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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잡담 2024. 7. 21. 00:33

내가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만들면서 댓글을 다는 조건을 완전개방으로 한 건 내 글을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의견을 남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자유롭게 무미건조한 자기 블로그 유도용 댓글들이 설치는 환경. <속 창가의 토토>를 번역하는 시간을 글 하나당 한 시간으로 잡고 있다. 여기에 글을 나눌 수 있는 부분까지 나아갈 때까지 번역을 계속하고 있으니깐 지금까지 한 번역만 해도 아홉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 된다. 그런데 여기에 계속 무미건조한 자기 블로그 유도용 댓글이 달리는 꼴을 보고 참기 힘들어서 지웠더니 그 사람이 연속으로 댓글을 다는 게 보였다. 알고 보니 블로그 설정에 댓글을 다는 사람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서 이걸 쓰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플레이를 하는 사람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 아니 사람이긴 할까?

이런 상황에 놓이고 보니 또다시 더더욱 힘들어진다. 인터넷 상에서 뭐를 해도 벽을 향한 외침. 누군가와 대화를 하지 못하고 그저 벽에 낙서를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실. 인터넷 바깥도 마찬가지. 난 글을 써서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애시당초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글을.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베끼는 것 외엔 하지도 못하니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걸 계속 반복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는 전혀 관계 없는 댓글들이 날 공격하는 것에 힘들어 하는 악순환. 정말 뭘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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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
문화/책 2024. 7. 21. 00:03

어느 겨울 일요일에 토토는 어릴 적부터 다녔던 센조쿠교회의 일요학교에 나갔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서 무척 추운 아침에 언제나처럼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라고 중얼거리며 걸어다녔는데 이 말을 중얼거리며 나아가다보면 소풍을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바람이 휘잉휘잉 소리를 내며 불어서 토토는 눈물이 조금 베어나왔는지도 모를 무척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 애야!"

갑자기 경찰 아저씨가 불러세웠다.

"너 왜 울고 있는 거니?"

토토는 눈물을 닦으며

"추워서요."

라고 답했다. 그러자 경찰 아저씨가 외쳤다.

"전쟁터에 있는 군인 아저씨들 생각 좀 해보렴! 추운 것 가지고 울어서 어디에 써먹겠냐! 그딴 것 때문에 울지 마!"

갑작스러운 노성에 토토는 깜짝 놀랐지만 "그런가, 전쟁을 하고 있을 때엔 울지도 못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혼나는 건 싫어. 우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는 게 전쟁이구나. 추워도, 졸려도, 배가 고파도 울지 말자. 군인 아저씨들은 더욱더욱 힘들 테니깐."

그게 토토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이었다.

 

마른 오징어 맛이 나는 전쟁책임

 

마을 여기저기에서 긴 줄이 생겨났다. 가게에 물건이 들어왔다는 말이 들리자마자 몰려드는 것이다. 뭘 팔고 있는지와 관계 없이 일단 줄을 서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모두들 행렬에 동참한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기뻐했는데 장례식에 피울 향초를 팔더라고."

언젠가 엄마가 그런 라쿠고 같은 이야기를 하셔서 그걸 들은 토토도 "아하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그 때엔 가게에 아직은 상품이 조금씩 남아있었기에 엄마들도 실패담으로 웃을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기 지유가오카역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토모에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차에 타려고 역 쪽으로 가고 있으려니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 아저씨들이 가족이나 이웃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정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하, 저 사람은 전쟁터로 가는구나."

이 때엔 아직 토토네 아빠도 아는 사람들도 군대에 끌려가지는 않고 있었기에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모두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깃발을 흔들렴."

처음 보는 광경에 우두커니 있던 토토의 눈 앞에 일장기가 그려진 작은 깃발과 잘 구워진 마른 오징어 다리가 하나 내밀어졌다. 올려다 보니 모르는 아저씨가 토토를 향해 웃고 있었다.

"뭘까? 깃발을 흔들면 오징어를 먹을 수 있는 건가?"

물론 이 때도 배가 고파서 힘들었으니 토토는 별 생각 없이 오징어와 일장기를 손에 쥐었다.

엄마가 늘 "모르는 사람에게서 뭘 받거나 하면 안 돼요."라고 하셨지만 배가 너무나 고팠기 때문에 오징어의 유혹을 견딜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른도 아이도 군인 아저씨들을 향해 "만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그렇구나. 깃발을 흔드는 값으로 오징어를 받은 거네."

토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만세!"라고 외치며 열심히 깃발을 흔들었다.

드디어 환송식이 일단락 되면서 군인 아저씨들이 역 안으로 사라져갔다. 깃발을 흔들던 사람들도 모두들 역 앞을 떠났다.

토토는 주변 사람들이 다 갔나 살핀 뒤 오징어 다리를 입에 쑤셔 넣었다.

이 일이 있은 뒤 토토는 군인 아저씨들의 출정식을 기다리게 되었다. 토모에학원은 지유가오카역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수업 중에도 역에서 군인 아저씨들을 보내는 "만세!"가 들리면 토토는 살며시 교실을 빠져나가 역을 향해 달려갔다. 토모에학원의 자유로운 교풍 덕에 함부로 교실을 나가거나 해도 혼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토는 출정하는 군인 아저씨들을 볼 때마다 열심히 일장기를 흔들었다. 그 때마다 마른 오징어 다리를 받아 아무런 생각도 않고 그걸 씹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아무리 깃발을 흔들어도 마른 오징어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식량부족이란 파도가 출정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자리까지 휩쓴 것이다. 교실을 빠져나가 깃발을 흔들러 가도 마른 오징어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토토는 너무나 실망스러워 출정식에 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깃발을 흔드는 대신 받은 오징어 맛은 토토의 기억 속에 계속해서 자리잡게 되었다.

 

토토네 아빠는 1944년 가을이 끝날 무렵 호쿠시(현재의 중국 화북지방)로 출정하게 되었다. 패전 후엔 쭉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다가 1949년 말에야 토토네가 살고 있는 키타센조쿠 집으로 돌아오실수 있었다. 미국 이야기를 해주시던 타구치 숙부님을 비롯해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 되어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돌아온 군인 아저씨들도 돌아오지 못한 군인 아저씨들도 있었다. 전쟁 중엔 알지 못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보니 오징어를 받으며 만세를 불렀던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란 걸 그제서야 알았다.

토토는 생각했다.

