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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8. 15:28

토토, 배우가 되다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

 

NHK 전속 토쿄방송극단 제5기생 채용시험이 끝난 건 1953년 2월이었다. 2월 1일부터 NHK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세간의 화제도 "TV"에 대한 이야기가 독차지했다. 토토를 비롯한 5기생들은 TV 시대의 1기생으로서도 기대를 받게 된 것이다.

육천 명이나 되는 응모자 중에서 남은 건 여자 열일곱 명, 남자 열한 명으로 총 스물여덞 명. 처음에 응모한 사람들 중 이백 분의 일만이 남게 되었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삼 개월 더 제1차 양성기간을 거친 뒤 약간 명의 채용자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테니 아직 방심할 순 없었다. "약간 명"이 어느 정도의 수를 염두에 두고 나온 말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스물여덞 명은 불안한 심정을 안고서 TV나 라디오 배우로서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배우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무난히 참가할 수 있도록 평일엔 저녁 여섯 시부터 아홉 시까지, 토요일은 쉬고 일요일엔 오전 열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로 시간이 정해졌다.

 

연수 첫날, 토토와 5기생들은 NHK로 가는 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관광 호텔의 일본식 방에 집합했다. 교실로서 쓰이는 곳은 타타미가 깔린 연회장 같은 방이었다.

스물여덞 명 중엔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지만 이미 영화배우나 무대배우로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 많았고 학교에서 연극 공부를 했던 사람도 있어 완전한 초짜는 토토 외엔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높아진 긴장감을 안고 첫날 강의가 시작되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 몇몇이 인사를 한 후 사무 담당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 분은 낭독과 이야기를 알려주실 오오오카 타츠오 선생님이십니다. 평소엔 NHK 문예부에서 근무하고 있으십니다."

이 분은 평소 보던 양복 입고 출근한 회사원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벗겨진 머리에는 털실뭉치가 끝에 달린 니트모자를 쓰고있고 뿔테안경을 걸쳤으며 짙은 갈색 가디건을 입고 계셨다. 허리가 굽어 상반신이 쓰러지기라도 할 듯한 자세로 걸어가셨지만 절대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토토는 이 할아버지에게 갑작스러운 흥미를 느꼈다. 이렇게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과 만나게 된 건 처음인데도 뭐라 할 수 없는 부드러운 태도와 자기자신을 꾸미지 않는 느낌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과 조금 닮아보였다.

"여러분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해야 되나? 돌봐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무 담당자가 이렇게 소개를 마치자 오오오카 선생님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시더니 아이처럼 부끄러워하는 웃음을 띄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임 선생님이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잡일꾼 같은 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 여기까지 남기 위해 고생이 꽤나 많으셨겠죠?"

입을 가리고 있는 손등이 조금 부풀어 보였다. 친절한 말투를 쓰면서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도 그윽한 면이 있어 좀 신기했다. 오오오카 선생님이 타카하마 쿄시의 문하생으로 있었던 사생문의 달인이라는 것을 토토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사십 년이 넘게 지나고서야였다.

 

매일매일 관광호텔에 다니게 되었다. 교실로 쓰이는 넓다란 방에 도착하면 자신들이 쓸 탁자와 방석을 놓고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다. 코우란에 다닐 때에도 절을 교실로 썼으니 신발을 벗고 방석에 앉아 수업을 듣는 서당 같은 수업방식이 추억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토토는 반드시 맨앞자리에 앉기로 했는데 뒷자리에 앉았다간 옆사람과 수다를 떨거라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것도 코우란에 다닐 때와 변함이 없었다.

오오오카 선생님 외에도 대사 읽는 법의 기초를 NHK 연극과장이었던 나카가와 타다히코 선생님이, 움직임 등 기초연기는 훗날 TV 미술부장에 오르는 사쿠마 시게타카 선생님이, 음성학은 토쿄대와 토쿄예대에서 수업을 하시는 삿타 코토지 선생님이, 예능에 대한 강의는 훗날 NHK 회장에 오르게 된 사카모토 토모카즈 선생님이, 탭댄스는 니혼극장의 스타였던 오기노 유키히사 선생님이 맡으셨다. 관광호텔에는 홀도 있었기에 탭댄스 수업은 거기에서 받았었다.

