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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5 :: 속 창가의 토토 22
카네타카 로즈 씨
토토는 코우란여학교에서 "라라물자"라는 걸 받았다. 라라는 Licensed Agencies for Relief in Asia의 머릿글자로 세계대전 후 당분간 미국 종교단체나 자선단체가 모은 식료품, 의약품, 학용품 등 구호물품이 일본에 보내진 것이었다. 이 물자는 옷이나 학용품 등이 벼룩시장처럼 늘어놓아져 있어서 각자 가지고 싶은 것을 입어보고 가져갈 수 있었다.
추운 계절이었기에 모두들 옷을 갖고 싶어했지만 토토는 학용품 중에 푹신해 보이는 토끼 인형이 놓여져 있는 걸 발견하자마자
"난 저게 좋아."
그 이후로 토토는 어디를 가든 간에 그 토끼 인형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토토는 이런 푹신한 감촉이나 반짝반짝거리고 팔랑팔랑거리는 그런 것에 굶주려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코우란에서는 언제나처럼 벼룩시장이 열려 학생들은 모두 인형을 만들어와야 했다. 토토는 피난 중에도 계속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은 곰인형을을 본따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작은 곰인형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가족이 입지 못하게 된 스웨터를 풀어서 어린이용 양말을 짜온 아이도 있었고 "먹거리가 있는 게 좋지 않나?"라며 고구마 경단을 만들어온 아이도 있었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인형 같은 것들이 팔리는 게 무척 기뻤고 그 중에도 고구마 경단은 인기가 너무 좋아 금방 매진되었다.
어느 졸업생이 보러 왔을 때 이 날 중 가장 큰 환호성이 울렸다.
카네타카 로즈 씨. 어떤 때엔 여행가, 어떤 때엔 저널리스트, 그리고 어떤 때엔 에세이 작가. 카네타카 로즈란 본명보다도 필명인 카네타카 카오루 쪽이 유명했던 걸로 기억한다. TV 방송 <카네타카 카오루 세계여행>으로 아는 분도 있으실 것이다. 방송은 1959년부터 삼십일 년에 걸쳐서 방문한 국가수만 해도 백오십 개국 이상. 리포터 겸 네래이션 겸 프로듀서로서 미지의 세계와 여행의 매력을 전해왔다.
"벼룩시장에 카네타카 로즈 씨가 보러 올 예정"이란 정보는 순식간에 퍼졌는데 로즈 씨가 코우란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고 물론 TV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이었기에 유명인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 화려한 모습은 모든 재학생들이 동경하기에 충분했다. 학생 중 누군가가 필름을 마구 인화했던 건지 어째 모두들 로즈 씨 사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토도 물론 가방 속에 놓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세상에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인상이 굵고 눈빛이 살아있는 사진이었다.
예정시간이 가까워지자 다들 구품불 문 근처로 몰려들어 사진을 손에 쥐고 언제 도착하나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려니 멀리서 키 큰 여성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카네타카 씨!"
"로즈 님!"
평소엔 얌전하던 상급생들이 볼에 홍조를 띄우며 있는 힘껏 이름을 외쳤다.
로즈 씨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존재감에 토토도 숨을 죽였다.
커다란 눈동자에 장미색 입술, 섬세하게 땋은 세 갈래 머리를 카츄샤처럼 묶은 헤어스타일. 양모 코트는 칼라 부분만 모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코트 아래엔 당당한 판타롱 수트. 그야말로 서양 남자에게 어울릴 듯한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론 코우란 선생님들이 "모피도 판타롱도 너무 화려합니다."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코우란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며 절 문을 통과하는 로즈 씨 뒤를 학생들이 뒤쫓았다. 뒤에서 신발 쪽을 보니 굽이 있는 구두가 살짝 보였다.
로즈 씨는 지참해 온 벼룩시장 물품을 마구 팔아댄 뒤 선생님들에게 계산을 부탁한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날 매상 넘버원은 로즈 씨였다. 계속해서 로즈 씨 사진을 찍는 상급생도 있었기에 토토가 "저한테도 인화해 주세요."라고 부탁한 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 뒤로 삼십 년 가까이 지나 카네타카 카오루 씨가 <테츠코의 방>에 출연하게 되었다. 벼룩시장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로즈 씨와 나눈 여행 추억담이 지금도 토토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토토는 쭈욱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을 여쭤보았다.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세계여행> 중에 아프리카 오지에 갔던 방송이 있었는데 촌장님이 매우 친근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표하는 방식이었던가요? 입 안에서 우물우물 씹던 걸 뱉어서 드세요라고 했더니 그걸 카네타카 씨가 바로..."
"촌장님으로선 어쩌면 먹지 않지 않을까? 아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마음이 다소 있었던 거겠죠. 그러니 그걸 제가 먹어야 안심하고 친구가 되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나중에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친선대사로서 세계 각지에 있는 병원과 난민캠프 등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죽음 근처까지 가있는 아이와 만났을 때 토토는 그 아이를 양팔을 모아 안아주었다. 일본과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코우란여학교 선배님이 건네주신 바통을 손에 쥐고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방과후의 두근거림
코우란을 다닌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 태어나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받았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가려고 역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쿄는 대단하구나 싶은 게 출발시간을 암기하지 않아도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십 분 내로 전차가 온다는 것이다. 피난 중엔 한번 기차를 놓쳤다간 다음 기차까지 두 시간은 기다려야 했으니깐.
이 날은 혼자였는데 플랫폼에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갑자기 학생복을 입은 낯선 중학생이 토토에게 달려왔다.
"저기..."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너무나 머뭇거리기에 토토가 명확한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무 말도 않고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토토가 그 봉투를 받자 또다시 아무 말도 않고 발을 돌려 맹렬히 대쉬. 너무 놀라 다섯 번 정도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와중에 그 중학생은 역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거, 연애편지라는 건가?"
집에 돌아와 조금 두근거리며 편지를 열어보았다. 봉투가 꽤 단단히 붙어있어서 어거지로 열었더니 봉투의 삼각형 부분이 찢어져 버렸지만 편지는 찢어지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편지지를 살며시 펼쳤다.
"막 삶아낸 고구마 같은 당신에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문장을 읽으며 토토의 두근거림은 열받음으로 바뀌었다.
잠깐만!
이게 정말 러브레터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막 삶아낸 고구마"는 아니잖아? 자신의 외모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좀더 로맨틱한 단어를 쓸 수 없나?
너무해! 토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뒷부분은 한 줄도 읽지 않고 박박 찢어서 버려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표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계대전 후 식량난이 계속되어 피난해 있었던 아오모리라면 모를까 토쿄에서 삶은 고구마라면 충분히 호화로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촉촉하고 달고 따뜻한 "막 삶은 고구마"란 그 중학생이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척 좋아하는 토토를 거기에 비유한 것이 그 학생에겐 최대의 찬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춘기로 돌입한 토토에게 거기까지 생각할 힘은 없었다.
그 중학생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글을 썼던 걸까? 학생복을 입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막 삶은 고구마"가 너무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다른 것을 몽땅 잊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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