지유가오카역 앞에서 토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환송하는 가운데 전쟁터로 향한 군인 아저씨들 중 대체 몇 명이나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토토는 그저 오징어 다리가 먹고 싶었기에 일장기가 그려진 작은 깃발을 흔들며 군인 아저씨들을 환송했다. 하지만 군인 아저씨들이 깃발을 흔드는 토토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환송해주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싸우자."라고 자신을 타이르며 전쟁터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렇다면, 그랬던 군인 아저씨가 전사했다면 그 책임의 일부는 토토에게도 주어지는 것이고 오징어를 먹고 싶어서 "만세!"를 부른 토토는 군인 아저씨들의 마음을 배신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야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그 일장기를 흔든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만세!"를 외치며 환송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오징어를 먹고 싶었다고는 해도 토토는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무책임했던 것이 토토가 짊어져야 할 "전쟁책임"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집 영장 이 왔다"

 

1944년 봄,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지 이 년 반이 지났을 무렵에 토토네엔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4월에 여동생 마리 짱이 태어나 사 자제가 된 것이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5월에 첫째 남동생인 메이지 짱이 패혈증으로 죽어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차게 학교에 다니던 메이 짱. 공부도 잘하고 바이올린도 잘 켜서 토토와 메이 짱은 언제나 함께 놀았는데... 페니실린 한 방만 놓을 수 있어도 살 수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토토는 메이 짱이 죽었을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메이 짱에 대한 것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항상 어깨동무하고 같이 학교에 가고 그랬었잖니."하고 엄마가 말할 정도로 사이 좋은 자제였을 텐데 어째서인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사진을 봐도 "아하, 이런 아이였나?"란 생각이 들 정도다. 분명 메이 짱이 죽었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토토가 메이 짱과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토토의 기억 속엔 메이 짱을 잃고 슬퍼했을 엄마 아빠의 모습조차 남아있지 않다.

메이 짱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하느님, 전 하늘나라로 가지만 부디 저희 가족은 평화롭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선명한 목소리로 기도를 했다고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 해 여름에 엄마는 피난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 토쿄 출생이신 아빠에게 시골집 같은 건 없었고 엄마의 고향인 홋카이도는 토쿄에서 너무나 멀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혼자 토쿄에 남겨두고 아직 어렸던 세 아이를 이끌고 피난처를 찾는 여행을 떠났다.

첫 후보지는 센다이는데 엄마의 아빠, 토토의 할아버지가 센다이에 있는 현재의 토우호쿠대 의학부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기 때문에 나름 인연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센다이역에 내려 역앞을 방황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안 되겠어, 여기 절대 공습당할 분위기야."

엄마의 예언이 맞아 다음해 7월에 센다이는 B-29의 대공습을 당해 시가지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홋카이도의 대자연 속에서 자라난 엄마에게 위험을 감지하는 동물적 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센다이로 피난하는 것을 포기한 뒤 이번엔 후쿠시마로 향했다. 후쿠시마역에 내린 뒤 지나가는 사람에게 "여기 근처에 피난해 있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니 "이이자카 온천 근처 어떻십니꺼?"라고 답했기에 흔들거리는 버스를 타고 이이자카 온천으로 갔다.

이이자카 온천에는 온천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토토가 다리를 치료하러 다닌 유가와라 온천은 마을 곳곳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면서 어른도 아이도 뜨끈뜨끈 상기된 얼굴로 다니는 무척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에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그 때엔 전황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던 때니 한가하게 온천에 몸을 담그러 올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여관을 몇 곳이고 돌아다녔는데 피난 때문에 오게 되었다는 말에 어느 여관의 아저씨가 "우리 여관에 방 하나 비었는데 거기 묵을라요?"라고 말해주셔서 엄마가 안심하며 "잘 되었구나."라며 토토의 손을 잡았지만 토토의 눈은 다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친절한 아저씨가 입고 있는 바지도 팬티도 아닌 것 같은 색이 옅은 팥으로 칠한 듯한 축 늘어져 있는 건 대체 뭐지? 토토 나이대에 입는 불루머가 길어진 것 같아. 그 아저씨는 저녁 더위를 피하는 중이었던 듯 부채를 퍼덕퍼덕 부치면서 서 있었는데 그 길다란 블루머를 입고 있는 모습은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 두 발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토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말았다.

"엄마, 저 아저씨가 입고 있는 건 뭐예요?"

"저건 사루마타(サルマタ)라고 하는 거야."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지만 토토는 "그렇구나! 아저씨 다리가 원숭이(サル) 같아!"라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른치곤 좀 보기 흉하게 입은 모양새긴 했지만 토토는 "사루마타"라는 단어의 울림이 마음에 들었고 이 온천으로 피난 오면 토쿄와는 다른 재밌는 사람들이나 예쁜 자연, 처음 보는 동물들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저씨가 권해준 여관방은 무척 넓고 훌륭했다. 먹을 것도 토쿄에 비하면 훨씬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여기로 피난해야겠네."라고 말한 뒤 토쿄에 있는 아빠에게 전보를 보냈다.

아빠가 바로 답신을 보내왔는데 그 전보를 읽는 엄마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면서 토토네는 곧바로 짐을 싸 토쿄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엄마는 얼굴이 굳은 채로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아빠가 보내온 전보엔 "소집 영장 이 왔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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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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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7. 15:52

책은 친구

 

토토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빠 덕분이었다. 아이 돌보기를 엄마에게 맡겨두기만 했던 아빠는 토토에게 책읽기를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로서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밤에 토토가 침대에 누우면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와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낭독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빠가 읽어준 책 중엔 소설이 많았다. 그 즈음 토토 나이를 생각하면 그림책이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쓴 <쿠오레>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쓴 <소공자> 등등 여러 소설들을 매일밤 조금씩 읽어주셨다. 그 중에서도 토토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쿠오레>였지만

"아빠가 열심히 읽긴 하시지만 그다지 잘 읽지는 못하시네. 토토가 어른이 되면 자기 아이에게 책을 재밌게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입원했을 때에도 토토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으면 아픔이나 간지러움, 불안한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입원이 길어진 탓에 직접 책을 읽는 습관을 체득하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도. 그림책이나 어린이 대상 책만으론 질리게 된 토토는 퇴원 후에 아빠 책장을 물색하게 되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시가 나오야가 쓴 <암야행로>였다.

"어디 보자..."

토토는 눈 앞에 있는 갈색 표지로 된 책을 집고서 펄럭펄럭 넘겨보았다. 아빠가 읽는 책은 두껍고 무겁고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봐도 그림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으며 글자도 작았는데 당시엔 한자에 전부 요미가나를 써놓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니 그런대로 읽을 수는 있었다. 동화나 그림책처럼 삽화가 없는 만큼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복장이나 머리카락 모양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책만 있다면 기분이 좋아지는 토토를 보며 아빠와 엄마는 <일본소국민문고>라는 어린이 대상 문학 전집을 사주셨다. 다 해서 열 권 이상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토토가 좋아했던 책이 <세계명작선>이란 제목을 단 책이었다.

그 책엔 레프 톨스토이, 로맹 롤랑, 카렐 차페크, 마크 트웨인 같은 작가의 작품과 칼 부세의 시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같은 것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어린이 대상 책 치곤 상당히 호화로운 내용이었다.

