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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샌가 엄마는 밥집 뿐 아니라 채소와 과일에서 해산물까지 식료품이라면 무엇이든 취급하는 행상인으로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돈을 바로 받는 장사다 보니 돈이 계속해서 쌓였는데 엄마에 의하면 밤중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할머니께서 지폐다발을 고무로 묶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크리스트교 신자는 돈 같은 건 하늘에 맡기는 것 아니었나?"
할머니가 돈을 세는 모습이 웃겨서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하시니 할머니는 웃으며
"돈도 고마운 존재 아니겠니."
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할머니는 엄격한 크리스트교 신자이셨기에 "재물은 하늘에 맡겨라."를 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는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마저 "세속적인" 기쁨을 느끼게 하는 돈다발이란 대체 얼마나 두터운 존재였던 것일까?
채소시장 한편에서 연극 한마당이 열렸던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 봄이 되어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에 강을 건너는 다리가 침수되어 갈라져 버려 토우호쿠선이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큰 마을에 가기로 했던 예정이 취소되어 버린 유랑극단이 할 수 없이 스와노타이라에서 한 판 벌이기로 한 것이다.
타카라즈카극단에서 남자 역을 맡았던 미나토가와 미사요 씨라는 분이 좌장을 맡아 <유키노죠우 변화>라는 연극을 올렸다. 무대는 직접 만든데다가 객석은 아예 없어서 시장 바닥에서 대자리 같은 걸 깔고 보았지만 매일같이 관객들로 만원을 이뤘다. 토토도 친구와 함께 보거나 그냥 혼자 보기도 하면서 매일처럼 찾아가 맨 앞자리에서 성원을 보냈다.
토토는 <유키노죠우 변화>보다도 시작 전 관객몰이를 더 좋아했다. 하얀색과 갈색이 들어간 짝짝이 신발을 신은 아저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 긴자의 버드나무 아래서~"라는 가사가 담긴 <토쿄랩소디>라는 노래를 부르셨다.
긴자는 일 년에 한 번 아빠가 데려가주신 추억이 담긴 마을이다. 시세이도우파라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킨타로에서 장난감을 사고 니혼극장 지하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아저씨의 노래와 아코디언을 통해 되살아나곤 했다.
나, 긴자를 알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밀려와 토토는 애써 참았다. 함께 대자리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긴자가 보고 싶어." 같은 말을 했다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 아이를 배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참았다.
선로가 좀처럼 복구되지 못했고 짝짝이 신발을 신은 아저씨가 매일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를 불렀으며 토토도 매일 앞자리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밤에도~"에 빠져 친구와 함께 박수를 쳤다.
그런 어느 날, 토토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손님이 두 명 기다리고 있으셨다. 별일이네 하고 지켜보니 한 사람은 짝짝이 신발 아저씨였고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마른 여자로 낯이 익거나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분이 화장을 하지 않고 맨 얼굴을 하고 있는 <유키노죠 변화> 좌장이셨다.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가발을 쓰고 있는 모습 밖에 보지 못했으니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지, 테츠코가 연극에 한번 참가해 보는 게 어떻겠냐 물어보시네? 댁의 따님은 반드시 배우로서 성공할 겁니다. 맡겨만 주시면 미래의 좌장으로 만들어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데 어떻게 할래?"
어디를 어떻게 보신 건지 토토를 스카웃하러 오신 것이다. 순간적으로 "재밌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중학생인데다가 아빠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시고 있던 터라 상담을 할 수도 없으니 아쉽지만 "거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토우호쿠선이 복구되어 유랑극단도 커다란 마을로 떠나갔다. 채소시장 창고는 허물어졌고 토토도 이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 좌장님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건 십이 년이나 지나서 아침 TV 방송 <오가와 히로시 쇼>에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란 코너에 출연 의뢰를 받게 되었을 때로 스태프 분께 그 때 만났던 좌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다녔던 토토를 좌장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권유해 주셨던 분을 다시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당일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송에 출연했지만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그 미나토가와 미사요 씨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으셨다. 대신에 남편 분과 스튜디오에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었는데 아직 건강하셨을 무렵 TV에 나오기 시작한 토토를 보자마자 "아, 이 아이야, 이 아이!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깐?"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고 한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던 토토에게 말을 걸어주시면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 미나토가와 씨에게 감사인사를 한 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지만 TV에 나오는 모습을 봐주셨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농협 일을 계속 해오셨고 밭일이나 재봉부터 친척 돕는 일까지 이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에 매진하셨다. 잠잘 틈도 없이 바쁘셨을 엄마가 언젠가부터 상태가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밤중에 어디론가 가시는 일이 늘어났다. 어디에서 어떻게 알아낸 건지 엄마께서 노래를 잘하신다는 평판이 돌면서 결혼식 연회 자리에 불려나가게 된 것이다.