당시 토토는 교사진이 그렇게 호화롭다는 것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지만 첫 일 주일이 지난 일요일 신바시로 가던 길에 동기생 중 한 명이 감동에 젖어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선생님들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수업을 들으려면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을 내야될지 상상도 안 돼."

양성소 친구들은 전문적이 지식이 풍부해서 연기와 방송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들 흥분해서 "대단해" "엄청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토토는 '그런가. 그 정도로 NHK가 이 교육에 열의를 다하는 거구나.'라며 감탄했다.

 

연수가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토토 님!"

낭독 수업이 끝난 뒤 오오오카 선생님이 부르셨다. 오오오카 선생님은 토토를 언제부턴가 "토토 님"이라고 부르시게 되었다.

"토토 님의 목소리와 억양은 마치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이 말하는 것 같군요."

엥, 태엽으로 돌아가는 프랑스 인형? 토토로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묵묵히 오오오카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선생님이 싱글벙글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토토 님은 머뭇거리는 구석이 없이 활발해서 감았던 태엽이 기세 좋게 풀리는 것처럼 단숨에 대사를 풀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건데 알기 어려웠나 보군요. 허, 허, 허."

"프랑스 인형"이란 말을 들었을 때엔 칭찬을 들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태엽으로 움직이는"이란 설명은 미묘했다.

오오오카 선생님은 다소 신선 같은 구석이 있으셔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시고선 이에 토토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면 마술이라도 쓴 것처럼 뿅하고 모습을 감춰버리셨다. 토토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시고선 눈 앞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시는 것이다.

하지만 오오오카 선생님이 "님"이라고 부르셨던 학생은 토토 뿐이었고 쉬는 시간에 토토가 동기생들 앞에서 막 배운 라쿠고 등을 선보일 때면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웃고 있으셨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오오카 선생님이 토토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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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
문화/책 2025. 1. 18. 00:34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면

 

토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우요우음악학교 동급생 다수가 이미 취직할 곳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레코드 회사에 가거나,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을 하거나, 후지와라 가극단에 들어가는 사람까지 있는 등 졸업 후 진로 이야기를 꺼내는 동급생들의 얼굴은 빛나 보였다. 모두들 할일 없이 라면이나 구운 감자를 먹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동급생들 중엔 졸업 후 <춤추는 여자> 등 인기곡을 내며 가수로서 유명해진 미우라 코우이치 씨도 있었는데 그 당시 이미 레코딩도 마치고 데뷔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토토만이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상당히 낙담했다.

어느 날 돌아오는 길에 있는 전신주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인형극 <눈의 여왕> 공연 긴자 코우쥰샤홀"

헤에, 긴자에서 공연하는 구나? 인형극은 어떤 식으로 하려나?: 지금이야 TV 같은 곳에서 방송되어 다들 알고 있겠지만 당시엔 알 길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토토는 <눈의 여왕>이 안데르센 동화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인형극이란 것을 본 적은 없었고 "긴자"라는 두 글자에 이끌리고 있었다. 아빠와 데이트를 했던 추억이 담긴 거리이며 스와노타이라에서 들었던 <토쿄 랩소디>의 추억도 떠올랐다. 혼자서 가기엔 다소 망설여졌지만 일요일 오후에 마음을 굳게 먹고 가보기로 했다.

어린이들로 가득 찬 코우쥰샤홀에 기분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다소 살이 찌고 기운차 보이는 언니가 양손에 남자아이 여자아이 인형을 끼고 등장했다. 인사를 한 뒤 인형극 무대 아래로 몸을 수그리자 무대 위에는 인형만이 남은 채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토토는 몸을 조금 기울여서 무대 아래에 숨어있는 언니를 옆에서 바라보았다. 언니는 무릎을 꿇고서 양손에 낀 인형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더니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도 하고 점프를 하기도 하면서 땀범벅이 되어가며 연기를 했다. 객석에 있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선 손바닥이 날아가라 박수를 쳤다. 

절정 부분이 가까워져 눈의 여왕이 남자아이인 카이와 여자아이인 게르다에게 무서운 명령을 내리자 "불쌍해"라든가 "너무해" 같은 말을 어린이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 토토는 신비한 감정에 휩싸였다. 영화판 <토스카>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무언가 상냥한 것이 가득 차오른 것 같은,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커다란 박수소리와 함께 인형극 <눈의 여왕>이 막을 내렸다.

신바시역까지 걸어가며 토토는 생각을 했다. 혹시 오늘 본 그 언니 같은 걸 토토도 할 수 없을까? 많은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다면.