토토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핑크트헨과 안톤>으로 부잣집에서 자라난 핑크트헨과 가난하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안톤의 우정 이야기에 푹 빠졌다.

 

토토네 집에선 과자를 사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책을 외상으로 사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다. 책장과 눈싸움을 벌이며 한 권 한 권 집어보고서 "이거다!"라고 생각되는 책이 보이면 계산대에 앉아있는 아저씨에게 "쿠로야나기인데요, 이 책 외상으로 달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리고선 손에 넣은 책을 품에 넣고서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런데 서점의 책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빗이 이가 빠진 것처럼 책장에서 빈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세계대전 때문인데 물자부족이 인쇄용 종이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출판사가 좀처럼 책을 찍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황량해지는 책장을 바라보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어느 날 토토가 하굣길에 서점에 들러봤지만 역시 책장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텅텅 비었고 책이 아니라 책장 장사로 가게를 바꾸셨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어린이 대상 책장에는 한권도 없었다. 그래도 토토는 책장 구석에 놓여져 있던 얼마 없는 책들 중에 한 권을 집었다. 그건 <신작라쿠고>라는 책이었다.

정말 안 팔려서 놓여 있던 거겠네 하는 생각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읽어봤는데 이게 의외로 재밌었다.

도둑이 들지 않도록 집안 곳곳에 방범장치를 해놓았더니 자기가 거기에 걸려버린 얼빠진 집주인 이야기나 툭하면 방귀를 뀌어대서 시집을 가지 못했던 부잣집 아가씨가 간신히 결혼하게 되었더니 첫날밤에 참았던 방귀가 나와 그 기세에 남편이 방안을 일곱 번 반이나 날아다니다 기절한 이야기. 나오는 등장인물마다 얼간이거나 웃음이 터질 수 밖에 없는 결점을 가진 사람이거나 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댄 토토는 역시 책은 좋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대두 열다섯 알

 

세계대전 중 토쿄의 겨울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추웠다고 생각한다.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

토모에 학원에서 돌아오는 동안 토토와 친구들은 다들 그런 말을 하며 걸어갔다. 간단한 곡조를 붙여서 자신들의 테마송이라도 된 양 부르고 다녔던 적도 있다.

쌀이 배급제로 바뀐 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들이 점점 폐업하기 시작해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고구마, 대두, 옥수수, 수수 등이 "대용식으로써 배급되었다.

매일 먹는 도시락이 하얀 쌀밥에서 대두로 바뀌었을 때엔 정말 배가 고파 살 수 없겠다 싶었다. 토토는 운동회 도시락에도 하얀 쌀밥이 완전히 사라진 걸 보며 "작년 운동회 도시락은 엄마가 만들어주신 달콤한 유부초밥이었는데."라고 회상하며 슬퍼했다.

 

어느 추운 날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엄마가 프라이팬으로 볶은 대두가 열다섯 알 들어간 봉투를 건내셨다.

"잘 들으렴, 이게 테츠코가 오늘 하루 먹을 음식이야."

엄마는 토토의 손에 봉투를 놓았다.

"서둘러서 전부 먹으면 안 된단다. 집에 와도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으니깐 언제 몇 알을 먹을지 네가 잘 나눠야 해."

그런가, 오늘부터 도시락이 콩알 뿐이구나. 배가 고파도 한꺼번에 먹으면 안 되는구나.

"먹은 뒤에 물을 많이 마시렴. 그러면 배가 찰 수 있거든."

엄마는 몇 번이고 토토에게 강조했다.

"열다섯 알이라... 그럼 아침엔 세 알을 먹자."

그렇게 결심하고서 학교에 가는 도중에 우선 한 알을 먹었다.

"오독오독오독"

어금니로 씹고 있으려니 첫 대두가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졌다. 그럼 두 알 째.

"오독오독오독"

이것도 순식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알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벌써 세 알째야?"

학교에 도착한 토토는 엄마가 말씀하신대로 물을 잔뜩 마셨다.

"아까 먹은 대두가 뱃속에서 물을 잔뜩 머금고 불어오를 거야."

토토는 뱃속 모습을 상상했다.

"앞으로 열두 알이네."

토토는 대두가 들어있는 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수업을 듣는 와중에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토토와 친구들은 교정 한구석에 있는 방공호로 피난했다. 방공호 입구를 닫자 그 안은 어두컴컴해졌다. 처음엔 몸을 둥글게 말고 숨을 죽였지만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봤어."라고 누군가가 말하자 토토도 "나도"라고 답했다. 좀처럼 경보해제 사이렌이 울리지 않자 어두컴컴한 방공호 안에서 대두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토토는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한 번에 두 알,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오독"

지금 당장 남은 대두를 전부 먹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지금 이걸 먹어버린다면 귀가 후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었다.

"참자 참아..."

그런 말을 하며 토토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대두를 열 알 가지고 있어. 어쩌면 지금 당장 이 방공호에 폭탄이 떨어져서 모두 죽을지도 몰라. 그럼 지금 먹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방공호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고 집이 공습으로 불타버려서 돌아가보니 아빠와 엄마가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럼 어떡하지? 역시 남아있는 열 알을 지금 먹는 게 나으려나?"

빙글빙글, 빙글빙글, 여러가지 일을 생각하니 토토는 슬퍼졌다.

"집이 타지 않아야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알을 먹었다.

좀 지난 뒤 공습경보 해제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토토와 친구들은 겨우 방공호를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돌아가도 좋아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집이 가까워질수록 불타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에 나왔을 때 그대로인 집이 보이자 안심할 수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집은 타지 않았고 엄마와 아빠는 살아있어. 게다가 대두도 아직 여덞 알 남아있고."

토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을 때엔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리며 놓았다. 그 놀이는 엄마가 발명한 것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림으로 그리고서 "잘 먹겠습니다" "우물우물" "더 주세요"라고 말하며 먹는 흉내를 내었다. 달콤한 계란말이나 구워진 고기 그림을 그리고서 "우물우물"을 반복했다.

배급이 해조면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변에서 캐낸 두꺼운 곤포를 빻아서 곤약을 우동처럼 길게 뽑아낸 것에 섞은 것이 해조면이었다. 왠지 개구리알 같아서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조미료도 떨어져 가니 그저 물을 끓여서 개구리알을 후룩후룩 먹는 수 밖에.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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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6. 23:25

캐러멜 자동판매기

 

토토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일 학년 도중에 지유가오카역 앞에 있었던 토모에학원으로 전학했지만 토토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일 주일에 한 번 키타센조쿠에서 전차를 타고 시부야에 가서 선생님의 집에서 연습을 했다.

