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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1.20 :: 속 창가의 토토 31
문화/책 2025. 1. 20. 22:16

1954년 4월, 토토와 동기생들은 드디어 NHK 전속 토쿄방송극단 제5기생으로서 정식채용되었다. 어머니가 될 예정이었던 토토가 이 날부터 배우가 된 것이다.

NHK 극단 신인들은 우선 "와글와글" 일을 맡는 게 순서였다. 와글와글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그 외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NHK 극단원이 된 토토와 5기생들이 본방송의 와글와글을 처음 맡게 되어 모두 함께 라디오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 곳은 놀랍게도 대인기를 누리는 라디오 드라마 <당신의 이름은> 녹음현장이었다. 당시 세상을 풍미하고 있었던 이 라디오 드라마는 매주 목요일 밤 여덞 시 반부터 방송되었다. 토쿄대공습이 있던 밤, 긴자 거리에서 생판 남이었던 마치코와 하루키가 만나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멜로 드라마로 방송시간만 되면 이걸 듣겠다고 목욕탕의 여탕이 텅 비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는데 주제가를 부른 것이 토우요우음악학교 시절에 성악을 가르쳐 주셨던 타카야나기 후타바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알고서 정말 깜짝 놀랐다.

"받으세요."라며 건네준 대본이 한 사람당 한 권씩. 하지만 대본에 와글와글 대사 같은 건 적혀져 있지 않아서 그 장면에 맞는 대사를 직접 만들어내고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인공인 마치코와 하루키가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근처를 지나던 남자가 쓰러진다. 라디오이니 그 부분에 "털썩"하는 효과음이 들어가고 마이크 근처에 있는 마치코와 하루키 담당 성우가 "어머?"라든가 "무슨 일이지?" 같은 말을 하면 그와 동시에 와글와글 역들이 목소리를 죽여 "무슨 일이에요?" "죽은 건가요?" "구급차를 불러야 되지 않겠어요?" 같은 말을 하면서 정말 사람이 쓰러졌다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이다.

처음 맡는 와글와글인지라 마치코와 하루키 역을 맡은 성우 분들도 참가해서 토토를 비롯한 5기생들과 함께 특별연습을 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에서 연출가가 큐(연기 개시 신호)를 내면 5기생들은 팔십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역 두 사람을 둘러싸고 각자 생각해온 대사를 말했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에 있던 연출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혼자서 목소리가 너무 크네. 목소리를 좀 줄여서 다시 해봐."

그렇게 말한 뒤 다시금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낙하산 스커트 입은 아가씨?"

토토를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 말야, 혼자서 소리가 너무 커."

토토는 만약 자신이 길을 걷고 있는데 쓰러진 사람과 조우하면 어떤 말을 걸지 상상하고 대사를 말하는 법을 생각했다.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소리를 죽여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어볼 생각이 도통 들지 않아 커다란 목소리로 "무슨 일이세요!"라고 외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으니 그렇게 했는데.

"거기 말야, 다른 사람보다 조금... 아니다, 삼 미터 정도 떨어져."

아까는 팔십 센티미터였는데 거기에 삼 미터를 더하게 되니 모두들과 완전히 격리된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할 수 없이 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무슨 일이세요!"라고 외친 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니 음량을 조정하고 있던 믹스 담당자 분이 귀를 막고 펄쩍 뛰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거기에서 더 뒤로 물러나서, 문 근처에서 해봐!"

스튜디오 문을 가리키기에 토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제 동기생들과 십 미터 이상은 떨어지게 되어 토토는 "무슨 일이세요~~~!"라고 목소리를 쥐어짰다.

연출가가 와선 토토에게 이렇게 말했다.

"와글와글 담당이 큰 소리를 내면 라디오에서 그걸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특별한 역인가 보네, 나중에 다시 나오려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인상을 강하게 만들지 말고 와글와글이구나 하는 정도로, 그러니깐, 그 외 여러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다란 인상을 줘야... 아가씨, 오늘은 이걸로 됐어.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전표라는 건 극단원이 일을 하면 연출가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떤 스튜디오에서 어떤 방송에 출연했는지 써서 극단실에 걸어놓는 서류로 극단원이 여기에 사인을 한 뒤 서무실에 제출하면 서무 담당자가 시급 얼마로 계산해서 한 달 단위로 묶어 지불해 준다. 일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면 수입을 얻을 수 없기에 연출가가 그걸 신경써서 친절히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이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 토토의 출연료는 시간당 오십구 엔. NHK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급료가 상당히 박했다.

하지만 토토는 수입보다도 혼자서 돌아가게 된 것이 슬펐다.

토토는 스튜디오 바깥에 있는 벤치에서 동기생들이 일을 마치는 것을 기다렸다. 최소한 신바시역까지는 동기생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팥죽을 같이 먹자고 약속도 했고.

그 이후로 어떤 방송 어떤 연출가가 있는 스튜디오를 가도 와글와글 차례가 오면 토토는 정해진 순서처럼 이런 말을 들었다.

"아가씨, 돌아가도 좋아.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더 심한 경우엔

"어라? 와있었네. 돌아가도 돼.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3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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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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