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기사 2018. 8. 5. 15:53


러시아 경찰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위에 참가한 게이 인권 운동가 스물다섯 명을 체포했다. 토요일 오후, 인권 운동가 수십 명이 시위를 금지당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Palace 광장에 모였다. 이 시위를 조직한 사람들은 시청이 퍼레이드 요구를 거부한 것에 일인시위를 통해 항의하며 집회의 자유를 요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Alexander 기둥 앞에서 체포당해 주목을 받았던 한 남자는 무지개 깃발로 만들어진 현수막을 놓지 않으려 했다. 여기엔 "엄마도 날 사랑하고 아빠도 날 사랑하고 친구들도 날 사랑해. 왜 너는 못하겠다는 거지?"라고 적혀져 있었다. 경찰은 무지개 깃발을 흔들거나 현수막을 들고 있었던 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여 경찰버스에 실었다. 



경찰 세 명이 이 남자를 옮기고 있었을 당시 매우 낙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지개 현수막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인권 활동가 사이에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라이드 축제는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Brighton시 같은 경우 삼십만 명이 참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3년에 게이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러시아 경찰은 지난달에 영국 LGBT+ 운동가 Peter Tatchell 씨를 크렘린 근처에서 게이 인권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europe/russian-police-detain-arrest-lgbt-gay-rights-activists-pride-rally-st-petersburg-a8477466.html


전에 러시아 사람이 한국에서 흉악범죄를 저질러서 속지주의에 따라 한국에서 이를 사법절차로 넘기려 했는데 러시아 쪽에서 이 사람을 자기나라로 데려가서는 중형을 선고했다는 트윗을 본 적이 있다. 뭐만 하면 죽여버려야 한다는 말을 일삼는 누리꾼들 성향을 보면 뻔히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우 긍정적으로 쓰여져 있었다. 피해를 당한 나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결례인데 중형을 내렸으니 그걸로 잘 되었다... 무조건 중형만 내리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 믿는 사람들이 정말 솜방망이(?) 처벌만 내리는 나라로 가면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 하긴 한편으로는 거기에 가고 싶어 안달을 하지.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중형을 내렸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러시아는 이런 나라이다. 범죄자에게 중형을 내려버리는 것도 인권을 무시한 과정일 확률이 높다. 아니면 저런 사람들이 있는 걸 무시해도 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헌재에서 드디어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앞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나마 대체복무의 길을 열기 전에 나왔던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했던 말들 중에 대부분 병역 이행은 비양심이냐 같은 고리타분한 레퍼토리였지만 눈에 띈 게 저건 불법이다라는 것이었다. 법이 정해져 있으니깐 무조건 이에 반하는 행위도 이 행위를 옹호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럼 법이라면 이것이 잘못되었다 해도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것일까? 독재시절이 아니라고 해도 법은 잘못될 수 있고 여기에 항의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기에 이에 항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고. 아니면 국회에서 다수결로 결정되었으니 그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사에 나온 분들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불법(?)이다. 법은 엄연히 정해져 있고 거기에 따라 처분이 나왔는데 이에 항거하는 건 완전한 불법(?) 아닌가. 법을 무조건 준수하는 것이 무조건 옳은 일이라는 전제가 많은 사안에서 보이고 있다는 게 답답하다. 그 전제가 철저하게 이뤄져서 돈 있는 사람들만의 천국이 된 게 미국인데...

이런 걸 보면 볼수록 결국 사람들은 인권 같은 거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그냥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권인데 그 인권에게 나중에를 외치는 것을 부끄럽지 않아하는 나라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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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사람들이 전인류적 인류애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으며 너무 잘 보여서 싫어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들을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 사정에 맞춰서, 허위 사실을 마구 퍼뜨리면서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킨다면 과연 전자와 후자가 공존할 수 있을까? 메갈리아 등이 막 생겨났을 때에 마뜩잖아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결국 같이 살아가야할 사람들끼리인데 그게 아무리 옳다고 해도 상대방의 신경을 거스르는 식으로 진행을 하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상당수의 남자들이 그 의도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고 퍼뜨리고 있지만 그 의도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그걸 또 조롱하는 것은 (나는 이 말을 매우 싫어하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엔)소위 가르치려 든다라고 볼 수도 있다. 의도를 전하려 했으면 그 의도를 이해시키는 것 또한 전하는 자의 몫이다. 