음악학교 성악과 출신이시니 오페라 <아리아> 같은 걸 부르고 싶으셨겠지만 결혼식에선 "비단으로 짠 허리띠에서~"라는 가사가 들어간 <신부인형>을 부르며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한다. 그 외에도 <하마베의 노래>나 <달맞이꽃>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노래실력을 뽐내곤 하셔서 결혼식이 끝나면 모두들 "고마워요, 고마워요."라며 크게 기뻐해 돌아갈 때 손님용 선물을 잔뜩 안겨주었다.
엄마는 이 선물을 노리고 있었다. 과자 같은 것이 없다시피 했던 시대였으니 쌀가루를 달게 만든 미진코를 잉어 형태로 만든 분홍색 "미진코과자"를 선물로 주곤 했다. 토토와 동생들도 이 달콤한 잉어 과자를 무척 좋아했기에 엄마가 결혼식에서 돌아오자마자 잉어를 감싼 보자기를 재빨리 풀었다.
"우와~"
잉어의 모습이 나타날 때마다 토토와 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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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기뢰에 맞거나 하지 않고 아오모리에 도착했지만 토우호쿠선 플랫폼 또한 시장통이었다. 기차시간표도 엉망이라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가 오지 않았는데 스와노타이라 직행 기차는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야 될 거라는 설명을 들었다.
"어쩔 수 없구나. 모두들 지쳤을 테니 일단 역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오는 기차를 타자꾸나."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동안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왔다. 토토는 왠지 몰라도 이 기차에 꼭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이 기차 타요."
엄마는 즉각 "안 돼."라고 말했다. "이 기차는 시리우치까지밖에 가지 않는단다."
"시리우치까지 갈 수 있음 괜찮잖아요."
"이렇게 혼잡한데 시리우치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려다가 못 탈 수도 있잖니."
평소대로라면 엄마 말씀에 따랐을 토토지만 이 때만은 이 기차를 타고 한시라도 빨리 아오모리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리우치에서 걸어서 가도 그렇게 멀지 않아요."
토토는 그렇게 고집을 피우며 열차 승강구에 있는 철제 손잡이를 잡고서 "탈래, 탈래, 탈래!"라며 떼를 썼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지만 드물게 고집을 부리는 토토에게 엄마도 손을 들며 기차를 타게 되었다.
시리우치에 도착했을 때엔 해도 거의 저물어 있었다. 스와노타이라로 향하는 기차는 언제나 올 수 있을런지 알 수 없는 체 시리우치역의 작은 대합실에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야 했다.
살짝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는데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것이 7월 28일에 일어난 아오모리 대공습이었다. B-29기가 떨어뜨린 소이탄 수만 발이 아오모리에 있는 마을 곳곳에 떨어져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시가지 태반이 소실되었다. 만약 그 때 아오모리역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면 토토네 가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도망을 다녔을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오싹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토토네는 시리우치에 도착한 순환선을 타고서 간신히 스와노타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엔 엄마의 야생의 감을 의지해온 토토가 어째 그 때만은 "이 기차를 타야만 해."라고 생각했는지 지금으로서도 신기할 따름이다.
채소시장의 추억
1945년 8월 15일. 그 날엔 아침부터 스와노타이라 역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며 어른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디오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알려준다나벼."
점심 즈음이 되자 어른들이 너도나도 스와노타이라역 근처로 모여들었다. 토토도 신경이 쓰여 채소시장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와중에 가게에 놓여져 있던 라디오를 둘러싸고 모여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숨을 죽이고 천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른들이 모여있는 곳 한구석에서 토토도 열심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방송이 끝나자 어른들은 모두들 "전쟁이 끝났다는구먼."이라고 했다. 근처에 있던 아저씨의 셔츠를 잡아당기며 "전쟁이 끝났다니 정말이에요?"라고 물어보자 아저씨는 다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엄마에게 알려야겠다 생각했지만 농협에서 일하고 있으실 시간이었다. 정말 전쟁이 끝났다는 건지 어쩐다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누마하타 아저씨 댁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달리고 달려 아저씨 댁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아저씨, 전쟁이 끝난 거예요?"