환승역인 오오오카야마역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 토토의 흥미를 끄는 것이 보였다. 모리나가 캐러멜 자동판매기였다. 당시 오오오카야마는 토쿄공업대학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살풍경한 곳이었기에 어째서 그런 곳에 최신식 판매기가 놓여져 있었는지 지금도 알쏭달쏭하다. 자동판매기는 돈을 넣는 가느다란 구멍에 오 전짜리 동전을 넣으면 캐러멜 상자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본 전체가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자판기에 캐러멜이 들어있는 걸 한번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토토는 식량부족 때문에 캐러멜이 들어있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언제나 두근두근거리며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오 전짜리 동전을 넣고서 버튼을 누른 뒤 캐러멜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으면 찰랑!하고 아래쪽에 있는 작은 접시에 돈이 그대로 떨어졌다.

"돈은 안 돌려줘도 되니깐 캐러멜이 나오는 걸 보고 싶다고!"

토토는 이런 생각을 하며 판매기를 전후좌우로 흔들었지만 캐러멜이 나올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토토는 어떻게 해서든 자동판매기에서 캐러멜이 나오는 걸 보고 싶었다.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갈 때마다 토토는 "어쩌면 고쳐졌을지도 몰라" 싶어서 자동판매기를 흔들었다.

어쩌면 그건 토쿄공대생이 만든 시험작품 같은 게 아니었을까?

매번 그러진 않았지만 피아노 연습을 할 때 엄마가 따라와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엔 연습 후에 시부야역 앞에 있는 식당에 같이 갔기 때문에 이럴 때엔 캐러멜 자동판매기보다 여기에 관심을 쏟았다. 엄마가 "뭐 먹고 싶니?"라고 물어보면 토토는 반드시 "아이스크림!"이라고 답했다.

언제나처럼 연습을 마치고 시부야 하치 공 앞 교차점 건너편에서 지금의 109 앞에 있는 커다란 식당에 갔다. 토토와 엄마는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젊은 군인 아저씨와 같은 식탁에 앉게 되었다. 토토는 입 주변에 아이스크림을 다 묻혀가며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먼저 식사를 마친 젊은 군인 아저씨가 일어서며 토토와 엄마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이거, 괜찮으시다면 쓰세요."

엄마에게 내민 종이에는 "외식권"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많은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구하기 힘들어져 식당에서 무언가를 먹을 때엔 이 외식권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토토는 이 때 처음으로 이 종이를 보았다.

"이렇게 귀한 걸 받다니요, 곤란합니다."

엄마는 엄중히 거절하며 군인 아저씨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군인 아저씨는 엄마에게 억지로 떠맡기듯 쥐어주고 그 자리를 떴다.

이 때 있었던 일을 토토는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곧잘 떠올리곤 했다. 군인 아저씨가 혼자서 식당에 왔던 것은 전쟁터에 가기 직전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거기에 토토 모녀가 와서는 즐겁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보고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나 친척 아이를 떠올렸지 않았을까? 그래서 외식권을 엄마에게 준 것일까? 군인 아저씨는 무사히 돌아왔을까.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건 그 해 말이었다.

그리고 토토는 언젠가부터 피아노를 배우지 않게 되었다.

 

아직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아빠를 뺀 가족 모두가 홋카이도에 있는 엄마 친정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엄마로선 결혼 후 첫 귀성길이었다.

돌아오는 아오모리발 우에노행 기차 안에서 토토는 창문에 달라붙다시피 하며 바깥 경치를 내다보았다. 앞자리엔 아저씨 둘이 앉아 "그 밤색 말이 죽여주드만." "새끼 말이 쌌으니께 샀으면 좋았겠는디 말여"라며 말 이야기에 몰두해 있었다.

발차 후 어느 정도 지나자 창을 통해 한가득 펼쳐지는 새빨간 광경이 돌연 토토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과 과수원이었다.

"사과다, 사과!"

토토뿐 아니라 엄마도 함께 큰 환성을 질렀다. 새빨간 사과 열매가 한가득 열린 풍경이 너무나 예쁘고 맛있어 보여서 토토와 엄마는 홀딱 반했다.

"어떡한담, 내릴 수도 없고."라며 엄마와 토토가 이야기를 나누자 앞에 앉은 아저씨들 중 한 명이 "사과 먹고 싶습니껴?"라고 말을 걸어왔다.

"네! 먹고 싶어, 먹고 싶어요. 이제 토쿄에선 사과 같은 거 구경도 못하고 있거든요. 팔지를 않으니까요."

"우린 다음역에서 내리는디 맞다 아지매, 집 주소 좀 써주실라요?"

엄마는 허둥지둥 메모장을 찢어서 토쿄 주소를 커다랗게 써 아저씨에게 주었다. 메모를 주머니에 넣은 아저씨들은 다음역에서 서둘러 일어나 기차에서 내렸다.

아저씨가 토토네에 사과를 보내준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일 정도 지나서였다. 나무로 된 커다란 사과 상자가 두 상자나 겨무더기에서 얼굴을 내민 새빨간 사과들은 정말 맛있어 보였고 실제로 먹어보니 달콤하고 맛있어서 울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 인연으로 엄마와 아저씨는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이름은 누마하타 씨로 아오모리현 산노헤군에 있는 스와노타이라에서 커다란 농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감자나 호박 같은 채소도 많이 보내주곤 했다.

어느 날 아저씨가 "내년 장남이 토쿄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거기에 하숙하게 해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엄마는 수긍했지만 그 아드님이 토토네에 오기 직전에 군대로 소집되었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토토는 대학생이 군대에 소집되어 행진하는 뉴스 영상이 나오면 그 아드님이 이 안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곤 했다.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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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5. 22:09

여름엔 여름대로 아빠의 형님이 살고 있는 카마쿠라 유이가하마에 해수욕을 하러 가는 게 즐거웠다. 백부님의 성함은 타구치 슈우지라 하는데 다큐멘터리 영화 카메라맨을 맡고 있어서 "슈우 타구치"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전쟁터에 가는 일도 꽤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후엔 교육영화 쪽에서 실력을 발휘하셨다.
이 백부님에게서 뉴욕 선물로 얼룩곰 인형을 받았는데 이게 판다 인형이라는 것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당시 미국에선 전에 없던 판다 붐이 불었다고 한다. 미국 여자가 탐험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 쓰촨성에서 "환상의 동물"이라 불리던 판다를 탐색했는데 대나무 숲에서 아기 판다를 너무나도 쉽게 발견했다. 이 아기 판다를 강아지로 변장시켜 데리고 돌아와 시카고 동물원에서 사육하게 되자 이것이 순식간에 인기를 얻으면서 아메리카 방방곡곡에 판다 상품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 당시 토토로선 아직 판다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헤에, 이런 얼룩무늬를 가진 곰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그 인형이 평생을 같이 하는 친구가 될 줄은.
카마쿠라 해안에서 엄마는 수영복을 입었는데 당시 일본 여자들은 해수욕을 할 때 속옷을 수영복 대신 입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바다에서 나오면 가슴이 다 비춰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줌마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다들 신경쓰지 않았다. 토토는 그 광경을 보면서 "다 보이는데 굉장하네"라고 생각했지만 당시엔 그게 당연했다.
 
