이 꽤 있구나?"
허둥지둥대다가 방송이 끝난 후에 NHK 예능국장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이후 홍백가합전 사회를 2015년 제66회 대회까지 총 여섯 번 맡게 되었다. 첫 번째 사회는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지만 홍팀의 승리로 끝났다. 토토는 이 때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삼아 그 이후 사회를 맡게 되었을 때 출연한 가수 모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다.
나카모리 아키나 씨가 처음 출연했을 때 긴장해서 몸이 굳어버린 채로 <금구>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노래가 끝나면 꼭 격려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까지 노래를 불러낸 나카모리 씨 어깨를 감싸주며 "무릎이 아프신데도 잘 참고 불러주셔서"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했을 때 나카모리 씨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의상에 신경을 쓰는 가수 분들의 마음을 알기에 노래를 소개할 때에 의상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 홍팀 가수 전원의 의상을 취재해 본 적도 있었다. 시마쿠라 치요코 씨가 <이 세상의 꽃>을 불렀을 때 이런 식으로 소개했다.
"이십칠 년 전에 대히트를 쳤던 곡을 홍백가합전에선 오늘 처음 부릅니다. 옷도 눈여겨 봐주세요. 1700년대 장인의 생활상이 옻칠과 금은색 실로 재봉되어 표현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꽃>. 시마쿠라 치요코 씨입니다."
그러자 옷자락에 새겨진 호화로운 자수를 카메라맨이 클로즈업하며 무언 속 연계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런 모험도 했다.
혹시 홍백가합전의 무대에서 수화를 보일 수 있을까? 토토가 수화로 이야기하면 그걸 아이들이 보아주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손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이런 생각을 한 토토는 홍백가합전에서 수화를 쓸 기회를 엿보았다.
토토는 <미국 농아극단>을 일본으로 초빙해 미국 수화를 일본 수화로 번역하며 함께 연극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경험을 살려 좀더 큰 방송에서 수화를 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TV에서 수화로 이야기를 하려면 토토만 크게 비춰져야 하는데다가 양손을 써야 하니 핸드 마이크가 아닌 스탠드 마이크를 세우고 해야만 했기에 이런 환경을 부여받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1980년 홍백가합전에서 리허설을 할 때에 세 시간에 가까운 실시간 방송을 해야하는 와중에 딱 한번 그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토는 전일본 농아연맹 관계자로부터 배운 수화를 대사에 맞춰서 준비했고 운 좋게도 그 타이밍을 담당한 카메라맨이 옛날부터 잘 알고 지낸 분이었기에 "이걸 하고 싶으니깐 부탁해."라고 귀띔을 하고 본방송을 준비했다.
백팀의 사다 마사시 씨 노래가 끝난 뒤 토토는 스탠드 마이크 앞에 서서 손바닥을 가슴 앞에 댔다.
"오늘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분들이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향을 떠나 그리고 가족과 헤어져 홀로 보시는 분도 있으시겠죠. 하지만 열심히 노래하시는 가수 분들의 모습을 보며 마지막까지 응원해 주신다면 우린 함께 할 수 있을 겁니다!"
토토는 말과 수화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삼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홍백가합전에서 최초로 청각장애를 가진 분들께 말로 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으며 이를 본 전국의 시청자들이 NHK에 "무척 좋았다."는 감상을 전달했다고 한다.
2022년 홍백가합전에서는 토토가 심사위원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칠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형광봉을 마이크인 줄 알고 잡고선 이야기를 하는 실태를 저지르고야 말았지만 그 때 옆에 앉아있었던 피규어 스케이트 선수 하뉴우 유즈루 씨가 토토에게 살며시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사회를 맡은 사쿠라이 쇼우 씨도 "많이 헷갈리시죠? 저도 곧잘 그래요."라며 거들어주셨다. 관객 분들에게 큰 웃음도 안겨주었고.
웃음에 싸인 NHK홀에서 토토는 무척 따뜻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실패를 개의치 않는 홍백가합전은 무척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다.
토토를 키워준 홍백가합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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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결혼
라디오 드라마 <얀보 닌보 톤보>는 전국 어린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 드라마의 대표작이 <당신의 이름은>이었다면 <얀보 닌보 톤보>는 명실상부 아동 대상 라디오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아 1954년 4월부터 반 년간을 예정하고 만들어졌던 것이 1957년 3월까지 연장될 정도였다. 얀보와 닌보의 목소리는 합격했던 분가쿠자 사람들이 연극 순회공연이나 출산 등의 이유로 계속할 수 없었기에 도중에 얀보 역은 사토미 쿄우코 씨, 닌보 역은 요코야마 미치요 씨로 교체되었다. 둘 다 NHK 극단 동기생들이었다.