음악학교 친구들이 차례차례 취직에 성공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당시 말로 한다면 "직업여성"이 되는 꿈은 너무나 멀어 "결혼"이란 두 글자가 묘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결혼을 하면 아이가 생기겠지. 청소, 세탁, 요리를 할 수 있는 어머니야 많이 있겠지만 인형극을 할 수 있는 어머니는 그렇게 많지 않으려나?"

집에 가는 동안 토토는 상상에 잠겨있었다.

"오늘 본 인형극 같은 걸 어머니가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잠자기 전에 베개 맡에서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그런 어머니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토토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는 거야!"

어머니가 되려면 그 전에 결혼을 해야 되는데, 토토는 그런 걸 제쳐두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는 아이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의 여왕> 인형극은 아직 젊었던 그림자 연극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 씨가 프로듀스를 했었고 음악은 모두 아쿠타가와 야스시 씨가 작곡했으며 남성 4인조 코러스는 아직 프로가 되기 전이었던 다크덕스가 맡았다는 사실을 이 당시 토토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준 높은 <눈의 여왕>을 본 것이 토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결정한 계기가 된 것은 틀림 없었다.

토토는 엄마에게 인형극을 연기한 언니가 무척 필사적으로 임했던 것이나 어린이들이 무척 기뻐했던 것 등을 열변했다. 그러고서 엄마에게 여쭤보았다.

"동화책 읽는 법이나 인형극 하는 법을 알려주는 곳 없으려나?"

"글쎄, 신문에 나와 있으려나?"

엄마가 그리 말씀하시길래 토토는 그 날 보지도 않던 신문을 펼쳤다.

"NHK에서는 TV 방송을 시작하게 됨에 따라 전속 배우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프로 배우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 년간 최고의 선생님을 모셔 양성과정을 거친 후 채용된 분은 NHK 전속 배우가 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채용 인원수는 若干名..."

이런 우연이! 신문 정중앙에 NHK 광고를 발견하고서 토토는 바로 감이 왔다. TV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낭독 방법 등을 배우면 동화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는 아빠와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서 바로 이력서를 보냈다.

며칠 지난 뒤 NHK에서 서류가 왔다. '붙었으려나?'하는 마음에 봉투를 열어보니 토토가 보냈던 이력서가 나왔다.

"이력서를 직접 지참하고 오시라고 써놓았는데 왜 보내신 겁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 실패! 그냥 관둘까 생각도 했지만 이력서 제출기간 종료까지 이틀 남았으니 아직 늦지는 않았다.

토토는 그 날 바로 히비야 공회당 옆에 있는 NHK로 이력서를 지참하고 갔다. 수험번호 5655번 카드를 받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응시하러 온 건가? 신문에는 "채용 인원수는 若干名 "이라고 써져 있었는데 "와카보시메이"는 몇 명을 말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가선 아빠에게 "와카보시메이"가 뭐예요?"라고 시치미를 떼고 물어보자 아빠께서 "약간 명을 말하는 거 아니니? 정확히 수를 결정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채용하겠다 그런 뜻을 담은 말이야."라고 설명해 주었다.(와카보시메이는 若干名 각 한자의 일본식 발음에서 흔히 쓰이는 발음을 이은 것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역자 주)

채용시험이 시작되었다. "아카마키카미, 아오마키카미, 키마키카미" 같은 빨리 말하기를 하는 일차 시험을 통과해 이차 필기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토토는 실패를 해버렸다. 시험장이 오챠노미즈에 있는 메이지대학교였는데 토토는 NHK로 가버린 것이었다.

이만 하면 됐다 관두자 생각하며 신바시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정기권 주머니 안에 천 엔 지폐 한 장을 비상금으로 숨기고 있었단 사실이 생각났다.

"이걸로 메이지대까지 갈 수 있나요?"

택시 운전수 아저씨에게 천 엔 지폐를 보여드리니

"갈 수 있지."

"부탁드립니다!"

메이지대학교에 도착하자 시험 담당 아저씨가 "빨리 와, 빨리!"라며 손을 흔드셨고 시험장인 계단형 교실에 오 분 지각으로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의 항목과 아래의 항목 중 연관되는 것을 선으로 연결하시오."

