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기사 2022. 10. 8. 18:03

서로 떨어져 있었던 야지디 교도 어머니 아홉 명과 아이 열두 명이

이라크 국내에 있는 "안전한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3월 11일 Jane Arraf/©2021 The New York Times。

어머니의 고향으론 돌아가지 못한 채, 제3국에서 받아주길 기다리고 있다.

 

시리아의 소박한 국경검문소에 이라크에서 온 젊은 어머니 아홉 명이 달려왔다. 그리고 이젠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아이들을 필사적을 찾았다. 이들 모자 대부분이 이 년 넘게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용소의 고아원에서 받은 새 자켓을 입고 있었던 어린 아이들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지만 어머니가 눈물도 닦지 않고 아이를 안으며 키스를 하자 모두들 금방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기억하기엔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대신 맡아왔던 고아원 직원들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충격도 컸어요. 저도, 아이도요."라고 말하며 어머니 중 한 사람이 당혹해 하고 있었다. 딸과 만날 날을 꿈꿔왔지만 "좀처럼 따라주질 않네요." 딸은 두 살 반 정도였다.

2021년 3월, 이라크 북부의 Faish Habur 국경검문소 지점에서 극비리에 재회사업이 결행되었다. 그 현장을 뉴욕타임즈(이하 본지) 기자들이 지켜볼 수 있었다. 생이별을 했던 이라크 야지디교(일부 쿠르드인의 민족종교) 신도인 어머니와 아이들이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알려진 한에선 이번이 처음이다.

 

시리아에 있는 아이를 만나기 위해 이라크 측 국경검문소에서 대기하는 야지디교 어머니들.

3월 4일 Ivor Prickett/©2021 The New York Times

 

어머니들은 과격파 조직 이슬람국가(이하 IS)에 사로잡혀 성노예가 되어버렸고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공포의 오 년간을 살아남은 여성들은 지금도 곤경에 처해 있다. 이 과격파 조직이 2014년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수많은 참극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 여성들의 비운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이 끝은 어디일지조차 보이지 않고 앞으로의 인생조차 어찌 살아가야 할지.

이라크 북부의 소규모 야지디교 사회에선 지금도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이 어머니들의 아이들은 수천 명의 야지디 교도를 학살하고 육천 명 이상을 납치한 악몽스러운 IS를 상기시키게 하는 접점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이 아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장로들은 말한다. 그 중엔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려오기라도 한다면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이조차 있다.

어머니들이 해방된 것은 이 년 전이었다. 시리아에 있던 IS의 최후 거점이 함락되면서 그야말로 몸이 찢기는 듯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라크에 있는 고향에 돌아가려면 젖먹이와 유아들을 남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 "다시 만날 수 있다"며 설득당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앞서 시리아 국경검문소에서 아이들과 만난 어머니들은 가족들과 헤어지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버이를, 형제자매를, 고향을 버리고 온 것이다.

이라크와 스웨덴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사업 실현에 몸바쳐 온 의사 네마무 가브리 씨는 "이 분들이 얼마나 무거운 걸음을 걸어왔을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짊어지게 될 위험이 얼마나 큰지도,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는지도요."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여기까지 오지 못하거나 버리기로 결정한 아이가 삼십 명 정도 시리아 북동부 고아원에 아직 남겨져 있다. 이번에 찾아온 아홉 어머니는 모두 가족에게 결별의사를 밝히지조차 못했다. 밝혔을 경우 재회사업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홉 명 중 다수가 IS에 끌려갔을 당시엔 아직 미성년이었다는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사흘 동안 울기만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어머니도 있다. 다섯 살 난 딸을 찾기 위해 늙은 어머니를 홀로 남기고 왔다.

"이것 때문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하지만 제 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처럼 어머니도 똑같이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이젠 정말 어찌 해야 좋을까요?"라고 말하며 다시 통곡을 시작했다.