그런데 첫 일 년 동안엔 흰 원숭이 새끼 세 마리의 목소리를 어른이 맡고 있다는 것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아나운서가 매주 방송이 끝날 때마다 이렇게 말해야 했다.
"이번 방송의 출연자는 얀보, 닌보, 톤보. 이야기꾼에는 나카오카 테루코..."
어째서 어른이 목소리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숨겨야 했는가에 대해 이이자와 선생님은 "어린이들의 꿈을 부수고 싶지 않아요. 트릭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죠."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당초 NHK는 아이 배역 목소리를 성인이 연기하는 방식에 반대했지만 이이자와 선생님은 여자 성우들이 아이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주장했다.
"아이들을 늦은 시간까지 스튜디오에 가두어 둬선 안 됩니다. 얀보 형제의 목소리를 성인 여성들이 맡게 해주시지 않겠다면 저는 이 일을 관두겠습니다."
대규모 오디션 개최도 이이자와 선생님의 강력한 일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요즘에야 영화 더빙이든 애니메이션이든 남자 아이 목소리를 대부분 성인 여성 성우가 맡고 있지만 이 당시엔 성인이 아이의 목소리를 연기한다는 것만으로 방송계의 상식이 뒤집힐 정도였다.
"얀보, 닌보, 톤보의 목소리 연기는 사실 아역 배우가 아니라 NHK 토쿄방송극단 소속 배우 삼인조가 맡고 있습니다."
NHK에서 이런 발표를 하게 된 건 방송이 시작한 뒤 일 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NHK는 "방송도 호평을 받고 있고 내년이 원숭이띠 해이고 하니 이걸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NHK의 계산이 맞아떨어지면서 얀보 역을 맡은 사토미 쿄우코 씨, 닌보 역을 맡은 요코야마 미치요 씨, 그리고 톤보 역을 맡은 토토에 신문과 잡지 취재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나란히 앉아 히비야공원에서 인터뷰를 받기도 했고 우에노 동물원에 끌려가기도 하고 카메라맨이 키타센조쿠 집까지 찾아와 토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주간 아사히>에 실린 세 명의 사진이 같이 들어간 기사엔 이런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라디오계엔 한때 "고키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고지라를 본딴 말로 뜻은 NHK 성우연구생(원문엔 이렇게 쓰였다) 제5기생이 엄청난 활약을 선보인다는 것으로 여기에 나온 세 아가씨가 그 "고키라"의 대표인 것이다.
세 아가씨는 자신의 이름보다도 이이자와 타타스 씨의 <얀보, 닌보, 톤보>로 유명하다. 이들의 존재가 이 방송을 통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고키라"의 특징은 TV와 관계가 있다. 대사 뿐 아니라 노래에 춤까지 요구되었다. 거기에 얼굴이 아름다운지 못 생겼는지도...
이들이 대사를 말할 때에도 원문의 장점을 잘 살려낸 신선한 느낌이 돋보여 요즘 들어선 개그맨에 가까워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원문의 장점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사토미 얀보 - 애칭 소요. 오 척 이 촌, 십이 관.
요코야마 닌보 - 애칭 요코. 오 척 삼 촌, 십이 관 오백.
쿠로야나기 톤보 - 애칭 챠쿠. 오 척 이 촌, 십이 관
이 기사에 "애칭 챠쿠"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건 수다쟁이 토토에게 자크(일본어로 챠쿠)를 채우겠다는 의미 같은 게 아니다. NHK 극단에 들어갔을 때 낭독 시험에서 토토는 아쿠타가와 류우노스케의 <갓파> 각본을 선택했다. 많은 갓파가 나오는 와중에 "챠쿠"라는 이름을 가진 갓파가 있었는데 "챠쿠챠쿠, 챠쿠챠쿠"라고 우는 것이 재밌어서 토토가 그걸 반복하게 되자 다들 토토를 "챠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기사에 "얼굴이 아름다운지 못 생겼는지"라든가 "십이 관" 같이 지금 와서 읽어보면 상당히 화가 나는 문장이 들어갔지만 이런 기사가 날 정도로 매일같이 많은 언론에서 띄워주기 바빴었다.
사실 이 즈음에 토토는 태어난 이래 세 번째 맞선을 보게 되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뇌외과의로 "저는 결혼해도 괜찮겠다 생각합니다만."이라고 양친께 전하기까지 한 상태였다.