라고 여쭤보자
"그려, 끝났데이..."
라고 답해주셨다.
토토는 안심했다. 기쁘다기보단 안심했다는 말이 딱 맞았던 것 같다. 이제 공습을 당할 일도 없을 거고, 아빠가 돌아올 것이고, 토쿄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같은 걸 생각했더니 점점 기뻐졌다. 토토는 아저씨 댁에서 사과창고까지 들뜬 마음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났지만 토쿄엔 돌아갈 집이 없었다. 토토네는 사과창고에서 역 앞에 있는 연립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홍수가 일어나 강이 범람해 사과창고가 잠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집은 스와노타이라역과 꽤 가까웠고 채소시장과도 붙어있다시피했다. 학교에 다니기 쉬워진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스와노타이라 채소시장엔 먼 곳에서 물건을 사러 온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 첫 기차를 타고 왔다. 토쿄 방면에서 오는 사람도 있어서 어느 아침에 토토가 학교에 가려고 나왔더니 키가 작은 아저씨가 서있는 게 보였다. 채소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건가 했는데 왠지 토쿄 사람 같아 보였다.
"제가 저녁에 기차를 타고 돌아갈 건데 이 쌀로 밥을 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손에 쥔 마대 안에 쌀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토토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면서도 곧바로 엄마를 불러 "이 아저씨가 부탁할 게 있다나봐요."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스와노타이라역에서 그 아저씨가 커다란 상자를 지고 있는 게 보여 집에 돌아가 "엄마, 그 아저씨에게 밥 지어줬어요?"라고 여쭤보자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그랬단다."라고 말하셨다. 전쟁이 끝났어도 쌀은 아직 배급제로 돌아갔으며 바깥을 돌아다녀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엔 자신이 먹을 쌀을 반합에 넣고 가지고 다니며 일터 근처에서 밥을 짓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된 밥을 주먹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간 기후에 따라 썩어버리는 일도 있어서 소중한 쌀을 아껴 먹을 수 있도록 각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다음 날, 토토가 학교에 가려고 하자 연립주택 앞에 아저씨가 네다섯 명 서있었다.
"여기에서 밥을 지어주신다 들었습니다. 좀 부탁드립니다."
그 후 엄마는 농협 일과 병행해서 밥을 지어 주먹밥으로 만든 뒤 저녁에 대나무 껍질에 싸 건내는 봉사활동 같은 일을 시작하셨다.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으셨으니 할머니에게 밥 짓는 일을 부탁드리면 될 것 같았지만 할머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밥을 지어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토토는 어른인데도 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을 처음 봤다.
엄마께서 그런 할머니께 밥 짓는 방법을 가르쳐드리려 하지도 않고 시간을 쪼개가며 묵묵히 멀리서 물건을 사로 온 사람들을 위해 주먹밥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셨다. "얼마인지요?"라고 사람들이 물어봐도 엄마는 "얼마예요."라고 답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오가지 않게 되면 "공양"이라는 명목으로 몇 푼 대가를 놓고 가곤 했다.
그런 일이 계속 되자 엄마가 결단을 내리셨다. 맡아둔 쌀을 밥으로 지어서 주먹밥을 만드는 봉사활동은 관두고 밥에 된장국이나 생선구이 등 반찬을 더해서 정식처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장사를 떠올리셨다.
"밥 짓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쓰인 종이를 문에 붙이시고 풍로, 냄비, 도마, 식칼, 식기 등을 조달해서 연립주택의 안마당을 식당처럼 차리셨다. 전쟁이 끝나자 채소시장이 점점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식사를 할 곳은 아직 부족했기에 엄마네 가게는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반찬으로 쓰인 생선은 매일 아침 하치노헤에서 오는 물건들 중 기운이 좋아보이는 걸 골라샀는데 엄마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무츠미나토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선 오래 쓸 수 있는 말린 오징어 등을 떼어 오셨다. 무츠미나토역 앞에는 이사바(五十集)라 불리는 생선을 다루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거 모여 시장 같은 기능을 하는 거리가 있었다.