아홉 어머니와 열두 아이들은 현재 이라크에 있는 안전한 장소에서 보호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받아줄 수 있는 제3국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희망에 기대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시리아 고아원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어머니 스무 명 정도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본지에선 재회한 모자의 안전을 확보되기 전까지 보도를 자제했습니다. 또한 신변을 특정하지 않도록 사업자 측과 합의했습니다.)

 

야지디 교도 어머니 중 한 명이 아랍어로 "나의 어머니"라고 써진 펜던트를 어린 딸을 위해 일 년도 전에 구해왔다.

3월 4일 이라크 시리아 국경지대 Jane Arraf/ ©2021 The New York Times。

이 딸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재회사업을 몰래 계획한 중심인물은 전 미국 외교관 피터 W 갤브레이스 씨다. 당초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이라크와 시리아 정부를 움직여 관계된 각 당파를 설득해 필요한 지원을 얻어냈다. 애초 양국의 쿠르드인 세력에 두터운 교류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 백악관 당국자도 움직여 주었을 정도지만 이런 형태로 실현되기까지 일 년이 넘게 걸렸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지연까지 겹쳤다.

아이들이 아직 남아있는 시리아 고아원은 미국이 지원하는 쿠르드인 세력이 중심이 된 현지 당국의 지배지역(준자치구)에 위치하고 있다. 국경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보는 형태로 이번 기사에 나온 야지디 교도가 살고 있는 이라크 신자르 지구가 위치하고 있다. 이 여성들에게 악몽이 찾아온 건 2014년이었다. IS가 이라크 북부에 진격해 와 상당한 영역을 지배함과 동시에 칼리프제 국가(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에 의한 지배체제)가 수립된 것을 선언했다.(2014년 6월) 2014년 8월에는 이교도로 단정짓고 있는 야지디 교도가 살고 있는 신자르를 손에 넣었다. 남성과 거의 성장한 남자아이들이 소집되어 몰살당해 이 수가 최대 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UN과 미국 의회는 민족학살이라며 비난했다. 게다가 약 육천 명에 이르는 여성과 아이들 다수가 IS 병사에게 팔려가 일회용품 취급을 받으며 계속해서 강간을 당했다. 매매 대상이 되었으며 부르는 게 값인 수준이었다. 2019년(3월)에 IS는 시리아 동부에 있던 최후거점 바구즈를 잃었다. 야지디 교도 여성 중 태반이 해방되어 아이들과 함께 사회복귀시설에 수용되었다. 야지디 교도 장로들은 귀향을 허락했지만 아이들은 버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쿠르드인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으며 아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의 신변을 감춘 사례까지 포함해 야지디 교도라는 것이 특정되지 않은 여성들은 시리아 동부에 있는 IS 병사 가족을 수용해 살벌해진 알홀 난민 캠프로 이주했다. 이 캠프에서의 생활조건은(초과밀 상태에 놓여) 매우 가혹한 상황이지만 앞서 서술한 두 살 반짜리 딸과 재회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버릴 수 없다며 아랍인으로 가장해 들어갔다.

IS가 미군의 공습을 받아 바구즈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때 이 어머니는 폭탄 파편에 맞아 부상당하면서도 젖먹이 딸이 죽지 않도록 손을 썼다. 굶어죽지 않도록 밀가루를 물에 타서 먹이고 자신의 옷을 찢어 아기옷을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지켜낸 딸을 절대 잃을 수 없다 각오했다. 하지만 육 개월 후 심문 끝에 야지디 교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회복귀시설로 돌아가야 했지만 딸과 헤어질 수 없다며 버텼다. 그러자 가족이 돌아오라고 애원했다.

"일단 돌아오렴,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전화로 설득해 왔어요." 

석 달 만에 결국 체념하고 신자르에 돌아왔지만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들과 함께 가족과 야지디 교도 사회의 장벽에 맞서게 되었다. 모두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화조차 걸지 못했다. 고아원에서 보낸 전자우편에 들어있는 사진과 동영상이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이마저도 하지 말도록 장로들이 요청하면서 2020년 즈음부터 끊겼다. 이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신변상 위험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이젠 살 의욕도 없어."라며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의 엄마로서 어떻게든 돌봐야죠." 두 살 반짜리 딸의 어머니는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와 친족들은 시리아에서 모두 죽었다. "이 아이에겐 저 밖에 없어요. 친아버지가 누군지 알게 뭐예요."