아빠는 토토가 NHK에 들어가 연기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긴 했지만 솔직히 일을 하는 것보단 시집을 가서 퇴직하길 바라고 있으셨다. 당시엔 여자가 바깥에서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훨씬 일반적이었으니 그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아빠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결혼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옷을 맞춰줄 일도 거의 없어지겠구나."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시며 지유가오카에 있는 단골 옷가게에서 오버코트를 맞춰주셨다. 무려 네 벌이나. 그 중에도 분홍색 프린세스 라인 같은 꼭 맞는 실루엣에 옷깃에는 모피, 소매에는 검은 비로드가 곁들여진 옷이 토토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결국 결혼을 하진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생각하지만 연애를 해보지도 않고 결혼을 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간 엄마는 토토가 그 오버코트를 입고서 "다녀오겠습니다."라며 나가려고 할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 "결혼 사기꾼!"이라고 중얼거리셨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건 아니지만 결혼을 해서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 늦게까지 일을 하게 되면
"밤이 너무 깊었으니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며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프로 배우가 밤이 깊었으니 이만 가볼게요라니 뭔 소리예요? 어디 가려고요?"
"졸리니깐 집에 가서 자려고요."
NHK가 "TV 여배우 1호"로서 팔아볼까 해도 본인의 의식은 이런 수준이었다.
그래도 <얀보 닌보 톤보>가 대성공을 거둔 덕에 토토의 일이 급속히 늘어났다. 아동 대상 TV 방송에서 인형극 <치로링 마을과 밤나무> (1956년~1964년)의 땅콩 피코 역, 과학방송 <물음표 극장>(1957년~1961년)에선 사회를 맡은 물음표 언니 역, 대중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선 라디오 드라마 <잇쵸우메 일번지>(1957년~1964년)의 사에코 씨 역... 어떤 방송을 해도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토토는 바쁘면서도 즐겁게 일에 전념했다.
그런 와중이었다.
어느 연말 노래 방송에서 사회를 맡아줄 수 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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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보 닌보 톤보
"오디션을 본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토토와 친구들이 라디오 제2스튜디오에 달려들어가 보니 거기엔 동기생들 뿐만이 아니라 분가쿠자나 토토도 이름을 알고 있는 극단 배우들이나 개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등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이게?"
이건 <얀보 닌보 톤보>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목소리 출연자를 고르기 위한 오디션이었다. NHK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송을 제작하게 되어 처음으로 대형 오디션을 열기로 했다고 한다. "오디션"은 지금이야 누구든지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이 시기엔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던 단어였다.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길 수 있다니...!"
토토는 이 프레이즈가 마음에 들었다.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토토에게 어울리는 방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오디션은 토토를 위해 준비된 걸지도! 같은 생각까지 했다.
<얀보 닌보 톤보>는 세 마리 흰 원숭이 새끼들의 이야기다.
인도의 임금님이 중국 임금님에게 보내는 선물로서 배를 타고온 세 마리 흰 원숭이 새끼들이 중국을 누비며 고향인 인도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기까지를 그린 모험 이야기. 노래도 많이 들어간 즐겁고 꿈이 있는 드라마였다. 그 전까지의 라디오 드라마는 전쟁중인 상황을 설정한 이야기나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NHK는 이젠 밝고 긍정적인 방송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결심한 듯 보였다.
요즘엔 아이들 목소리를 성인인 성우가 연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아이 목소리는 진짜 아이들이 맡았기 때문에 NHK에선 이를 위해 토쿄방송아동극단이라는 극단까지 둘 정도였다. 하지만 <얀보 닌보 톤보>의 각본을 쓰신 극작가 선생님은 스튜디오에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이 들어가선 녹음하는 중간중간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있는데 악보를 받고 바로 이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건 아이들에게 무리라고 본 것도 이유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어른이어도 아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하기 위해 NHK 사상 처음으로 대형 오디션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오디션 자리에선 두 페이지 분량 정도 대사가 들어있는 대본과 노래 악보가 주어졌다. 얼굴을 보면 공평한 심사를 할 수 없으니 토토를 비롯한 응시생들과 시험관석 사이에 칸막이가 놓여졌다. 경력자가 많은지라 오디션 진행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어떡해. 나 악보 못 읽는단 말야."라며 혼란에 빠진 사람도 조금씩 보여서 토토가 조금이지만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음악학교에서 배웠던 게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톤보 대사를 읽어보세요."
토토의 차례가 되자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 톤보는 가장 나이가 어린 원숭이였으니 되도록 어린 남자아이가 내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얀보를 하기도 하고 닌보를 하기도 하고 하는 도중 역이 바뀌기도 했는데 토토는 다른 사람과 함께 대본을 읽게 되었을 때에도 "톤보 대사를 읽어보세요."라는 지시만 내려왔다.
오디션은 몇십 명이나 되는 응모자들이 조를 바꾸어가면서 진행되었다.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린 후엔 그 장소에서 결과를 기다릴 뿐. 모두들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넓은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십 분 정도 지나 담당자가 종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얀보 역부터 차례로 이름이 불렸다.