토토도 엄마와 함께 가서 장보기를 돕기도 했다. 무츠미나토는 시리우치에서 하치노헤선을 타고 네 정거장을 가면 있었는데 타는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하면 편도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역에서 내리면 길 곳곳에 매대를 놓아두기만 한 곳에 다양한 생선과 조개와 건어물 등이 놓여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역 근처에 해산물이 주욱 늘어져 있는 그 거리는 무척 활기가 넘쳐 토토가 매우 좋아하는 곳이었다. 재밌었던 게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캇챠"라고 불리는 아주머니들 뿐이었다. 어부는 남자 일이라고 정해져 있었기에 밤중에 어선을 타고 아침엔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분류가 끝나면 그 후 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건 여자들의 차례가 되는 것이었다.
무츠미나토의 "이사바 캇챠"들은 모두 활기차고 친절했다. 어떤 생선이 제철이고 어떤 요리법이 좋은지 등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그런 시장 속에서 엄마가 "많이 샀으니깐 좀 깎아주세요."라고 말하시며 흥정을 벌이고 있는 걸 보니 "굳세지셨구나."라며 감탄스러웠다. 시장에서는 캇챠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가게에서는 토쿄 정보를 알아보며 엄마의 밥집은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고 할 수 있는 첨단 장사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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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네가 피난을 왔던 3월엔 아직 매화 외엔 피어있는 꽃이 없었지만 4월 끝 무렵엔 여러 가지 꽃이 만개했다.
산노헤성 터엔 "시로야마 공원"이란 곳이 있어서 그 부근이 벚꽃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한데 친구의 권유로 보러 갔을 때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감주나 경단 같은 걸 파는 가게들이 늘어섰겠지만 전쟁 중이라 그럴 수도 없어."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시로야마 공원에는 센조쿠이케 공원보다 몇 배는 더 커서 토쿄에서도 곧잘 보았던 왕벚나무도 있었다. 왕벚나무가 지기 시작하면 진한 분홍색을 띈 겹벚나무와 노란 녹색꽃벚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토토는 프릴처럼 생긴 겹벚나무와 녹색꽃벚나무의 귀여운 꽃잎에 푹 빠졌다.
산노헤 사람들은 이 시로야마공원이 자신들을 지켜준다 여기는 듯 수업을 대충 진행하던 역사 선생님도 이 산에 어떤 식으로 성을 세웠는지, 가신의 집은 어디에 있었고 적을 격퇴하기 위해 어떤 방책을 세웠는지, 자료를 보여주며 알려주셨다. 거기에 실려있던 그림 속 산성은 민달팽이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왕벚나무가 만개할 즈음엔 민달팽이의 등에 해당하는 부분이 옅은 빨강색 구름을 지고 있는 것처럼 푹신푹신해 보였다.
벚꽃이 지자 하얀 사과꽃이 피기 시작했다. 사과꽃이 지고 작은 열매를 남기는 6월이 되자 토토네가 만들었던 벌레 쫓는 주머니가 활약하게 되었다. 이 즈음엔 앵두 재배가 한창이어서 농협에 근무하고 있던 엄마가 알이 고르지 못한 앵두를 가지고 돌아오시곤 했다. 못 생기긴 했어도 맛이 좋은 기쁜 선물이었다.
토토는 혼자서 시로야마공원에 가기도 했다. 아직 성이 세워져 있었을 때 거기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풍경이 펼쳐졌을지 상상해 보며 분명 논과 밭이 잘 보였을 거란 생각에 그리스도 마을로 가는 버스 창문 너머로 본 풍경이 펼쳐졌다. 그 때엔 여기 사람들은 왜 이런 산골에 사는 걸까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조상대대로 물려져온 땅에 애착을 갖고 있을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고향은 좋지.
토쿄에 돌아가고 싶어.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친구도 생겼고 아오모리 살이가 익숙해졌지만 가끔 토쿄가 생각날 때마다 "돌아가고 싶어."라며 키타센조쿠 집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공습을 당할 염려는 사라졌지만 옛날과 같은 자유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타센조쿠 집이 공습으로 타버렸다는 걸 토토가 알게 된 것이 이 즈음이었다.
