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2025. 1. 15. 16:50

후지와라 극단에 취직한 선배로부터 오페라 연출가 아오야마 요시오 선생님이 <나비부인> 공연 조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일의 조수가 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오페라 제작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기에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오야마 선생님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빠를 높이 사고 있었기에 이야기가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 참에 오페라 연출가가 되는 건 어떨까? 토토는 오페라를 좋아하고 나이에 비해 많은 작품을 접해왔다. 자신의 재능을 일 쪽으로 살릴 수 있는 건 극소수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들만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토는 아직 자신의 재능이 어떤 부분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무엇이든 도전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오야마 선생님께서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물어보시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저것 좀 가져오게."라고 말하시면 재빨리 가지러 가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비부인>이 무사히 상연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던 건데 아오야마 선생님이 생각하셨던 <나비부인>의 절정 부분 연출을 뉴욕 오페라 컴퍼니가 꽤 오랫동안 쓰면서 관객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토토가 보아온 선생님의 일 솜씨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였다. 가수의 움직임은 이렇게, 의상은 이렇게, 음악은 이렇게, 미술은 이렇게. 연출가가 작품에 정통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오야마 선생님의 정통함은 장난이 아니었다. 토토로선 발끝에도 못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쫄게 되었다.

미로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토토의 재능은 대체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고민으로 둘러싸인 음악학교 시절에 토토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점심 시간에, 수업 후에, 때로는 수업을 땡땡이 치고서 먹는 라면 한 그릇이었다. 토토가 라면 맛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토우요우음악학교에 다니게 된 뒤부터인데 마음에 들어하는 라면집도 학교 근처에 있었다.

가게 이름은 "타카라켄". 흔히 보는 동네 중국요리집으로 라면 한 그릇에 삼십오 엔이었다. 수타면을 잘 만드는 곳으로 이렇게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었다! 딸랑딸랑하고 문을 열자마자 국물이 자아내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카운터 쪽에 앉으면 사장님이 일심불란하게 면 제작에 열중하는 과정을 볼 수도 있었다.

벽에 뚫어놓은 구멍에서 굵은 대나무 막대가 퓨웅하고 튀어나와 있어서 그 아래에 면을 늘이기 위한 제작대가 있었고 거기에 원반처럼 생긴 면반죽이 놓여져 있었다. 사장님이 대나무 막대에 한발을 올리면 원반에 압력이 가해지도록 만든 것이다. 발꿈치를 이용해서 데굴데굴 대나무 막대를 굴리면서 사장님이 능숙하게 반죽을 늘려냈다.

통통통통.

맑은 소리를 내는 타악기처럼 대나무 막대가 내는 리드미컬한 음이 울려퍼졌다. 면이 "안 돼요, 이 이상은 못 늘어나요!"라고 비명을 지르기라도 할 정도로 얇고 넓게 퍼지게 한 다음 반죽을 접어서 가장자리부터 쓱쓱 잘라냈다. 

면을 치는 작업은 사장님의 기술을 보는 것도 맛있게 느껴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라면의 맛이 너무나 좋았다. 토토는 매일처럼 학교가 끝나고 나서 이 곳에 들렀다.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함께 키시모신 벤치에 앉아서 구운 감자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키시모신은 순산을 돕는 신이어서 배가 부풀어 오른 여자들이 매일처럼 몰려와 참배를 하곤 했다. 친정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온 젊은 부인도 있었고 아이를 몇 명이고 데려와선 "또 왔어요!" 분위기를 풍기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추워보이는 표정을 하고 달려와선 절을 하고 바로 달려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배가 부풀어 오른 개가 신사 경내를 오가는 걸 보고 토토와 친구들이 폭소를 한 적도 있었다.

 

아빠의 복귀

 

그 날이 오기까지 출정 이후 오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게 되었다. 1949년 가을에 "십이 월 말에는 일본에 돌아갈 수 있다"는 엽서를 아빠가 보내왔을 때 가족 모두가 말 그대로 춤추며 기뻐했다. 할머니께서 우편 배달부 아저씨를 불러세워서 경사가 났다며 사례금을 주었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귀환하는 사람을 태운 귀환선이 일본해와 접해 있는 쿄토 마이즈루항에 입항한 뒤 거기에서 기차를 타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이즈루에 가족들을 위한 연락소가 설치되어 거기에 편지를 부치면 아빠가 받아볼 수 있다는 걸 알고서 토토는 편지를 써서 마이즈루에 보냈다.

"아빠 어서 오세요. 오랫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가족들이 신이 나서 아빠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 집은 오오이마치선이 지나는 키타센조쿠에, 전과 같은 장소에 세워놓았어요. 빨간 지붕과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에요. 얼른 돌아오세요."

십이 월이 끝나갈 무렵 아침에 근처 약국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달려와 "오늘 아침 여섯 시 뉴스에서 남편 분이 귀국했다고 말하더군요."라고 하셨다.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있던 아빠가 드디어 일본으로 돌아온다.