"얀보, 분가쿠자의 미야우치 쥰코 씨."
"닌보, 분가쿠자의 니시나카 마사치코 씨."
"톤보, NHK 극단의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
엥, 붙었어?
토토는 벌떡 일어섰다. 와글와글도 못하고 말 자체도 일본어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토토가 정말로 붙었다?
5기생들 모두가 달려와서 다들 "축하해!" "잘 됐네!"라며 말을 걸어왔지만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선발되신 세 분은 이 쪽으로."라고 하기에 따라가 극작가 선생님과 작곡 선생님을 소개받게 되니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선발해 주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려나...
언제나처럼 결국 강판당하면 어떡한담...
마음 속엔 기쁨보다 불안이 훨씬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분이 극작가이신 이이자와 타다스 선생님이십니다."
양복에 넥타이, 올백 머리를 하고 안경을 써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성이 소개되자 토토는 인사를 한 뒤 서둘러서 이런 말을 했다.
"저, 일본어를 이상하게 하니깐 고치겠습니다. 노래도 잘 못 부르니 공부하겠습니다. 개성도 누르겠습니다. 말투도 단정히 해서..."
그러자 이이자와 선생님이 안경 너머 눈을 가늘게 뜨더니 웃으면서 말하셨다.
"고치면 곤란하죠. 쿠로야나기 씨의 그 말투가 좋아서 뽑았는데.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괜찮으니깐 고치지 말아요. 그대로 말해주세요. 그게 쿠로야나기 씨의 개성이고 그걸 저희가 필요로 하는 겁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엥, 괜찮아?
정말 이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전까지 짙은 구름에 싸여 있던 마음 속이 확하고 갠 것처럼 느껴졌다. 배역에서 쫓겨나기만 하며 "돌아가도 좋아"라는 말만 들었던 토토가 처음으로 자신의 개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게 극단 선배로부터 "일본어가 이상해!"란 말을 들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만약 이이자와 선생님을 이 때 만나지 못했다면 토토는 NHK에 남아있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오오카 선생님도 오디션을 보던 곳에 찾아와 이렇게 말해주셨다.
"토토 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작곡가인 핫토리 타다시 선생님이 톤보 역은 이 사람이다,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네라고 말씀하셔서 톤보 역은 토토 님이 맡는 걸로 결정이 나다시피 했어요. 이이자와 선생님도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특징이 살아있는 목소리라고, 일본 방송극단을 다 둘러봐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었을 타입이라고 절찬하셨죠."
또한 이이자와 선생님이 처음으로 원폭피해 상황을 세계에 전했던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는 걸 알려주셨다. 아사히 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아사히 그래프>의 편집장을 맡았던 이이자와 선생님은 원폭투하가 일어난 직후 히로시마 사진을 숨겨놓고 있다가 연합군 사령부가 점령을 마쳤던 해(1952년)의 8월 6일호에 발표했다. 전세계 사람들이 처음으로 히로시마가 놓였던 상황과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아사히 그래프>를 통해 볼 수 있게 되면서 증쇄가 거듭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얀보 닌보 톤보> 오디션이 열린 해엔 이이자와 선생님이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라는 두 직업 중 하나에만 전념하기로 하면서 아사히 신문사를 그만두신 참이었다.
"무척 하이컬러한 분으로 겉보기엔 착하기만 해보이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강한 부분도 있는 분이세요."
오오오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토토 님의 데뷔 작품이 이이자와 선생님 작품이라 정말 기쁘군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씀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던 토토에게 "그대로 있어주세요." "괜찮아요!"라고 힘있게 말씀해 주신 이이자와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니.
이 말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와 겹쳐져 그 뒤로 펼쳐진 토토의 인생을 언제든지 받쳐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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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토토는 TV 스튜디오 밖에 있는 벤치에서 책을 읽으며 모두가 끝마치고 오길 기다렸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오오오카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선생님은 토토가 앉아있던 벤치에 미끄러지듯 앉으시면서 언제나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로
"토토 님, 오늘은 어떤 일을 맡았죠?"
라고 물어보시기에
"카사기 시즈코 씨의 TV 방송에서 와글와글 일을 맡았는데 전표 달아둘 테니 가보라는 말을 들었어요."
TV 방송에서의 와글와글 일은 지나가는 사람 같은 역할이다. 카사기 시즈코 씨가 상가 세트장 안에서 낙하산 스커트를 입고서 "오늘은 아침부터"로 시작하는 <장보기 부기>를 부를 때 토토는 그 뒤를 지나치는 역할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구먼"이라며 노래하는 카사기 씨를 바라보지 않도록 그래도 즐거운 듯이 슥 지나가야 했는데 토토는 길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즐겁겠네 하는 생각에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자 스튜디오 위에서 목소리가 내리쳤다.