구사일생
스와노타이라에서의 생활이 간신히 안정되었을 무렵 엄마는 음악학교 시절 신세를 졌던 토쿄 코우지마치 숙부님 집과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숙부님이 뇌출혈로 쓰러져 피난을 가고 싶으니 스와노타이라에 있는 집 중에 찾아줄 수 없느냐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 때에도 열심히 어떻게 받아줄 곳이 없나 찾으셨다. 한 달 정도 지나 숙부님 가족 네 명이 스와노타이라에 찾아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엄마를 의지하는 친척들이 계속해서 몰려와 여름엔 한번에 열 명이 넘는 친척이 스와노타이라로 집합했는데 모두 토쿄 사람들로 피난을 갈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홋카이도 타키카와에서 살고 있는 엄마의 아빠, 토토의 할아버지가 협심증을 일으켜 돌아가신 것도 그 여름이었다. 전보로 연락을 받은 엄마는 서둘러 토토와 동생들 셋을 데리고 홋카이도로 향하셨다.
그 당시엔 혼슈와 홋카이도를 왕복하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여행을 해야 했다. 아오모리에서 하코타테까지 츠가루해협을 건너는 세이칸 연락선은 폭격기와 잠수함에게 절호의 표적이었고 애초 표를 구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토토네는 기차에서 배로 갈아타기 위한 연락통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간신히 탈 수 있었다.
여기에 하코타테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타키카와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업의였던 할아버지는 이미 유골함에 모셔졌지만 뒷정리다 뭐다 해서 며칠을 머물러야 했다. 그 동안에 엄마가 생각하신 게 있었던 듯 어머니를 돌봐드리는 건 장녀의 역할이라며 엄마의 엄마, 토토의 할머니를 스와노타이라로 모셔오기로 했다.
할머니는 신기한 분이셨다. 타이쇼우 시대에(타이쇼우 원년은 1912년으로 1933년생인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를 생각하면 할머니가 이 때에 학교를 다닐 나이라 생각하기 힘들어 메이지 시대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자주) 센다이에 있는 종교학교를 다녔던 아가씨였는데 할머니의 가족들은 "밥을 직접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집에 시집보낼 수는 없지."라고 정해뒀다고 한다. 시집을 간 상대가 의사였기에 나름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틈만 나면 성서를 펼치고 있던 정말 의젓한 할머니였지만 취사 세탁을 못해서 전부 간호사 선생님이나 가정부 분께 맡기고 있으셨다.
엄마와 할머니에 아이가 세 명, 모두 합쳐 다섯 명이 함께 하코타테로 돌아올 때까진 괜찮았는데 하코타테역에서부터 세이칸 연락선을 타려고 하는 사람들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신문지를 깔고 앉은 채 "무슨 배를 사흘이나 기다려야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풍로로 밥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토토네는 언제나처럼 손을 잡고서 방공두건을 쓰고 몸을 밀착하며 행동했다. 할머니는 성서를 품에 안은 채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셨다.
연락선에 타자 선장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토토에게 말을 걸며 "적군이 바다에 설치한 기뢰를 건드리면 이 배는 단숨에 가라앉아 버릴 거야."라고 했고 토토는 걱정이 되어 배에 타고 있는 동안 계속 해수면만 지켜봐야 했다.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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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실버버튼을 받으려면 구독자 십만 명을 모아야 한다.(받는다고 해도 직접 신청해야 되는 거라 일부러 자랑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십만 명이란 숫자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사람을 많이 보게 되는 직업을 가졌다면 모를까 눈에 스치기만 하는 걸로 사람이 집계된다 한들 십만 명이나 모이려면 십 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순전히 스치기만 하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자신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구독자 십만 명은 그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 십만 명이 유튜브 채널의 구독 단추를 눌러줘야 가능하다. 돈을 직접 받는 것도 아니지만 구독으로 인해 그 채널에 소비하는 시간만도 상당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십만 명이 구독 단추를 누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다. 블로그 조회수를 보니 블로그의 모든 글에 대한 조회수가 십만 회를 조금 넘는다. 이걸 명으로 환산한다면 어느 정도 나올까? 아니 그마저도 단순히 조회를 한 사람의 명수이니 구독하고는 거리가 멀다. 유튜브 같은 영상 위주 사이트가 대세가 되면서 블로그 선호도가 떨어지고 장사가 안 되어서 통폐합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블로그 구독으로 등록되어 있는 명수가 한 명 밖에 없으니 무슨 핑계를 댄다 한들 찌질할 뿐이다. 유튜브 채널에 계속해서 영상을 올려본 적이 있다.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해서 올려봤지만 조회수는 내가 확인차 조회한 횟수가 포함이 된 건지 아닌 건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구독자수는 열네 명에 불과했다. 실버버튼은 커녕 수익화도 안 된다.(할 생각도 없었지만) 실버버튼을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이해를 하기 힘든 지점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내가 그 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활동을 해봤자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점이 뭔지 알 수 없는 체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모이고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다. 아니 인터넷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포장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생각들 자체가 잘못된 걸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맞출 방법이 없는 걸까? 몸도 머리도 말을 듣지 않는 현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없는 건가?