물론 이 부분까지는 허위 사실이라든가 자기들 사정에 맞춘다든가하는 것은 소수의 경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런 현상이 심각화되었다. 평소에 봐왔던 비백인 외국 출신 노동자 혐오세력이라든가 이슬람교 혐오에 앞장서는 개신교 세력뿐만이 아니라 아랍 국가에서 성차별이 심각하며 이를 근거(?)로 난민들이 온갖 성범죄를 저지를 거라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면서 거대한 혐오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또다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것을 지적하며 극구 말려보려 했지만 거대한 혐오의 물결은 오히려 이에 더 반발을 하게 된다. 내가 댓글을 썼다는 이유로 몇몇이 내 블로그로 들어온 경로가 된 ‘여성혐오자 이슬람 난민을 추방하자’고 외치는 당신에게라는 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의 혐오주장만 연발할 뿐이지 딱히 이 글에 대한 피드백은 없다. 서로 벽을 쌓아놓고 대포만 쏘게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 지도 오래되긴 했지만 이렇게 벽이 높은 건가 싶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들과 연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건가 싶었다.

연대를 한다는 것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예멘 난민들을 공격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주장은 "예멘 남자들이 한국 여성을 강간할 것이다!"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전쟁과 총살의 위협을 피해서 다른 나라로 온 사람들이 어떤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지금까지 딱히 예멘 난민들이 어떤 사고를 저지른 사례가 없고 앞으로도 일어난다 한들 극소수일 것이다.(물론 그 극소수만으로 엄청난 난리가 날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이 가지만) 이런 상황에 있는 예멘 남자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적개심을 드러내는데 한국 남자들에 대해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시위에서도 남자들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난 사안이 사안인만큼 이런 방식을 존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본 사람들은 알다시피 참가할 수 있는 여자의 범위를 원래 가진 생물학적 성별에 한정시키면서 트랜스젠더 등의 소수자를 배제했고 여기에 LGBT가 반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게이 혐오 문제도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만 트랜스젠더 여성까지 배제를 당하면서 골이 더욱 깊어진 것 같다.(실제로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도 거기는 잘못된 페미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난민 남자들까지 자신들의 적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평범한 한국 남자들은 대체 무엇으로 보는 걸까? 인터넷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보이는 이상한 사례들이 정말 이상(異常)인 건가? 그냥 남자면 다 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오고보니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전같으면 자연스럽게 서명을 했을 성평등 관련 서명 링크를 누르는 것도 관련기사를 보는 것도 꺼리고 있다. 내가 왜 여기에 굳이 참여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걸 언젠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예멘 난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바뀌기는 커녕 오히려 토요일에 시위를 한다고 한다. 그것도 광화문광장에서... 부조리에 맞서서 촛불을 들었던 그 광장에서 이번엔 부조리를 위해 촛불을 드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걸까? 더군다나 광화문광장의 일부는 세월호광장이다.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지만 세월호 리본을 달고서 혐오시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면 더욱 끔찍하다.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 대해 반대시위를 한다해도 혐오시위에 비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인권이 대결양상으로 들어가버리면 100% 인권옹호 쪽이 밀려버린다. 인권은 감정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지만 반대 측은 감정에 모든 것을 싣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예멘 난민 혐오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에 질려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인권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감정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뿐 아닌가 하고. 이 감정을 다잡을 수 있다 해도 그건 상당히 뒤로 밀려날 것 같다.




*알고보니 광화문광장이 아니라 동화면세점이라고 하는데 재작년 겨울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거기까지도 다 촛불 들고 있었고 세월호광장 생각해 보면 거기가 더 가깝다. 핑계 같네...