"흘끔흘끔 보지마!"
토토는 생선가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정도는 보지 않나 반론을 하고 싶어졌다.
"쓱 지나가, 쓰윽."
토토의 옷을 비롯해 여러 요소가 눈에 띄는 점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토토는 들은 말 그대로 쓱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랬더니 다시 위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TV는 화면이 좁으니깐 그렇게 빨리 가면 어째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네."
토토는 천천히, 판토마임 배우 마르셀 마르소가 슬로모션을 하는 것처럼 걸어갔다.
"네가 닌자냐!"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가봐.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스튜디오에서 일어났던 일을 토토가 설명하자 오오오카 선생님은 그 이상 묻지 않고 위로를 해주지도 않으시며 "허, 허, 허"하고 웃으셨다.
"지금 토토 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며 토토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보시더니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토토는 양성소에 있을 때에도 "그만하면 됐어."라든가 "그런 개성은 드러내지 마!"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그렇기에 혼자서 동기생들을 기다리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럴 때에 위로가 되어준 건 항상 오오오카 선생님이었다. 어디에서 만나게 되든 하루에 몇 번이고 꼭 말을 걸어주셨다.
"토토 님, 어디로 가시나요?"
그 곳이 복도든, 엘리베이터 안이든, 화장실 앞이든 오오오카 선생님의 말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정식으로 NHK 극단원이 된 뒤에도 어디에서든 나타나 "토토 님,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물어보셨다. 오오오카 선생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날 바라봐주고 신경을 써주는 분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척 든든하고 힘을 주는 마법주문과 같은 선생님이었다.
그런 오오오카 선생님 덕분에 토토가 아무리 혼이 나고 배역에서 쫓겨나도 "이젠 틀렸어." 같은 자신의 무능력함에 절망감을 느끼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신인이고, 애시당초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 뿐이니깐."이라 생각하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생각을 너무 안했던 것 뿐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마음을 먹어도 여전히 토토에게 와글와글은 난관일 뿐이었다.
독본실에서의 눈물
그 날의 슬픔, 분함을 토토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디오의 와글와글 일이 끝나고 나서 제1스튜디오에서 나올 때에 극단 1기생 남자 선배가 불러세웠다. 같은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드라마 주연을 연기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독본실이 비었으니깐 거기로 가자."
선배는 퉁명스럽게 그런 말을 꺼낸 뒤 스튜디오 앞에 있는 독본실 문을 열고 터벅터벅 들어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선배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독본실은 텅 비었고 어두웠다.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약간 붉은 얼굴에 쓴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선배가 선 채로 토토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너 대사 말야, 그러고도 일본어냐?"
공포감을 느낀 것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토토가 예의바르게 물어봤다.
"제 일본어의 어떤 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어떤 점이고 자시고, 너무 이상하단 말야 죄다!"
토토로선 뭐라 답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토토의 말투가 지금까지 봐온 NHK 극단 사람들의 말투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말의 속도나 와글와글 때의 목소리 크기가 다르다는 정도 뿐이었다.
"너무 빨라!"라든가 "너무 커!" 같은 말을 연출가로부터 들은 적이 많긴 했다. 다른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말하는 법과 속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토토는 여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말투가 빠른데도 그대로 말해버리니 틀어져 버린 것이다. 목소리 크기도 마찬가지로 속닥속닥이라든가 시끌벅적 같은 말을 들어도 "나라면 이렇게 말할 텐데"란 생각에 사로잡혀 조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선배는 토토의 일본어 전부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카무라 메이코의 흉내라도 내는 거냐?"
고개를 숙인 토토를 향해서 선배가 추가타를 날렸다. 나카무라 메이코 씨는 세계대전 전부터 아역으로 활약하던 배우로 방송계를 잘 모르는 토토라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라디오에서 메이코 씨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TV에 같이 출연하게 된 것도 그로부터 좀 지난 후의 이야기였으니 메이코 씨가 어떤 말투를 가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를 들었다 한들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토토는 선배를 향해 외쳤다.
"흉내 같은 거, 낸 적 없어요!"
으스대고 있던 선배가 한 순간 쫄은 것처럼 보였다.
"내일까지 전부 고쳐서 오라고."
선배는 그 말을 내뱉은 뒤 난폭하게 문을 연 뒤 또각또각 소리를 울리며 독본실에서 나갔다.