어느 사이엔가 엄마가 농협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과 창고 창문을 통해 채소를 짊어지고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곳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급료 외에도 망가진 사과와 감자 같은 걸 어차피 팔지 못하니 가져가세요라며 줄지도 몰라."
일을 하는 건 태어나 처음이셨지만 엄마에겐 뭐든 부딪쳐 보라는 정신이 있었다. 농협 면접에서는 "주판 다룰 줄 아시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음악학교 중퇴 후 곧바로 결혼했으면서 "네, 할 수 있어요."라고 답하며 채용되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주판은 경리 담당이 다루었기 때문에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셨지만 농협에서 잡일을 하며 받는 급료로는 벅찼기 때문에 밤에 이웃사람들 옷을 만들어 주는 삯일을 하게 되었다. 미싱이 없었으니 손바느질로 해야 했지만 엄마가 스타일북을 보며 만든 옷은 토토가 보기에도 멋진 작품들이었다.
피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토토는 온몸에 부스럼이 생겨나 고생해야 했다. 해조면 밖에 먹지 않았던 탓인지 영양실조에 걸려서 부스럼이 여기저기 났던 것이다.
표저에도 걸렸는데 손발톱 사이에 세균이 들어가 화농이 쌓이는 병으로 이 또한 영양실조가 원인이었다. 요즘엔 표저에 걸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게 펄쩍 뛰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온몸에 부스럼과 표저로 인한 욱신거림을 토토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전쟁 중이라 병원에 가도 약조차 받을 수 없었으니 토토 뿐 아니라 모두들 참으며 살아가야 했다.
그런 토토를 보며 엄마는 단백질을 섭취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토토 가족은 스와노타이라에서 자라는 과일과 야채를 바구니 두 개에 한 가득 넣은 뒤 행상인이 된 것처럼 기차를 타고 하치노헤항구로 향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어선을 타고 있던 선원들에게 "실례합니다. 토쿄에서 왔습니다만 채소와 물고기를 교환할 수 있을까요?"라며 물물교환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항구 사람들이 기세 좋게 "그러쥬, 여기 있수다!"라며 과일과 채소를 막 잡은 생선들과 교환해 주셨다.
엄마는 재빠르게 생선조림을 만들어 주셨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빠의 영향으로 토토는 생선을 그다지 먹어본 적이 없어서 머리나 꼬리 부분을 먹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조심조심 입에 넣어보니 기름진 맛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생선조림을 먹기 시작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온몸을 덮었던 부스럼이 눈에 띄게 줄었고 열흘 정도 지나자 완치되었다. 단백질의 효과란 대단하구나!
엄마의 환경적응력은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감동적일 정도였다. 덕분에 피난을 와서도 주변 사람들과 양호한 관계를 쌓을 수 있었고 토토도 노리아키 짱도 새로운 환경에 녹아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토토와 동생들에게 말했다.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저녁밥 시간이 되어서 밥 먹지 않겠니 하고 물어보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먹으렴."
그 말을 들은 토토는 당황했다. 토쿄에서 살 때엔 "아무리 권해와도 저녁밥은 집에 돌아와서 먹으렴."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 밥을 먹거나 해선 안 된다고 했잖아요?"
토토가 이렇게 말하자 엄마가 즉시 답했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남의 집 밥이 영양가도 많고 좋은 반찬을 먹을 수 있잖니?"
그건 사실이었다. 사과 창고에서 엄마가 만드신 저녁밥은 채소가 많이 들어간 국물이나 찐 감자가 대부분이었다. 그 지역에서 유명한 남부전병을 으깨서 수제비 대용으로 쓴 국물을 가끔 먹기도 했다. 때때로 생선조림도 먹었고 토쿄 때와 비교하면 천국이었지만 하얀 쌀밥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계란이나 닭고기를 입에 대 본 적은 아예 없었다.