"카르멘 - 비제" "이사무 노구치 - 조각가"처럼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1952년도 방송부문 예술제 수상작품은? 같은 방송이나 연극에 관련된 문제는 어려웠다. 이런 문제가 총 이십 문항 정도. 토토는 자신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안경을 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

그러자 그 사람은 토토를 흘겨보고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그야 그렇겠지.

두 번째 문제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묻는 문제. 이 정도는 괜찮겠지. 세 번째 문제는 "최근 들은 NHK 라디오 방송명을 적으시오."였다. 신년마다 방송되는 미야기 미치오 씨의 거문고와 아빠의 바이올린이 어우러진 <봄바다>를 들은 것이 생각나서 답안용지에 "미야기 미치오의 거문고와 바이올린이 이중주를 이룬 <봄바다>"라고 썼다. 아빠에게 비밀로 하고 보는 시험이라 아빠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새해에 어울리는 멋진 곡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문제는 "당신의 장점과 단점을 쓰시오"였다.

드디어 나를 알릴 수 있는 문제가 나왔다는 생각에 토토는 연필을 고쳐 쥐었다. "장점"에는 망설임 없이 "정직함"이라고 적었다. 엄마께서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깐. 그 다음 "친절함"을 적고 "친구가 그렇게 말해 줍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우개로 지우고 적고를 반복하다 보니 종이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쓴 사람은 답안용지를 제출하고 계단형 교실에서 나갔고 토토가 답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거절한 남자도 "가볼게요."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좋은 사람인 건가 싶어져 신경을 쓰게 만든 걸까 하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단점"에는 원래 잘 읽어보면 장점과 연결되는 것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많이 먹음"이라든가 "정돈 못함" 같은 것만 떠올랐고 결국 이렇게 써내려갔다.

"저는 낙천적이어서 그런지 많은 것들을 곧잘 잊어먹곤 합니다. 어머니는 때때로 저에게 "참고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물어보겠는데 아까 너 실패했다면서 우왕하고 울었잖니?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깔깔 웃으면서 전병을 와구와구 먹고 있잖아? 아까 울었던 이유가 머릿속에 남아있긴 해?" 같은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럴 때 아까 일을 완전히 잊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반성이라든가 고민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 이것도 단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험시간이 끝났다.

누가 갑자기 세우기라도 한 것처럼 토토가 일어섰을 때, 커다란 계단형 교실은 텅 비어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랬는데도 어째서인지 토토는 이 필기시험도 통과했다.

삼차 시험을 보기 전에 엄마께 NHK 극단 배우가 되기 위한 시험을 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동화책을 잘 읽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으니 NHK 시험을 보고 있다는 것, 아빠께선 반대하실 게 뻔하니 비밀로 해달라는 것 등을 전했다.

엄마는 토토의 마음을 이해해 주셨고 토토도 엄마께 이야기를 함으로써 외로운 싸움에서 해방되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삼차 시험인 판토마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앞서 한 사람을 따라했더니 어째 시험관이 크게 웃었다. 사차 시험은 노래였는데 시험관이 "이력서에 성악과를 나왔다고 적었는데 틀림 없나?"라고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물어보아서 붙을 자신이 싹 사라졌지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어 최종면접 시험에 임하게 되었다.

면접에선 수험 동기를 물어보기에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답했더니 "무슨 말을 하는 겐가?"라며 웃었다.

이력서의 아버지 성함 칸에 "불명"이라고 적어놨지만 아빠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쿠로야나기 양, 바이올리니스트인 쿠로야나기 씨와 관계 있나?"

"그게..."

역시 거짓말을 할 순 없다.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 말씀은 드렸나?"

"아버지께 말씀 드리면 그런 꼴사나운 일은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게 뻔했기에 비밀로 하고 응시했습니다. 아, 꼴사납다는 건 아버지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거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반대하시나?"

"이런 세계에는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지 말렴, 분명 이런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합니다."

토토가 필사적으로 답할 때마다 시험관들은 웃다가 죽을 판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이래서야 붙을 리가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면접시험 다음날 토토가 없는 사이에 NHK의 높으신 분이 집까지 찾아와선 엄마에게 토토가 내정을 받았음을 전하면서

"모리츠나 씨께서 허락해 주실지요."라고 물어보셨다는데 엄마께서 안심시켰다고 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 이 날을 평생 기억하자고 결심했다.

엄마께서 아빠를 잘 설득해주셨는지 아빠께서 토토에게 "열심히 해보렴."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2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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