여태까지도 여러 선배들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지만 "누군가의 흉내를 낸다."는 말을 들었던 것만큼은 토토로서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누군가의 흉내를 낸다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께서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라고 해주신 것이나 엄마께서 "솔직한 것 하나는 장점이지."라고 하신 것을 전부 부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토가 NHK 극단원이 된 뒤로 운 것은 그 전까지도 그 후로도 이 때 뿐이었다.
독본실의 콘크리트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토토는 혼자 울었다. 주먹이 저릿저릿해왔기에 이번엔 발로 벽을 쾅쾅 찼다. 마음 속 슬픔과 분함과 노여움 같은 감정들이 넘쳐나서 무언가에 쏟아내지 않으면 이것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새인가 해가 져서 독본실이 컴컴해졌고 공기도 차가워졌다. 동기생들도 다들 갔을 테니 울어서 부은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은 없을 것이다.
"흉내 같은 거, 낸 적 없어요!"
한번 더 입에 담아봤지만 토토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선배의 말에 충격을 받은 토토는 그 무렵 NHK에서 대형신작 아동 대상 라디오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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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4월, 토토와 동기생들은 드디어 NHK 전속 토쿄방송극단 제5기생으로서 정식채용되었다. 어머니가 될 예정이었던 토토가 이 날부터 배우가 된 것이다.
NHK 극단 신인들은 우선 "와글와글" 일을 맡는 게 순서였다. 와글와글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그 외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NHK 극단원이 된 토토와 5기생들이 본방송의 와글와글을 처음 맡게 되어 모두 함께 라디오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 곳은 놀랍게도 대인기를 누리는 라디오 드라마 <당신의 이름은> 녹음현장이었다. 당시 세상을 풍미하고 있었던 이 라디오 드라마는 매주 목요일 밤 여덞 시 반부터 방송되었다. 토쿄대공습이 있던 밤, 긴자 거리에서 생판 남이었던 마치코와 하루키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멜로 드라마로 방송시간만 되면 이걸 듣겠다고 목욕탕의 여탕이 텅 비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는데 주제가를 부른 것이 토우요우음악학교 시절에 성악을 가르쳐 주셨던 타카야나기 후타바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정말 깜짝 놀랐다.
"받으세요."라며 건네준 대본이 한 사람당 한 권씩. 하지만 대본에 와글와글 대사 같은 건 적혀져 있지 않아서 그 장면에 맞는 대사를 직접 만들어내고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인공인 마치코와 하루키가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근처를 지나던 남자가 쓰러진다. 라디오이니 그 부분에 "털썩"하는 효과음이 들어가고 마이크 근처에 있는 마치코와 하루키 담당 성우가 "어머?"라든가 "무슨 일이지?" 같은 말을 하면 그와 동시에 와글와글 역들이 목소리를 죽여 "무슨 일이에요?" "죽은 건가요?" "구급차를 불러야 되지 않겠어요?" 같은 말을 하면서 정말 사람이 쓰러졌다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이다.
처음 맡는 와글와글인지라 마치코와 하루키 역을 맡은 성우 분들도 참가해서 토토를 비롯한 5기생들과 함께 특별연습을 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연출가가 큐(연기 개시 신호)를 내면 5기생들은 팔십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역 두 사람을 둘러싸고 각자 생각해온 대사를 말했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에 있던 연출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혼자서 목소리가 너무 크네. 목소리를 좀 줄여서 다시 해봐."
그렇게 말한 뒤 다시금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낙하산 스커트 입은 아가씨?"
토토를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 말야, 혼자서 소리가 너무 커."
토토는 만약 자신이 길을 걷고 있는데 쓰러진 사람과 조우하면 어떤 말을 걸지 상상하고 대사를 말하는 법을 생각했다.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소리를 죽여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어볼 생각이 도통 들지 않아 커다란 목소리로 "무슨 일이세요!"라고 외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으니 그렇게 했는데.
"거기 말야, 다른 사람보다 조금... 아니다, 삼 미터 정도 떨어져."
아까는 팔십 센티미터였는데 거기에 삼 미터를 더하게 되니 모두들과 완전히 격리된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무슨 일이세요!"라고 외친 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니 음량을 조정하고 있던 믹스 담당자 분이 귀를 막고 펄쩍 뛰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거기에서 더 뒤로 물러나서, 문 근처에서 해봐!"
스튜디오 문을 가리키기에 토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동기생들과 십 미터 이상은 떨어지게 되어 토토는 "무슨 일이세요~~~!"라고 목소리를 쥐어짰다.