다리 길이가 다르지 않나?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여름날 아침에 오른쪽 다리 전체가 욱신욱신 아파서 눈이 떠졌다.
"자고 있는데 다리가 아팠어요!"
그렇게 말하자 엄마가 아침밥 준비를 멈췄다.
"큰일 났네! 곧장 병원에 가보자!"
이런 때 엄마의 결단력은 매우 빨라진다. 하지만 토토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변명을 필사적으로 생각해냈다.
"그게요, 아마 어제, 앞구르기를 할 때, 어딘가 부딪혔나 봐요."
이런 말을 했지만 엄마는 듣지도 않은 채 토토의 손을 붙잡고 집 근처에 있는 쇼와의전(현재의 쇼와대 의학부)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활기가 넘치는 남자 의사 선생님이 토토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밝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여러 군데를 살펴 보면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바로 입원해야겠습니다."
 토토는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바로 눕혀졌고 끈적끈적한 석고를 바른 붕대가 오른쪽 발가락부터 허리 근처까지 순식간에 감겨졌다.
토토의 오른쪽 다리는 결핵성 고관절염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혈액이 운반해 온 결핵균이 고관절에 염증을 일으키면서 그대로 두면 관절 표면에 있는 연골이 파괴되고 그 다음엔 뼈까지 파괴되어 관절이 그 상태에서 붙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칭칭 감긴 깁스가 완성되자 선생님은 "잘 만들어졌군 잘 되었어!"라고 말하며 통통하고 가볍게 깁스로 고정된 오른쪽 다리를 두드렸다. 토토는 자신이 뭔가 새로운 인형이 된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이건 이것대로 미지의 체험이었고 계속해서 누워있어도 되니 땡잡았네 같은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선생님은 "절대안정"이라고 하시며 토토를 그대로 어린이용 침대에 옮겼다.
"따님이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토토는 몰랐지만 엄마는 선생님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겪는 입원생활. 침대에 누워있던 토토는 깁스 때문에 돌아눕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잠이 오지 않을 때엔 누워서 천장을 계속 쳐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재밌는 것도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매일 병실에 찾아와 토토 간병을 해주었다. 엄마가 가져온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고 양손으로 인형을 들고 가슴 위에서 인형놀이를 하기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엔 간호사 선생님이나 엄마가 음식을 잘게 쪼개서 입에 넣어주었는데 병원 밥은 엄마의 요리에 비하면 너무 맛이 없었다. 가장 싫었던 게 사각형 코우야두부 조림. 영양가가 높아서 그런지 곧잘 반찬으로 나와서 "오늘 반찬은 코우야두부예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으윽, 또냐"라고 생각하며 살짝 머리를 들어서 갈색 사각형 덩어리를 째려보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젓가락을 들어주면 토토는 그 젓가락으로 코우야두부를 꾹 눌러서 즙이 푸왁하고 나오는 것을 확인하며 "싫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번 꾹 눌러서 푸왁하는 것을 반복하는 토토를 보며 간호사 선생님은 "코우야두부를 좋아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토토는 꽤 운이 없는 아이였다. 쇼와의전에 입원하고 있는 와중에 성홍열에 걸려버렸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이 걸리는 전염병으로 토토는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두르고 있는 그대로 쇼와의전 근처에 있는 전염병 전문 병원인 에바라병원에 격리되었다. 고열이 나고 온몸에 붉은 오돌토돌한 것들이 생기고 목이 아파서 괴로웠다. 그래도 좀 재밌었던 게 병이 낫기 시작하자 뱀이 탈피하는 것처럼 피부가 주욱 벗겨지기 시작했다. 손의 피부가 장갑을 벗은 것처럼 벗겨져서 간지럽긴 해도 재밌었다.
동생인 메이지 짱도 성홍열에 걸리면서 아빠와 엄마가 많이 힘들었다. 엄마는 아이 둘을 간병하면서 집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빠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어디에서 구하신 건지 반찬을 가지고 오셨다.
불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드디어 성홍열이 나아 쇼와의전에 돌아온 토토에게 이번엔 수포창이 돌았다. 산 너머 산. 수포창도 전염병이니 토토는 다시 깁스한 그대로 에바라병원으로 귀환. 다리에 한 깁스를 언제 풀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어찌되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수포창은 울고 싶어질 정도로 가려웠다. 게다가 계절은 여름.
온몸에 오돌토돌한 게 생겼는데 깁스를 안한 부분은 긁거나 간지럼 방지약을 바를 수 있었지만 깁스 안 쪽엔 전혀 손이 들어가지 않고 땀까지 흘러 축축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깁스와 몸 사이로 나 있는 틈새에 길고 가느다란 막대를 넣어 긁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알게 된 아빠가 지시봉을 가져와 틈새로 살며시 넣어보니 납작한 지시봉이 가려운 곳 근처까지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아빠, 들어갔어요! 대성공!"
바이올린을 켜느라 바쁘실 아빠가 나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는 게 기쁘고 감사해 박수를 쳤다. 무릎 뒷편 같은 가장 가려운 곳엔 지시봉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참을 만 해졌다.
병원 바깥에는 쓰름쓰름 우는 매미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드디어 깁스를 푸는 날이 다가왔다. 여름 동안 계속해서 깁스 속에 갇혀있었던 오른쪽 다리는 상당히 가느다라져 있었다. 입원하는 동안 키도 좀 커졌지만 다리 길이는 오른쪽 다리보다 왼쪽 다리가 길어져 있었다.
"어라? 다리 길이가 다르지 않나?"
선생님이 깁스를 풀고 있는 동안 토토와 엄마는 마주보고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양다리의 밸런스가 무너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기 때문에 토토는 쇼와의전 병원을 퇴원한 이후 접골원에 다니거나 유가와라(카나가와현)에 있는 온천에서 치료를 하거나 요즘 말하는 재활치료를 하게 되었다.
유가와라에서는 아빠의 어머니와 젊은 도우미 분 둘이서 같이 돌봐주었다. 할머니는 토토가 타타미 위를 달리면 "조용히 하렴"이 아니라 "소리가 나는 게 싫단다"라고 했다. 토토는 이 한 마디를 들은 것만으로 "무서워!"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용히 있도록 했다.
 
유가와라에서 돌아올 때엔 시나가와역에 아빠와 엄마가 마중나와 주었다. 열차에서 내린 토토가 플랫폼을 달려 아빠와 엄마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두 분이 우셨다. 오랜만에 만났으면 기쁠 텐데 어째서 우는 걸까 의아했는데 쇼와의전 선생님으로부터 "목발을 짚고 다녀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듣기까지 했던 토토가 달려오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어른이 되어서야 알려주셨다.
다리 길이는 같아져 걷기도 달리기도 문제없었다. 토토는 운이 좋았다.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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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4. 10:34

긴자 산책, 스키, 해수욕

 

"해마다 한 번은 토토스케를 긴자에 데려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빠가 그런 말을 했는데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매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언제나 엄마와 둘이서만 외출을 하는 아빠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별일이다.