** 세종로파출소 앞 https://t.co/Vx5fan9w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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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갔는데 영화 외에도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는 로힝야족의 난민 사태에 대해서이고 하나는 독일로 파견되었던 간호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다. 한국에선 독일로 파견되었던 선생님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선생님들 당신의 이야기로는 독일 파견 이야기야말로 하나의 기회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에 막상 왔을 때엔 교육 없이 바로 투입된 분도 있었고 환자의 수발을 일일이 다 들어야 하는 등(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에 잘 나와있다)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도 있고 고향 땅이 그리운 것도 있었겠지만 적응을 하고 보니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는 한국의 사회와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독일이었던 것이다. 번 돈으로 차도 직접 몰고 다닐 수 있었고(사우디 아라비아 이야기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노동절에 한복을 차려입고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을 할 수도 있었다.(지금 한국 간호사들이 노동운동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요즘엔 태움 같은 이야기가 많이 돌아서 완화되긴 했지만...)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독일에서 쫒겨나게 될 뻔했을 때에도 당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독일 정부에 맞섰고 그 결과 독일 영주권을 쟁취해내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레즈비언이었던 분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지금도 가족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털어놓았다가 관계가 파탄난 경우가 나오고 그런 결과가 나올까봐 두려워 숨기고 있는 LGBT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1960,1970년대면 말 다한 거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어거지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물론 그 때에도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같이 살았던 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극소수이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 오니 이런 것마저도 자유로웠던 것이다.

내가 어제 짜증을 냈던 획일적이고 왜곡된 역사관 강요의 폐해솔직히 그냥 맹목적 문재인 지지의 폐해...를 이런 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을 강조한 나머지 정작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정작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유리천정을 논하고 있는 판인데 그 당시 독일로 일을 하러 갈 수 있었던 선생님들을 불행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주의를 내세운 박정희식 생각은 이제 걷어치울 때가 지나도 너무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807447


영화 <공동정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어디까지나 폭도여야 하는 것처럼 구는 자칭 보수 쪽의 태도도 짜증나지만 어디까지나 불쌍한 피해자여야만 하는 것처럼 구는 자칭 진보 쪽의 태도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피해자"로만 보려 하다가 <공동정범>식의 카메라가 작동하자 동정 속에 숨기고 있었던 속내를 드러냈다는 게 참으로 아니꼬왔다.


이 때 어딘가에서 들려왔던 비명에 가까운 "에엑?"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누군가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도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자기 자신, 개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아무리 동정이라 한들 일방적이고 독선에 가까운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난 그런 것이 싫다.

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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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2018. 5. 7. 17:32


LGBT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당시에도 종로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실버영화관으로 바뀐 허리우드극장 옥상 같은 곳에서 눈 맞으면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같은 이야기... 홍석천 씨가 커밍아웃을 한 후에도 인식이 그다지 바뀌지 않았던 나에게 유일한 LGBT(중에서도 게이에 대해서만)에 대한 인식이 들어가 있던 곳이었다. 이런 종로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종로의 기적>이었다. 이 영화는 사실 <위켄즈>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오는 사람들과 시대상이 다를 뿐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를 중심으로 게이들의 시련과 저항, 연대 그리고 고양이를 담은 것은 같다. <종로의 기적> 확장판이 <위켄즈>라고 해야 되려나? 그러나 <위켄즈>는 다운로드판으로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종로의 기적>은 그렇지 못했고 내가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영화 개봉 후 몇 년이나 지나서였다. <종로의 기적>이 다운로드판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는 뻔하다. 이 내용이 다운로드판으로 돌게 될 경우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가족이나 지인들에게서 숨기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변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위켄즈>가 모자이크 같은 것 없이 다운로드판으로 공개된 것을 고무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로의 기적>이 만들어졌을 당시 LGBT들이 처했을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상도 이런 식이다.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소준문 감독의 이야기이다. 소준문 감독은 퀴어 영화를 주로 만드는 (대게의 경우 그렇지만) 게이 감독이다. 굳이 그냥 감독이 아닌 게이 감독이라고 하는 것은 소준문 감독이 무슨 영화를 만들 때마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다른 영화 제작진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다.(부딪히게가 맞으려나...) 작품만 제시하면 호의를 보이다가도 감독의 정체성을 안 순간 물러나는 사람들, 간신히 들어오게 하는 데에 성공을 해도 배경지식과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상충되면서 감독에 반발하는 사람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독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것에 부담을 느끼는 감독. 어디서나 자신의 입장을 남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부담되는 과정이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정체성도 정체성이거니와 이것을 꼭 이해시켜야 되는 건가하는 고민,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트러블에 고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런 갈등을 겪는 LGBT가 많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꼭 털어놔야 되는 건가 싶은데 그렇지 않을 경우 발목을 잡히게 되는 상황. 몇몇 대학의 총학생회장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것이 동력이 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이다.