엄마가 "저녁밥은 남의 집에서"라고 말씀하신 뒤로 노리아키 짱은 저녁이 되기만 하면 서둘러 친구집에 가게 되었다. 다섯 살배기 남동생은 귀여운 얼굴에 무척 애교가 넘쳐서 남의 집에 놀라갈 때마다 "도련님, 우리 집에서 먹고 가셔."라며 권유를 받았다. 여러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에 노리아키 짱은 무척 만족해 했다.
엄마가 "노리아키 짱 좀 데려오렴. 누구네 집엔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셔서 남의 집 마루에 앉아 즐겁게 저녁밥을 먹고 있는 남동생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엔 바깥에서 몸을 숙이고 노리아키 짱이 나오길 기다렸다.
토토도 배가 고팠긴 했지만 "나도 먹을래."라고 할 수가 없었다. 노리아키 짱이 나오면 그 집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데리고 돌아갔다. 남의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노리아키 짱의 영양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진좃코 그려보그라."
토토는 스와노타이라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을 가야하는 산노헤 학교에 가게 되었다. 기차는 하루에 일곱 편 밖에 없었는데 아침에 사과창고에서 이십 분 정도 걸려 스와노타이라역에 도착하면 거기에서 기차로 오 분 정도 걸려 산노헤역으로 간 뒤 학교까지 걸어서 삼십 분 정도 걸렸다. 역 주변에는 건물이 거의 없었고 마을은 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산노헤 마을은 난부번이 세운 산노헤성이 있는 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토토가 다니게 된 학교도 그 근처였지만 그 당시엔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매일같이 과일을 종이로 싸거나 농작업을 돕는 등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등교 첫날에 토토는 책상에 앉자마자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새로 들어온 토토를 신기하다는 듯 거리를 두고 보았던 것이다. 토토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한 결과 공책을 펼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들이 몇 명 다가와 "베코 좀 그려보그라." "개 좀 그려보그라."라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베코는 소를 뜻하는 사투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도 잘 그리지 못했지만 친구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를 그렸다. 어째 비쩍 마른 소를 그려버렸는데도 모두들 "잘 한데이~"라며 감탄했다.
다행이다! 이걸로 친구를 사귈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여자아이가 토토에게 말했다.
"진좃코 그려보그라."
엥, 진좃코? 대체 뭘 말하는 거지. 토토는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에 당황했지만 "그게 뭔데?"라고 말했다간 모처럼 달아오른 분위기를 망쳐버릴 수도 있었다.
토토가 심사숙고한 끝에 그 여자아이에게 공책을 건네며 산노헤 말투처럼 말해봤다.
"느그네 진좃코 그려볼래?"
여자아이가 공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옆에서 지켜보니 대머리 인형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오모리에선 "인형"을 "진좃코"라고 하는 거구나.
작전이 성공해 토토는 머리에 리본을 단 인형을 그렸고 또다시 "잘 한데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계기로 토토는 교실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던 단어들도 일 주일 정도 지나니 알 수 있게 되었다.
"진좃코 그려보그라."고 했던 여자아이와 무척 사이가 좋아졌는데 공부를 잘하고 귀여운 아이로 토토는 이 아이와 항상 함께 다녔다.
근로봉사 때 하는 과일 싸기는 수확 전 사과 열매를 벌레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징글징글하데이, 더는 싫다!"라며 뛰쳐나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토토는 혼자 남아있어도 질리거나 하지 않고 열심히 과일을 쌌다.
잡지 페이지를 자른 것을 손톱으로 당겨 정리한 뒤 몇 장을 조금씩 어긋나게 나열한 뒤 재빨리 풀을 발라 고정시켜 한 장씩 차례차례 모아 주머니 형태로 만들었다. 친구는 교실에서 나가며 정해진 것처럼 토토에게 "질리지 않나?"라고 물어보았지만 "안 질려."라고 답하며 계속해서 주머니를 만들어갔다.
거름통에 담겨있는 것을 운반하는 근로봉사도 있었는데 토토는 사실 이 근로봉사가 그렇게 싫지는 않아 오히려 솔선해서 임했다. 하지만 멜대를 질 때엔 뒤가 아니라 앞쪽에서 졌으면 싶었던 게 뒤에서 질 경우 가는 도중 넘어지거나 하면 통 안에 든 걸 뒤집어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멜대의 밧줄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어서 언덕길을 올라가던 도중 뒤에서 지던 아이가 그걸 뒤집어 쓴 걸 보고 너무나 불쌍하게 보여 토토가 그 아이를 학교에 있는 선생님에게 데려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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