아빠는 우선 시세이도우파라에서 은으로 만든 컵에 담긴 반구형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웨하스도 올려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반짝반짝거리는 스푼으로 한 숟갈을 떠내 입에 쏙 넣으면 차가움과 달콤함이 입 안에서 정수리까지 퍼지는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진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엔 긴자의 도로를 거닐며 쇼윈도우를 쳐다보기도 하고 가게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아이를 보는 것이 익숙치 않은 아빠는 토토가 어떤 물건을 잠시 봤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갖고 싶니?"라고 물어보며 사주려 들었다.

토토는 "갖고 싶은 게 아니어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바이올린과 엄마에게 푹 빠져 살아온 아빠로선 여자아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구경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라고 말해도 이해를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윈도우 쇼핑을 할 때엔 보고 싶어도 멈추지 않고 곁눈질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츠코시 백화점 옆에 있었던 킨타로우라는 장난감 가게에 들어간 건 아빠가 사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엄청 고심한 끝에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화 같은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엿보기 상자" 같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던 적도 있다.

장난감을 포장한 상자를 안은 토토는 딸에게 장난감을 사줬다며 만족해하는 아빠와 니혼극장(현재의 유라쿠쵸우 마리온) 지하에 있는 영화관으로 갔다. <뽀빠이>나 <미키마우스> 같은 영화를 본 뒤 택시에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한번씩 아빠와 했던 우아한 긴자 데이트는 전쟁이 격해지면서 이 세상으로부터 즐거운 일이나 맛있는 것들을 앗아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돌아보면 토토는 상당히 축복받은 소녀시절를 보냈던 것 같다.

겨울이 되면 가족과 함께 시가고원으로 갔다. 당시 시가고원은 무척 국제적이었던 곳으로 샹하이나 홍콩, 유럽에서까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한가득 놀러오는 관광지였다. 아빠가 시가고원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지휘자 사이토우 히데오 씨로부터 연주 아르바이트를 권유받은 것을 계기였는데 오자와 세이지 씨의 은사로 알려져 있는 사이토우 씨는 첼리스트로서도 유명하여 아빠와 현악사중주 악단을 결성하였다.

토토 가족이 묵은 호텔에 들어간 순간 커다란 로비임에도 따뜻해서 깜짝 놀랐다. 식당도 복도의 구석조차도 어디를 가든 따뜻했는데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의 보이가 눈 속에서 노란 채소들을 파내고 있는 것도 보았는데 노랗고 사각사각거리는 이 채소를 "샐러리"라 한다고 보이가 알려주었다. 엄마도 토토도 샐러리를 그 때 처음 먹어봤다.

시가고원 연주회는 외국인 전용 호텔에서 열렸다. 매일 밤마다 댄스파티가 열려서 아빠가 거기에서 연주를 했는데 아빠가 정말로 목표로 하고 있었던 건 스키였다. 아빠는 시가고원을 무척 마음에 들어해서 연주여행차 갈 때마다 반드시 가족을 데리고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스키장엔 리프트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스키 플레이트를 착용하고서 자기가 직접 경사로를 올라가야 탈 수 있었다. 토토는 겨울용 두꺼운 원피스 아래에 바지를 입었을 뿐인 차림새로 어린이용 스키 플레이트를 착용하고 연습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실크 그린 머플러를 머리에 두르고서 스키를 타고 있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면 멋져 보일 거라 생각하고 그러셨다나.

스키 연습장에서 어린이를 보는 게 드문 일인지 외국인 스키어들이 곧잘 말을 걸었다.

"오, 큐트!"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칭찬을 들었다는 건 알았기에 "땡큐"라고 답했다. "땡큐"만은 알고 있어서 외국인들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머리를 숙이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어느 날 파란 눈을 가진 젊은 스키어가 싱글벙글거리며 다가와서

"내 스키에 타보지 않을래?"

이런 몸짓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 망설이다가 옆에 있던 아빠에게 물어봤다.

"괜찮아요?"

아빠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태워달라고 해보지 그래?"

토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땡큐, 베리 머취!"

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따라갔다.

비탈길을 꽤 올라간 뒤 그 사람이 자기의 스키 플레이트를 나란히 해서 앞쪽에 토토를 웅크린 자세로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걸까 하는 순간 곧바로 토토를 태운 스키가 자유자재로 연습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미끄럼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고 매끄럽게 요람이 흔들리는 듯한 리듬도 느껴져 무척 기분이 좋아 이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토토가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잡아주고 있었다.

업거나 안고서 타는 게 아니라 스키 위에 아이를 올리고서 타다니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테크닉이었는데 그럴 만도 했던 게 호텔 직원 왈 그 사람은 미국 영화에도 출연했을 정도로 유명한 스키어였다고 한다.