일반적인 경우


이런 모순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인권조례를 없애려 눈에 불을 켠 사람들이 LGBT를 가로막고 대중의 인식이 고정되어 있는 한...

참고로 소준문 감독의 영화는 인디플러그에서 단편 세 개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데 모두 괜찮은 작품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게이 인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장병권 씨. 한의사로서 온갖 인권 운동에 뛰어드는 열정적인 활동가로 심지어 한진중공업에서 김진숙 씨가 고공시위를 할 때에 버스를 타고 가서는 경찰의 탄압에 항거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 ㅋㅋ; 처음부터 끝까지 인권운동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는데 전에 Askfm에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인권운동은 연대가 없으면 그냥 우리가 여기에 있다를 아무도 안 듣는 곳에서 외치고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인권운동 자체가 매우 작은 범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자극적인 운동을 한다한들 사람들이 봐주지 않으면 끽해야 뉴스 한 줄에서 끝난다.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장애인 운동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뭔가 아는 척해온 나도 잘 몰랐고 대중은 그저 잔인하게 외면하고 있다가 자기들(이 지지하는 정치가)에게 그 운동의 화살이 겨눠졌음을 알게 되면 잔인하게 공격한다. 연대를 해야 조금이라도 힘을 늘려낼 수 있는 것이다.



<런던 프라이드>(원제는 위와 같이 <Pride>)에서 나타내었던 영국의 LGBT와 노조의 연대와 같이 서로 간의 이해와 협동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이 커진다면 이걸 대놓고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친구사이 등이 만드는 연대가 더 굳건해진다면 이 영화의 모습이 더 확실해지지 않을까 물론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조차 보지 않고 억울하면 힘을 키워!식으로 윽박지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이 보이지만...


<위켄즈> 속 쌍용차 노동자들


세 번째는 최영수 씨 이야기인데 <위켄즈>에서 중심 이야기로 나왔던 지보이스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련된 합창이 목적이기 보다는 애초에 이루지 못할 목적... 함께 노래를 통해서 어울리는 것을 목적삼아 만들어진 모임. 이들 중에서도 최영수 씨는 특히 그런 지보이스 구성원들과의 정서적 연대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도 계속 혼자였다가 뒤늦게서야 여기에 합류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영수 씨의 정체성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옛날 짝사랑했던 (평범한 가족을 이룬)남자도 행사에 초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보는 도중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 분의 가명이 스파게티나였던 것이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마지막 부분 즈음이 되고 나니 사망한 것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면서 기억이 확실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전에 <위켄즈>를 보면서 이 분의 이야기가 나온 부분에 대한 의문을 가졌으나 언제나처럼 질문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중요한 이야기는 이미 <종로의 기적>에서 다 나왔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뭐 그랬다는 것이다. 1절만 하자.

