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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22. 21:54

얀보 닌보 톤보

 

"오디션을 본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토토와 친구들이 라디오 제2스튜디오에 달려들어가 보니 거기엔 동기생들 뿐만이 아니라 분가쿠자나 토토도 이름을 알고 있는 극단 배우들이나 개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등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이게?"

이건 <얀보 닌보 톤보>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목소리 출연자를 고르기 위한 오디션이었다. NHK 사람의 섦명에 의하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방송을 제작하게 되어 처음으로 대형 오디션을 열기로 했다고 한다. "오디션"은 지금이야 누구든지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이 시기엔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던 단어였다.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길 수 있다니...!"

토토는 이 프레이즈가 마음에 들었다.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토토에게 어울리는 방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오디션은 토토를 위해 준비된 걸지도! 같은 생각까지 했다.

 

<얀보 닌보 톤보>는 세 마리 흰 원숭이 새끼들의 이야기다.

인도의 임금님이 중국 임금님에게 보내는 선물로서 배를 타고온 세 마리 흰 원숭이 새끼들이 중국을 누비며 고향인 인도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기까지를 그림 모험 이야기. 노래도 많이 들어간 즐겁고 꿈이 있는 드라마였다. 그 전까지의 라디오 드라마는 전쟁중인 상황을 설정한 이야기나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NHK는 이젠 밝고 긍정적인 방송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결심한 듯 보였다.

요즘엔 아이들 목소리를 성인인 성우가 연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아이 목소리는 진짜 아이들이 맡았기 때문에 NHK에선 이를 위해 토쿄방송아동극단이라는 극단까지 둘 정도였다. 하지만 <얀보 닌보 톤보>의 각본을 쓰신 극작가 선생님은 스튜디오에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이 들어가선 녹음하는 중간중간 숙제를 하고 있는 모습은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있는데 악보를 받고 바로 이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건 아이들에게 무리라고 본 것도 이유에 들어갔다. 그렇기에 어른이어도 아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하기 위해 NHK 사상 처음으로 대형 오디션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오디션 자리에선 두 페이지 분량 정도 대사가 들어있는 대본과 노래 악보가 주어졌다. 얼굴을 보면 공평한 심사를 할 수 없으니 토토를 비롯한 응시생들과 시험관석 사이에 칸막이가 놓여졌다. 경력자가 많은지라 오디션 진행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어떡해. 나 악보 못 읽는단 말야."라며 혼란에 빠진 사람도 조금씩 보여서 토토가 조금이지만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음악학교에서 배웠던 게 이런 곳에서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톤보 대사를 읽어보세요."

토토의 차례가 되자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 톤보는 가장 나이가 어린 원숭이였으니 되도록 어린 남자아이가 내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얀보를 하기도 하고 닌보를 하기도 하고 하는 도중 역이 바뀌기도 했는데 토토는 다른 사람과 함께 대본을 읽게 되었을 때에도 "톤보 대사를 읽어보세요."라는 지시만 내려왔다.

오디션은 몇십 명이나 되는 응모자들이 조를 바꾸어가면서 진행되었다.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린 후엔 그 장소에서 결과를 기다릴 뿐. 모두들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넓은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십 분 정도 지나 담당자가 종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얀보 역부터 차례로 이름이 불렸다.

"얀보, 분가쿠자의 미야우치 쥰코 씨."

"닌보, 분가쿠자의 니시나카 마사치코 씨."

"톤보, NHK 극단의 쿠로야나기 테츠코 씨."

엥, 붙었어?

토토는 벌떡 일어섰다. 와글와글도 못하고 말 자체도 일본어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토토가 정말로 붙었다?

5기생들 모두가 달려와서 다들 "축하해!" "잘 됐네!"라며 말을 걸어왔지만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선발되신 세 분은 이 쪽으로."라고 하기에 따라가 극작가 선생님과 작곡 선생님을 소개받게 되니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선발해 주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려나...

언제나처럼 결국 강판당하면 어떡한담...

마음 속엔 기쁨보다 불안이 훨씬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분이 극작가이신 이이자와 타다스 선생님이십니다."

양복에 넥타이, 올백 머리를 하고 안경을 써서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성이 소개되자 토토는 인사를 한 뒤 서둘러서 이런 말을 했다.

"저, 일본어를 이상하게 하니깐 고치겠습니다. 노래도 잘 못 부르니 공부하겠습니다. 개성도 누르겠습니다. 말투도 단정히 해서..."

그러자 이이자와 선생님이 안경 너머 눈을 가늘게 뜨더니 웃으면서 말하셨다.

"고치면 곤란하죠. 당신의 그 말투가 좋아서 뽑았는데.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괜찮으니깐 고치지 말아요. 그대로 말해주세요. 그게 당신의 개성이고 그걸 저희가 필요로 하는 겁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엥, 괜찮아?

정말 이대로 하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전까지 짙은 구름에 싸여 있던 마음 속이 확하고 갠 것처럼 느껴졌다. 배역에서 쫓겨나기만 하며 "돌아가도 좋아"라는 말만 들었던 토토가 처음으로 자신의 개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게 극단 선배로부터 "일본어가 이상해!"란 말을 들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만약 이이자와 선생님을 이 때 만나지 못했다면 토토는 NHK에 남아있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오오카 선생님도 오디션을 보던 곳에 찾아와 이렇게 말해주셨다.

"토토 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작곡가인 핫토리 타다시 선생님이 톤보 역은 이 사람이다,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네라고 말씀하셔서 톤보 역은 토토 님이 맡는 걸로 결정이 나다시피 했어요. 이이자와 선생님도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특징이 살아있는 목소리라고, 일본 방송극단을 다 둘러봐도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었을 타입이라고 절찬하셨죠."

또한 이이자와 선생님이 처음으로 원폭피해 상황을 세계에 전했던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는 걸 알려주셨다. 아사히 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아사히 그래프>의 편집장을 맡았던 이이자와 선생님은 원폭투하가 일어난 직후 히로시마 사진을 숨겨놓고 있다가 연합군 사령부가 점령을 마쳤던 해(1952년)의 8월 6일호에 발표했다. 전세계 사람들이 처음으로 히로시마가 놓였던 상황과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아사히 그래프>를 통해 볼 수 있게 되면서 증쇄가 거듭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얀보 닌보 톤보> 오디션이 열린 해엔 이이자와 선생님이 저널리스트이자 극작가라는 두 직업 중 하나에만 전념하기로 하면서 아사히 신문사를 그만두신 참이었다.

"무척 하이컬러한 분으로 겉보기엔 착하기만 해보이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강한 부분도 있는 분이세요."

오오오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토토 님의 데뷔 작품이 이이자와 선생님 작품이라 정말 기쁘군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씀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던 토토에게 "그대로 있어주세요." "괜찮아요!"라고 힘있게 말씀해 주신 이이자와 선생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니.

이 말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와 겹쳐져 그 뒤로 펼쳐진 토토의 인생을 언제든지 받쳐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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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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