토토는 세계적인 스키어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되어 좀 자랑스러웠다.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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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엄마의 신혼생활은 노키자카에서 시작했으며 토토도 노키자카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빠의 오케스트라 연습장이 있는 곳은 센조쿠이케(현재의 오오타구) 근처였기 때문에 도보로 다닐 수 있는 키타센조쿠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에 토토는 아빠, 엄마, 남동생, 셰퍼드 로키와 함께 살았다. 둘째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난 것도 이 집에 살았을 때였다. 무척 현대적으로 꾸며져서 붉은 지붕에 하얀 벽으로 이루어졌고 베란다도 있으며 바닥엔 판자를 깔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플로링이 되어 있었다. 잘 때에도 이불을 까는 게 아니라 침대에서 잤다.
마당엔 수련이 떠있는 연못이 있었고 베란다 위에는 포도재배용 시렁이 있어서 매년 가을이 되면 달콤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서 맛있게 먹었다. 전쟁이 격해지면서 음식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아빠는 포도 시렁에서 호박을 키웠는데 무척 잘 자라서 가족들이 기뻐했다. 온실도 있어서 아빠가 아침부터 열심히 동양란이나 장미를 돌보았다.
"토토스케, 이리로 와보렴."
아빠가 불러서 토토도 온실 식물들을 같이 돌본 적도 있었다. 장미바구미라는 코가 코끼리처럼 긴 작은 곤충을 장미 봉오리나 새싹에서 떼어내는 일도 했었다.
토토가 입은 옷은 모두 엄마가 재봉해준 것이었다. 그것도 가게에서 팔거나 하지 않을 듯한 참신한 옷들 뿐이었다. 엄마는 "외국 책을 참고한 거야"라고 말했지만 만듦새가 정말 특별났다. 마음에 드는 천을 발견하면 그걸 토토에게 걸쳐보고 토토의 체형에 맞도록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낸 다음 휙휙 꿰매어 순식간에 옷으로 만들어내었다.
"마법사 같아!"
그런 것을 입체재봉이라고 하는 걸까? 새로운 옷이 만들어질 때마다 토토는 깜짝깜짝 놀랄 뿐이었다.
요리를 해도 재봉을 해도 센스가 좋은 엄마는 즐겁게 만들어 갔던 것 같다. 토토가 다니던 토모에학원은 도시락을 그냥 열어서 먹는 게 아니라 상자를 뒤집어 열어서 밑부분부터 먹는 게 유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들 엄마에게 바닥이 윗부분처럼 보이는 그림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졸라댔다.
토토 엄마는 그런 그림 도시락도 잘 만들어내어서 밑바닥 부분에 반찬을 넣어서 뒤집으면 그대로 여자아이 얼굴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 완성도에 다들 놀라서 점심시간만 되면 다들 "보여줘!" "보여줘!"라며 토토 주변에 모여들었다. 요즘 말하는 "캐릭터 도시락"이 실은 2차 세계대전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집 근처에 있었던 센조쿠이케공원은 아이들이 놀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센조쿠이케는 카마쿠라시대에 니치렌쇼우닌이 샘솟는 물로 발을 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연못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투명했고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샘솟는 개끗한 물을 담은 연못의 한구석엔 훌륭한 홍예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토토는 가재를 잡으려고 다리에 걸쳐서 손을 뻗다가 두 번이나 연못에 떨어질 뻔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바로 구해주었다. 이 근처에는 신사나 찻집, 카츠 카이슈와 그 아내의 묘도 있었기에 휴일엔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친카라원"이라는 어린이 놀이터에선 높이가 오 미터 정도 되는 미끄럼틀이 인기를 얻어서 저녁이 되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이걸 타려고 모여들었다. "햐~" 같은 환성을 자아내며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타곤 했다. 무척 높은 곳에서 한번에 내려오기 때문에 코끼리 코나 구름 같은 뭔가 특별한 것에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토는 눈을 감고서 "코끼리 코!"라든가 "다음엔 구름!"이라든가 "마법사의 양탄자!" 같은 것들을 상상하며 타곤 했다.
물론 눈을 뜨고 내려오면서 멀리까지 펼쳐있는 마을 풍경이 휙하고 사라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웠다. 계절에 따라서 하늘의 색깔이 진해지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했으며 구름의 모양도 변화했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 즈음엔 뭉게뭉게 적란운이 어느 새엔가 사라져 얇은 구름이 베일처럼 깔린 하늘을 보기도 했다. "아아... 여름이 끝나버리네." 조금 쓸쓸한 감정을 느끼며 그 구름 베일을 망토처럼 걸친 요정이 된 상상을 하며 내려오기도 했다.
친카라원 근처엔 누구도 살지 않는 저택이 있어서 토토는 곧잘 그 저택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타타미 위를 뛰어다니곤 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집이 카츠 카이슈의 별장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츠 카이슈는 말년에 여기에서 유유자적한 한 때를 보내며 사이고우 타카모리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유서 깊은 집을 신발은 벗고 들어갔다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뛰어다녔던 걸 생각하면 세계대전 전은 정말 관대한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쿵쾅쿵쾅 달려도 술래잡기를 해도 숨바꼭질을 해도 한번도 어른에게 혼나거나 하지 않았으니깐.
카츠 카이슈가 이 곳에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게 된 건 NHK 대하 드라마를 보고 나서였는데 그걸 본 토토는 친척 아저씨를 오랜만에 보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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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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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2. 21:35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

 

행복한 나날

"내일부터 매일 아침 바나나를 먹도록 하자!"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이렇게 선언했다. 어딘가에서 "바나나는 몸에 좋다"라고 들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누구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지만 옛날엔 고급과일이었는데다가 전쟁 후 당분간은 어린이가 병에 걸리거나 하지 않는 한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때만큼 아빠의 선언에 "우와~!"라며 기뻐한 적이 없었다.

보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것 같은 색과 둥글게 커브를 그리는 귀여운 모양새. 껍질을 벗기는 것도 간단하고 안에 들어있는 과실은 끈적하면서 달콤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아침 식탁에 바나나가 올라오게 되었다.

토토네 식사 메뉴는 아무래도 다른 집들과는 다소 달랐던 것 같다. 아직 전쟁의 영향을 그렇게 받지 않아서 식료품을 구하기 쉬웠을 당시 서양식으로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아침밥은 빵과 커피로 고정되어 아빠는 매일 아침 사각형 목제 상자에 커피콩을 넣고서 금속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원두를 갈았다. 서걱서걱서걱! 커피의 향이 퍼져나왔다. 빵도 센조쿠역 앞에 있는 빵집에서 매일 아침 배달해주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이 조금 딱딱하고 엉덩이처럼 생긴 둥근 프랑스빵이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가족 전원이 모이는 저녁 식사 때엔 고기 요리가 나왔다. 아빠가 소고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엄마는 프라이팬에 굽기도 하고 석쇠에 굽기도 하면서 같은 요리가 되지 않도록 연구를 하셨다. 평범한 집이라면 구운 생선이나 생선조림을 먹었겠지만 토토는 아빠 덕분에 언제나 맛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엄마와 토토의 두 살 아래 동생은 생선파였지만.

아빠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신교향악단(현재의 NHK 교향악단)의 콘서트 마스터를 맡고 있으셨다. 러시아 출신 명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에서 따와 "일본의 하이페츠"라고 불리기도 했을 정도로 정기 콘서트 외에도 지방 공연, 레코드 녹음 연주까지 매일을 바쁘게 보내셨다. "일본 제일의 연주가"라는 칭호를 받았던 적도 있다.

아빠와 엄마의 인연을 이어준 것이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토토는 무척 놀랐다.

어느 연말, 아빠는 오케스트라 동료들과 히비야공회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연주회를 열기로 했다. 공연장을 꽉 채우기 위해선 표를 팔아야 했고 제9번이 여기에 알맞은 곡이었기 때문이다. 제9번의 뒷부분에는 "환희의 노래"라는 코러스가 있기 때문에 음악학교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데다가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표를 팔아주었기 때문에 히비야공회당을 손쉽게 채울 수 있었다.

그 코러스 담당 학생들 중에 토우요우음악학교(현재의 토쿄음악대학교)에 다니던 엄마가 있어서 아빠와 만나게 되었다.

그린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그린 베레모를 쓴 모습이 잘 어울렸다고 하는데 모두 엄마가 직접 뜨신 것이었다. 엄마는 무척 아름다웠기에 아빠는 한 눈에 반해버려 아빠가 사는 맨션 일 층에 있는 노기사카 클럽이라는 찻집에서 같이 차를 마시자고 권유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아빠도 잘 생기셨고.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졌다가 전차도 버스도 모두 끊기고서야 정신을 차렸고 아빠는 노기사카 클럽 위에 있는 아빠의 방으로 엄마를 초대했다. 엄마는 당시 코우지마치에 있는 숙부님 집에서 신세를 지며 통학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봤자 다들 자고 있었을 시간이었기에 할 수 없이 아빠를 따라가게 되었다.