자신이 소수에 속한다는 것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도 친구도 자신이 가진 비밀을 밝혀도 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고 실제로 밝혔다가 더 큰 고통을 안게 된 경우가 수두룩하게 나타난다. 그런 와중에 강제적으로 가지게 되긴 했어도 하나의 기둥 같이 여겼던 종교에서조차 자신을 이단아 취급하고 치유를 해야 된다며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면 이들이 겪어야 될 외로움은 더욱 짙어질 것이다. 인권단체에서 조속히 발견하고 여기에는 와도 괜찮다는 것을 알리는 등의 노력을 하고 품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회에서 이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외로움은 계속 짙어지기만 할 것이고 이 짙어짐의 끝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에이즈 감염인 인권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정욜 씨 이야기. 정욜 씨는 다른 에이즈 감염인과 친할뿐만이 아니라 애인이 에이즈 감염인이다...라고 쓰는 것 자체가 내 안의 인식도 뭐 딱히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병에 걸린 것이 죄는 아니다. 자기가 직접 몸 속에 그 병원균을 넣었다면 모를까 단순히 성관계를 했다는 것만으로, 오염된 주사바늘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수혈이 잘못되었다는 것만으로 그 병에 감염된 것을 어떻게 죄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것을 죄라고 여기며 동성애를 반대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인양 여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최근에 정말 여러 면에서 화제를 모았던 <120BPM>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세도 그렇다.(익스트림 무비에 올라왔던 캡처 사진을 올릴까 했는데 안 보이고 트위터 같은 곳에서 네이버 120bpm을 치면 잘 나온다. 마린 혼자서 저그 본진에 쳐들어가는 우를 범하지 말자. 다음도 평점 무너진 건 마찬가지지만) 피를 던지는 시위를 한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러지만 애시당초 가짜 피이다. 이 형들 너네보다 훨씬 똑똑해. 이런 것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뿐 결정적인 것은 병에 대한 혐오이다. 무조건적인 혐오만을 내세우니 이 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될지, 제약회사들의 욕심이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당사자나 그 주변의 소수들만 하게 되고 발전은 더디게 된다. 이러다 보니 에이즈 감염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군(群)인 게이들 사이에서도 거부감이 심한 듯하고 에이즈 감염인들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언제까지 외면하기만 할 것인가? 외면하기만 하는 것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예가 주사바늘 교체건일 것이다. 주로 마약을 사용하는 데에 쓰는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이 쓰는 주사바늘을 교체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에 대해 시민들이 에이즈 예방효과는 커녕 마약 사용만 조장할 것이라고 반대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마약 사용은 늘지 않고 에이즈 예방 효과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통계가 나오게 된다. 다들 혐오에만 집중해서 이런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그냥 제자리일 뿐이다.

종합해서 말하면 소수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포용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적은 어디까지나 기적일뿐 정말 사람들을 포용하려면 기반이 필요하다. 이 기반을 쌓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 당장의 사회에서는 이 기반에 관심이 없거나 아예 무너뜨리려 달려드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착시이길 바라지만 바랄뿐이고...) <종로의 기적>에서 <위켄즈>로 나아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너진 인권조례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다시 세운 뒤 그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기반에 동참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일반이면 정말 안 되는 거냐...


평점은 10점 만점에 10점. 그런데 아무리 높게 주고 추천을 해봤자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너무 없어서...


*이 영화가 다운로드판으로 나오지 못한 건 삽입된 노래의 저작권 문제 때문이 더 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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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것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 같은 곳에서만 이뤄지는 것이고 한국에 이런 개념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경각심을 가졌다. 이 때나 그 전에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동일한 개념인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니깐 한국에서 개인보다는 공동체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같은 대도시는 삭막한 사회, 시골은 정이 넘치는 공동체로 묘사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요즘 들어선 한국 시골도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엔 무리가 생겼는지 외국의 두메산골을 찾아다니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가끔씩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하는 때 외엔 TV를 안 봐서 정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대중문화가 당연하다시피 돌아다녔던 시절에 성장기를 거쳤으니 나도 개인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공동체주의가 더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상을 바꾸게 된 것이 장애인 문제였다. 


http://news1.kr/articles/?3271190

교육감도 소신대로 했다는 이유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


 가장 가까운 예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문제가 있다. 장애인들이 편하게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로 짓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구에 이미 있다!"를 논리를 내세운다. (그걸로 충분하면 뭣하러 반대를 무릅쓰고 짓는다고 생각하는지...) 이 대신 한방병원을 지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우는 것이 장애인이 다니는 것 자체가 자기 동네에 불이익이 된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원래 내가 인식해왔던 공동체주의라면 다른 사람이 불편함을 겪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설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반대한다면 타인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집단이기주의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집단이기주의는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옛날 공동체를 생각해 보면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그냥 방치하는 방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옛날이야 그런 동네 바보형이 한 동네에 한둘 있을까 말까했지만 도시가 생기면서 이런 바보형들(생각해 보면 이런 곳에 누나라는 단어는 없다. 옛날 바보누나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진다. 정신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이 모이는 시설도 마찬가지다. 그 곳은 혐오시설이 되고 이런 시설 하나 짓기 위해 장애인들의 가족들은 마음으로든 신체로든 무릎을 몇 번이고 꿇어야 한다. 시설이 지어지지 않는 것만의 문제로 보기도 힘들다. 그냥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근처에 장애인이 앉아 있을 확률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만큼 장애인들은 집단 앞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오아시스> <Wonder>