연출가가 와선 토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와글와글 담당이 큰 소리를 내면 라디오에서 그걸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특별한 역인가 보네, 나중에 다시 나오려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인상을 강하게 만들지 말고 와글와글이구나 하는 정도로, 그러니깐, 그 외 여러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다란 인상을 줘야... 아가씨, 오늘은 이걸로 됐어.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전표라는 건 극단원이 일을 하면 연출가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떤 스튜디오에서 어떤 방송에 출연했는지 써서 극단실에 걸어놓는 서류로 극단원이 여기에 사인을 한 뒤 서무실에 제출하면 서무 담당자가 시급 얼마로 계산해서 한 달 단위로 묶어 지불해 준다. 일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면 수입을 얻을 수 없기에 연출가가 그걸 신경써서 친절히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이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 토토의 출연료는 시간당 오십구 엔. NHK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급료가 상당히 박했다.
하지만 토토는 수입보다도 혼자서 돌아가게 된 것이 슬펐다.
토토는 스튜디오 바깥에 있는 벤치에서 동기생들이 일을 마치는 것을 기다렸다. 최소한 신바시역까지는 동기생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팥죽을 같이 먹자고 약속도 했고.
그 이후로 어떤 방송 어떤 연출가가 있는 스튜디오를 가도 와글와글 차례가 오면 토토는 정해진 순서처럼 이런 말을 들었다.
"아가씨, 돌아가도 좋아.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더 심한 경우엔
"어라? 와있었네. 돌아가도 돼.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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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한 목소리
"오늘은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합니다."
삼 개월에 걸친 양성기간이 종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오오오카 선생님이 싱글벙글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전원의 목소리를 한 명씩 차례대로 테이프 레코더에 녹음한 후 그걸 들어보는 것이다. 물론 이건 5기생 스물여덞 명에게 있어 태어나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TV 방송이 시작되었을 때 NHK 수신 계약 건수는 팔백육십육 건으로 5인 가족이 한 대를 같이 본다고 해도 일본에서 TV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사오천 명 밖에 되지 않는 꼴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믿기 힘든 수치였지만 그런 시대였으니 테이프 레코더 같은 것도 방송국 중 NHK 외에 가지고 있는 곳이 드물 정도로 무척 귀중한 기계였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토토와 동기생들은 매일 같이 드나들었던 관광호텔의 일본식 방에서 튀어나와 도로를 가로질러 NHK 제5스튜디오로 향했다. 이 스튜디오에 온 건 채용시험 이후 처음이었는데 그 때엔 노래를 부르는 시험이었지만 이번엔 대사를 녹음하게 되었다.
토토를 비롯한 여자들에게 오오오카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것은 남편의 태도에 지긋지긋해져 버린 측실이 남편을 힐문하는 장면에 담긴 대사로 단숨에 쏟아내듯 말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모두들 차례차례 녹음을 했는데 이런 경우 대체로 토토의 순번은 마지막으로 정해져 있다시피했다. 왜 그런가 하면 토토 차례만 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오오오카 선생님이 이걸 염두에 두고 전원이 돌아가며 과제를 할 때엔 모두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도록 짜놓으신 것이다.
전원 녹음을 마친 뒤 차례대로 재생을 하자 모두들 들을 때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드디어 토토의 차례가 되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
먼저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코울림이 나는 듯한 달달한 듯한 하지만 애정을 붙이기 힘든 신비한 느낌에 도저히 자신의 목소리라고 믿기 힘들었다. 토토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이거 기계가 망가진 것 같아요. 다시 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유리창 너머에 있던 믹스 담당자 분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계가 망가지거나 한 게 아닙니다. 이게 학생의 목소리예요."
토토는 혼란에 빠졌다.
"제 목소리는 이렇게 괴상하지 않아요. NHK 기계가 망가진 게 틀림없어요."
몇 번이고 그렇게 호소해 봤지만 믹스 담당자 분은 "이게 학생의 목소리예요."란 말만 했다.
이런 목소리로 어떻게 방송에 나가라고! 이런 목소리를 들었기에 오오오카 선생님이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 같다"는 말씀을 한 것이었나 생각하니 슬퍼져서 양성소 친구들과 오오오카 선생님과 믹스 담당자 분이 있는 앞에서 토토는 울어버렸다.
그러자 믹스 담당자 분이 아까보다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와 실제 목소리는 다르게 들리는 법이에요. 입과 머릿속에서 공명현상을 일으킨 소리가 자신의 귀에 전달되게 되는 법이니까요."
믹스 담당자 분이 친절하게 한번 더 토토의 목소리를 재생해 주었지만 그걸 들은 토토는 더욱 크게 울어버렸다.
"이런 목소리가 아냐. 이딴 괴상한 목소리가 아니라고."