엄마는 그로부터 꽤 지난 훗날에도 이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스무 살이나 먹고서 아빠가 가자는대로 순순히 따라갔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원."이라고 하셨지만 엄마 입장에서도 오케스트라 콘서트 마스터에 잘 생기기까지 한 아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조금 기쁘게 받아들이셨는지도. 그건 그렇고 베토벤이 교향곡 제9번을 만들지 않았다면 엄마와 아빠가 만날 일이 없었고 토토도 두 분의 아이가 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참 신기한 일들이 많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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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4. 7. 11. 23:28

난 지금도 셰퍼드가 걸어다니는 걸 보면 작은 목소리로 "로키!"라고 부르게 된다. 로키는 내가 어릴 적 같이 살았던 애완견이었으니 지금도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웃어버린다. 로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세계대전 당시 기운이 좋은 셰퍼드들은 군용견으로 삼기 위해 일본군이 끌고 갔다고 한다. 지금도 전쟁터에 끌려간 로키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난 <창가의 토토>라는 책에 토모에학원에 다녔던 초등학생 시절 있었던 일들을 썼다. 누군가는 코바야시 소우사쿠 교장 선생님의 교육방식을 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쓰게 된 것이었는데 기대도 않았던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면서 어린이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 그게 1981년 일이니 벌써 사십이 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난 "토토 짱"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촌장님이 마을 사람들을 모을 때 "XXXX 토토" "토토 XXXX"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어딘가의 작은 마을에서도 들은 말로 내 이름 같은 게 전해졌을 리 없을 텐데 왜 이러나 싶었더니 스와힐리어로 어린이를 "토토"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런 우연이!

난 어릴 적에 "테츠코"라는 이름을 잘 말할 수 없어서 "이름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테츠코"가 아니라 "토토!"라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들 "토토 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테츠코 짱"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아버지만은 어른이 다 되어가도록 날 "토토스케"라고 부르셨다. 혹시 아버지가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나조차 "토토"라는 이름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토토스케" 덕분에 "토토 짱"이라고 불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창가의 토토>는 내가 아오모리로 피난 가는 시점에서 끝나게 된다. 토쿄 대공습이 일어난 후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사십이 년 전에 썼던 책의 속편을 읽고 싶다는 목소리는 확실히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창가의 토토>보다 재밌는 걸 쓸 수 없다 싶었다. 내 인생에서 토모에학원 시절만큼 매일이 즐거웠던 때는 없었으니깐.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의 "그 이후"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다면 써볼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되었다.

해보자! 라고 생각하기까지 무려 사십이 년이 걸려버렸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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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2024. 4. 22. 19:54

<괴물>을 본 건 사람들이 열광을 하던 시기에서 꽤 벗어났을 때였다. 군 생활이 한창인 와중에 개봉되었으며 그 개봉기간 동안에 휴가를 나오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소식은 계속해서 들렸고 봉준호 감독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봤다기에 후에 중고 DVD를 구매해 보았다. 결과는 글쎄다 싶었다. 이게 재밌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결국 끝까지 이렇다 할 만한 감상은 받지 못했다. 그 때의 영향이었는지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재밌게 보았던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기생충>까지 다 보고도 이런 결말이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 한강 공원에 있는 <괴물> 동상이 철거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애초 한강 공원 같은 곳에 잘 가지도 않으니 동상이 있는지도 몰랐고 위와 같은 감상 때문에 동상이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들렸어도 그러려니 하고 기억에서 지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철거 소식을 담은 기사의 논조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냥 철거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흉물이라느니 무려 2억(!)이나 들였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장식된 기사를 보고 그 동상이 대충 어떻게 세워져 있는지 나타낸 사진을 보니 괜시리 반발감이 들었다. 이게 무슨 경관을 해치는 흉물인가 싶어서.

언제 철거한다고 확실히 정하지는 않고 상반기 중에 철거한다고 했으니 당장은 아니겠지만 보러 가고 싶어졌다. 장소는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마포대교 원효대교 사이 어딘가에 있다 정도 밖에 정보를 듣지 못해서 대충 여의도 한강공원 1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곳에 차를 대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주차장이 원효대교 쪽이니 마포대교를 향해 걸어가면 어디에선가 보이려니 하고... -_-a 표지판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표지판에는 돈이 될 만한 곳만 표시하는 건지 자세한 장소는 표시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무턱대고 갈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짧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발견된 괴물 동상

 

월요일 낮이라 이걸 구경하려고 여기에 온 사람은 나 혼자일까 싶었으나 주변에 커플이 세 쌍 있었고 나 혼자 솔로였다. 한 쌍은 외국인 커플이었는데 외국인들이 이게 철거될 거란 걸 알려나 싶기도 하고 그냥 특이한 동상이 있으니 찍고 가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싶기도... 가까이에서 보니 이게 그렇게 흉물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더 들었다. 이런 동상이 있는 게 그렇게 미관을 해치는 것인지도 납득이 되지 않았고.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 칭송의 대상이고 직접 보면 흉물인 아이러니.

 

왼쪽에 있는 사람들이 외국인 커플인데 찍을 때 같이 찍혀서 지워야 되나 했는데 얼굴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다만 흉물이라면 보존 상태가 흉물이랄까...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곳이 많이 보여서 기껏 세워놓고 관리를 이런 식으로 하나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외부 전시인 만큼 더 신경을 써줬어야 했을 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달까...

 

 

설명판은 더 그랬던 게 사진이 다 바래고 눌어있었다. 이런 걸 하려면 비 같은 것에 젖지 않도록 조치를 했어야 되는 것 아닌지... 영화를 기념해서 만들었다면서 정작 그 영화에 대해 만든 것이 엉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님 이제 곧 철거할 거라고 대충 관리하는 건지. 동상 자체도 영화가 나온 지 한참 지난 시기에 만들어져서 이게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던데 전시행정의 모범사례인 건가.

 

얼마나 대단한 걸 놓으려고 이걸 굳이 철거하겠다고 광고를 해댄 건지 잘 모르겠지만 <괴물> 동상 이상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진다. 찾아보니 한강공원에서 배달시킬 때 <괴물> 동상 앞이라고 하면 다들 알아들었다는 말도 있던데 공원에서 랜드마크가 되는 것의 기준이란 게 뭘까 싶기도 하고.

변희봉 배우는 작고하셨고 다른 주연배우들도 중견배우가 되었다. 많은 드라마 영화 관련 상품이 그렇듯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기억해 주지 않는 한 <괴물>도 쇠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지금일까. 아니면 영화의 상징성 자체가 숫자 위에 놓여진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사례인 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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