하지만 야지디 교도 장로와 종교지도자들에겐 이게 문제가 되었다. IS 테러리스트들의 아이들을 신자르에 데려온다면 "야지디교 사회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야지디교 최고위 지도자 자리인 바바 셰이크에 있는 알리 에리야스 씨가 본지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저희에게 있어서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는 문제입니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살아남은 어머니들의 어버이를 죽였습니다.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이슬람 국가의 테러리스트에게서 난 아이들을 야지디 교도 어머니들이 고향에 데리고 돌아오면

"우리 사회가 파괴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야지디교 최고위 지도자 바바 셰이크 알리 에리야스

3월 10일, 이라크 북부  Jane Arraf/©2021 The New York Times

 

법적인 문제도 있다. 이라크 법률상 아버지가 이슬람 교도라면 그 아이는 이슬람 교도가 된다. 그러므로(어머니가 야지디 교도라 해도 이 아이들은 이슬람 교도가 되어) 야지디 교도라고 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야지디교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이라크 법률에선 이슬람교에서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만) 게다가 바바 셰이크 에리야스 씨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시선이 한 줌도 안 되는 여성들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삼천 명 정도가 행방불명 상태이며 십사만 명 이상이 난민 캠프에서 가혹한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다.

"야지디 교도 전체가 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만 누가 봐주기나 합니까?"

확실히 신자르와 이 주변에서 IS가 소탕된 것은 육 년이나 지났지만 야지디 교도의 가장 큰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이 지구에는 아직도 수많은 상흔이 남아있다. 발굴되지도 못한 학살 희생자 집단매장지가 곳곳에 있고 파괴된 집이 셀 수 없이 보인다. 그러니 에리야스 씨로선 이 아이들은 제3국의 지원단체가 봐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가겠다면 말릴 사람도 없다며 내뱉듯이 이야기했다.

야지디 교도의 세속적 지도자인 수장 하젬 타신 베크 씨는 혹시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귀향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만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아이까지 오는 건 무리입니다."라며 퉁명스레 말했다. 살해당할 수 있다는 뜻인가 되물어 보니 "가능한 일 중 하나로 그것도 있을 수 있겠죠."라고 답했다.

이번에 만난 어머니 아홉 명 중 한 명은 딸과 재회한 것을 가족에게 전화로 전해서 받아들여 줄 수 있는가를 물어봤으나 형제 중 한 명이 거부하면서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젠 안전한 곳을 정부가 찾아주길 비는 수 밖에 없어요."

나디아 무라드 씨는 아이와 함께 살지 어떨지를 어머니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라드 씨 자신도 IS의 성노예가 된 상황에서 살아남아 (탈출 후에 분쟁 하 성폭력 근절에 몸바쳐) 201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여성들은 포로가 될 것을 선택한 것도 아니예요."라고 무라드 씨가 본지에 말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도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들 뿐이었어요. 지금이야말로 손을 내밀어 줘서 자신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아홉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들과 재회하러 출발하기 전에 갤브레이스 씨는 "제3국의 수용"을 낙관하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 그리고 며칠 후 넓은 "안전한 집"에서는 아이들의 즐거워 하는 소란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원 여섯 살 이하.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시선엔 불안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까하는 두려움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몇몇 여성들은 제3국에 이주한다면 함께 가는 것을 바라고 있다. 많은 모자 간의 인연이 확실히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5살짜리 딸의 어머니는 아직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딸은 고아원 직원들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울부짖으며 거부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결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갑자기 두 살 반짜리 딸의 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엄마라고 말해주었어요."라고 말했다. "한번 더 말해보렴"이라며 분홍색 옷을 입은 딸을 재촉했다.

 

https://globe.asahi.com/article/14331058

posted by alone glowfly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