노리아키는 아홉 살, 아빠가 출정했던 해 봄에 태어난 여동생 마리는 아빠에 대한 기억도 없는 채 다섯 살이 되었다. 그야말로 긴 시간이 지났지만 시베리아 포로 귀국사업이 1947년에서 1956년까지 이루어졌으니 비교적 빠르게 귀국한 편일 것이다.

가족이 모두 시나가와역까지 마중을 나가자 오랜만에 본 아빠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소중히 안고서 열차에서 내리셨다.

"토토스케! 많이 컸구나!"

아빠는 오 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셨다. 그리움과 기쁨으로 토토의 가슴이 뜨거워져 가득 차올랐다.

그날 밤에 정말 오랜만에 아빠를 포함해 온가족이 단란하게 식사를 했다. 메뉴는 물론 소고기 스테이크였다. 출정하기 전까지 아빠는 부엌에 서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식사가 끝나자 가정부 분이 아빠의 그릇을 치우려 하자 아빠가 바로 일어나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라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모두들 당황했고 엄마도 "어머머?"라고 하는 듯 눈을 둥글게 뜨시고서 아빠를 바라보셨다. 수용소에서의 습관 때문일까? 가정부 분이 곤란해 했지만 엄마께서 "하게 내비둬요. 어차피 이삼 일도 못 갈테니."라고 말하셨다. 이 말대로 일 주일도 되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온 아빠는 가사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귀국한 뒤 얼마간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연이어 찾아와 집이 무척 붐볐다. 아빠는 토쿄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가 되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이전처럼 움직이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었을 당시 이야기만 꺼내면 아빠의 입이 무거워지셨다.

"아빠는 시베리아에서 어떤 일을 했어요?"

토토가 이런 질문을 하면

"시베리아는 추웠어. 영하 이십 도 정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이 수용소 저 수용소로 지붕도 없는 트럭을 타고 가선 바이올린을 켰지."

이 정도 밖에 답하지 않으셨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체험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아빠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추려보면 아빠가 시베리아에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 같다.

아빠가 소속되었던 부대는 소련군에 무장해제를 당해 전원 시베리아 수용소에 보내졌다. 처음엔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했는데 노동환경이 너무나 가혹했고 일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좋은 음식이라는 것도 고량을 섞은 밥이 조금에 소금을 친 오이와 청어절임 정도였고 생선을 싫어하시는 아빠는 이마저도 드실 수 없었다 한다.

아빠가 끌려가셨던 탄광에서는 러시아 민간인도 함께 일을 했는데 그 중 어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게 되었다.

"가족은 있어요?"라고 물어보기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가족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가 "이런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 여기서 도망치려다 총 맞거나 하면 안 돼요. 꼭 살아서 돌아가요."라는 말을 몸짓을 섞어가며 전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 할머니의 말에 상당한 기운을 얻었다고 하셨다.

어느 날 소련군 고관이 불러선 이런 말을 했다.

"듣자하니 자네는 일본에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더군. 이제부턴 일본인 수용소에서 위문공연을 해주게."

시베리아에서 억류되어 언제 조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며 고향을 그리워하던 포로들이 일본 노래를 듣고 싶다 희망했다고 한다. 아빠는 바이올린을 받아 음악을 좋아하는 전우들을 모아 위문음악단을 만들어 여러 일본인 수용소를 돌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황성의 달>이나 <유머레스크> 등을 연주하며 성대한 갈채를 받았다. <토쿄행진곡>이나 <언덕을 넘어> 같은 아빠가 알지 못하는 곡을 요청받았을 때엔 잘 아는 사람이 반복해서 부른 것을 참고해 악보를 만들기도 했다. 지붕이 없는 트럭 짐칸에 타고서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가는 설원을 몇 시간이고 이동하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활동을 하실 수 있었다니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군가를 연주해 달란 요청을 거절해 왔던 아빠가 시베리아에서 이를 악물고 강제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요청곡이라면 군가든 뭐든 열심히 연주하셨다. 귀환 후 토쿄의 거리를 거닐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며 "시베리아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습니다."라며 감사말을 전해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셨다고 한다.

소련군 장교가 "모스크바로 가서 음악학교 선생님으로 남아주지 않겠나?"라는 권유를 해왔을 때 마음이 조금 동하기도 하셨다는데  "일본 여성들은 모두 미군의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빠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모스크바행을 거절하셨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추위와 영양실조로 줄줄이 죽어갔다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아빠가 일본에 돌아오셔서 정말 기뻤다. 만약 아빠가 시베리아땅에서 돌아가셨다면 토토는 아빠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누군가를 증오하며 남은 생을 보내야 했을지도 몰랐을 테니.

시베리아에서 귀국한 아빠가 입고 있던 코트의 가슴 주머니엔 그 날 찹쌀떡과 함께 전해드렸던 가족사진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2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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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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