비장애인을 돌아봐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여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면 가정 내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강요당해 왔지만 이게 사회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된다. 동네에서 잔치가 열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잔치를 준비하는 모습에 남자가 들어갈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들어가지지 않는다. 어떤 걸 설치하거나 하는 일은 남자가 해도 힘은 덜 들어가지만 그에 비해 시간은 상당히 긴 준비와 뒷정리들은 모두 여자가 맡고 있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된다. 실제로 지금도 그런 식인 것 같고.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 여자들의 희생이 강요된다면 그것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같은 일부 힘이 있는 사람들의 친목회에 다수의 힘이 없는 사람들이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여자들이 불이익을 넘어서 성적으로 위협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미투 운동으로 알리기 시작하자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지금도 이런 개판 오 분 전 상황인데 옛날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만 그 이상도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마을을 위해서 남편과 사별한 여자에게 목숨을 끊게 하여 열녀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꽤나 신빙성 있게 들린다. 아니면 독수공방하게 된 여자를 위해서 보쌈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여자 개인의 삶은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남성 위주의 집단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나 진배없다.


손목을 비틀비틀


LGB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혐오 세력에 대해서 이건 차별이다를 계속 외치니 기껏 한다는 말이 "내 눈에 띄지 말라"였다. 그런 말이나 지껄이는 모습을 보는 내 눈은 어쩌고...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동성애자이건 자기의 몸과 마음이 품고 있는 성이 다르건 간에 기존의 관습에 따라 결혼을 하게 되고 그것을 마을의 경사처럼 여기는 것이 옛날의 공동체였다. 옛날 기록에도 동성애 관련 기록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에 불과할뿐 그것을 존중하는 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힘이 없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공동체를 좋게만 볼 수 있을까? 이것이 좀 더 나가게 되면 국가주의가 되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고 일부의 마음에 드는 사고방식에 반하는 사상은 배척당하는 세상. 한국식 민주주의를 외쳐도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던 세상. 자기들의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생활을 가지고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세상.

이렇기에 개인주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 존재를 인정하기 위한 개인주의인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본 결과 얼핏 보기엔 효율적으로 생각되는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끄는 방식이 많은 사람이 이끄는 방식보다 뒤쳐지는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이 과정이 지난해 보일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끌고 갈 때에 보이지 않았던 측면을 여러 사람이 끌고 갈 때에 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악인 것처럼 말을 해왔지만 내가 짚는 것은 공동체를 가장한 일부의 권위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이다. 이런 것을 내포하고 있는 허상의 공동체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일개 개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개개인이 같이 이뤄내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서로의 개성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나중에로 억누르는 한 이러한 진보는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같은 선상으로 놓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정말 제대로 된 개인주의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의 행복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타주의이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말해왔듯이 집단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대로 된 공동체의 화합을 만들려면 이러한 이기주의를 다수의 합의에 의해 억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로선 이런 면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 아리송한 면이 있지만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발전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을 틈틈이 해봤는데 막상 글로 옮기니 갈수록 중구난방이 되는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활용하느냐이지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념의 작용을 풀어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귀찮은 일이기에 결국 개념 자체에 원죄를 뒤집어씌우는 오류를 흔히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일고 있는 개헌 바람도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꾼다 한들 좋은 방향으로 바뀔 확률이 높은 건지 알 수 없는 대통령 임기와 의원내각제를 서로 당리당략에 맞추어서 싸우고 있을 뿐이지 정말 원래의 헌법이 그렇게 잘못된 건지, 법률로 정하면 될 일들까지 시시콜콜 개헌에 맞추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바꿔버리면 나중에 아베나 시진핑 같은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차라리 엎어지는 게 답인 건지도...

제대로 된 마무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는 생각났나 싶지만. 그냥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글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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