그날 하루 종일 토토는 울기만 했다. 자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울어버려서야 분명 약간 명에 들어갈 수 없을 테니 모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양성소에 들어간 5기생 스물여덞 명은 순식간에 친해져서 <달걀모임>을 결성했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모든 수업이 끝났고 채용될 약간 명이 결정될 단계에 이르자 한 명이라도 NHK에 붙지 못하게 되면 붙은 사람 전원이 결속해서 "모두 채용해 주지 않으면 파업을 해버리자."라고 정하기도 했다. 삼 개월에 걸친 제1차 양성기간 최종일에 "꼭 하자" "반드시야"라고 맹세를 나누며 신바시역 앞에서 헤어졌다.
며칠 후 "합격"을 알리는 속달 우편이 도착했다! NHK에 다니기 시작한 뒤 삼 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꽤 많은 걸 경험했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 그 날을 보냈다. 물론 기뻤지만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토토가 TV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너무나 믿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 관광호텔에 합격자 열일곱 명이 모였다. "또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워."라고 기뻐할 새도 없이 일 년에 걸친 제2차 양성기간이 시작되었다.
합격통지가 우편으로 배달되었으니 파업 이야기 같은 건 완전히 흐지부지되어버렸다. 토토 안에선 몇 년이 지나도 "그 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감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합격하지 못한 약간 명의 사람들과 다시 만나거나 하지 못했다.
"토토 님!":
복도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오카 선생님이었다. 토토가 돌아보니 언제나처럼 가까이 다가온 오오오카 선생님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시며 이렇게 물어보셨다.
"당신은 왜 자기가 채용된 건지 알고 있나요?"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토토가 깜짝 놀라 "그런 거 모르는데요."라고 답하자 오오오카 선생님이 "허, 허, 허"라며 유쾌한 듯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감탄한 건 양성기간 중 토토 님만이 무지각, 무결석을 달성한 거였어요. 전 지금까지 1기생과 4기생도 담당했었는데 무지각, 무결석으로 참여한 건 토토 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는 건 멋진 일이죠. 하지만 당신의 시험 점수는 너무나도 나빴습니다. 그래도 시험관 선생님께서 "이만큼 연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이니만큼 TV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곧바르게 잡념을 가지지 않고 흡수하지 않을까요?"라고 하더군요. 비유하자면 기름종이 같은 것이죠. 손때가 묻지 않은 아이 한 명 정도는 채용해서 TV와 함께 시작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하고요. 이런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그야말로 무색투명! 그런 점이 좋았던 겁니다."
토토가 '엥? 무색투명하다니 뭔 소리야?'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언제나처럼 마술사처럼 오오오카 선생님이 토토 눈 앞에서 사라지셨다.
역시 성적이 나빴구나. 재능이 있다든가, 얼굴이 괜찮다든가 같은 걸로 채용될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좀더 극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무색투명하다니.
토토는 입을 헤벌린 채로 오오오카 선생님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토토 님, 어디로 가시나요?
제2차 양성기간에도 가장 앞자리가 토토의 지정석이었다.
선생님들의 진용이 더욱 두터워지면서 배우이자 연출가이신 아오야마 스기사쿠 선생님, 예술론을 담당한 이케다야 사부로우 선생님, 일본무용가이신 니시자키 미도리 선생님이 더해졌다.
아오야마 선생님은 출연하신 영화를 보기도 했고 하이유우자 극단 창설자로서도 유명했다. 그 아오야마 선생님께서 "좌장님"이라 불린 적이 있었다. 토토에게 어울린다고 하셨지만 토토로선 스와노타이라에서 만난 좌장님이 생각나 두근거렸다. 토토에게 좌장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어울리는 걸까?
아오야마 선생님은 수업 중에 메트로놈을 쓰곤 하셨다. 대사 간의 간격을 잡기 위해서였는데 메트로놈을 보고 있으려니 토토는 조건반사처럼 아빠의 바이올린 레슨을 떠올렸다. 음악에 쓰이는 건 알겠지만 대사는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좀더 감정에 따라 지도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탭댄스 담당인 오기노 선생님으로부터 일 주일에 세 번 NHK 수업을 마친 후에 개인 레슨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의 스텝 리듬을 "치리탄타치리타, 치리타치리치타"라고 입으로 따라하면서 배운 것이 토토가 탭댄스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게 된 비결이었다.
"컬러 TV 실험방송용 모델"이 된 적도 있었다. 들떠서 세타가야 키누토에 있는 NHK 연구소에 가보니 얼굴의 오른쪽 반은 보라색, 왼쪽 반은 흰색으로 칠해졌다.
"그대로 계속 카메라 앞에 앉아주세요."라고 말하기에 "최소한 분홍색으로 해주실 순 없을까요?"라고 부탁했지만 기술 담당 분이 "오늘은 보라색 실험날이어서요."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컬러 TV 모델이라기에 룰루랄라 왔던 토토는 얼룩말이 되어 하루 종일 카메라 앞에 앉아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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