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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1.21 :: 속 창가의 토토 32
문화/책 2025. 1. 21. 22:17

그 날도 토토는 TV 스튜디오 밖에 있는 벤치에서 책을 읽으며 모두가 끝마치고 오길 기다렸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오오오카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선생님은 토토가 앉아있던 벤치에 미끄러지듯 앉으시면서 언제나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로 

"토토 님, 오늘은 어떤 일을 맡았죠?"

라고 물어보시기에

"카사기 시즈코 씨의 TV 방송에서 와글와글 일을 맡았는데 전표 달아둘 테니 가보라는 말을 들었어요."

TV 방송에서의 와글와글 일은 지나가는 사람 같은 역할이다. 카사기 시즈코 씨가 상가 세트장 안에서 낙하산 스커트를 입고서 "오늘은 아침부터"로 시작하는 <장보기 부기>를 부를 때 토토는 그 뒤를 지나치는 역할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구먼"이라며 노래하는 카사기 씨를 바라보지 않도록 그래도 즐거운 듯이 슥 지나가야 했는데 토토는 길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즐겁겠네 하는 생각에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자 스튜디오 위에서 목소리가 내리쳤다.

"흘끔흘끔 보지마!"

토토는 생선가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정도는 보지 않나 반론을 하고 싶어졌다.

"쓱 지나가, 쓰윽."

토토의 옷을 비롯해 여러 요소가 눈에 띄는 점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토토는 들은 말 그대로 쓱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랬더니 다시 위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TV는 화면이 좁으니깐 그렇게 빨리 가면 어째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단 말야!"

"네."

토토는 천천히, 판토마임 배우 마르셀 마르소가 슬로모션을 하는 것처럼 걸어갔다.

"네가 닌자냐!"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가봐. 전표는 달아둘 테니깐."

스튜디오에서 일어났던 일을 토토가 설명하자 오오오카 선생님은 그 이상 묻지 않고 위로를 해주지도 않으시며 "허, 허, 허"하고 웃으셨다.

"지금 토토 님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며 토토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보시더니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토토는 양성소에 있을 때에도 "그만하면 됐어."라든가 "그런 개성은 드러내지 마!"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그렇기에 혼자서 동기생들을 기다리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럴 때에 위로가 되어준 건 항상 오오오카 선생님이었다. 어디에서 만나게 되든 하루에 몇 번이고 꼭 말을 걸어주셨다.

"토토 님, 어디로 가시나요?"

그 곳이 복도든, 엘리베이터 안이든, 화장실 앞이든 오오오카 선생님의 말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정식으로 NHK 극단원이 된 뒤에도 어디에서든 나타나 "토토 님,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물어보셨다. 오오오카 선생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날 바라봐주고 신경을 써주는 분이 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척 든든하고 힘을 주는 마법주문과 같은 선생님이었다.

그런 오오오카 선생님 덕분에 토토가 아무리 혼이 나고 배역에서 쫓겨나도 "이젠 틀렸어." 같은 자신의 무능력함에 절망감을 느끼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신인이고, 애시당초 동화책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 뿐이니깐."이라 생각하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생각을 너무 안했던 것 뿐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마음을 먹어도 여전히 토토에게 와글와글은 난관일 뿐이었다.

 

독본실에서의 눈물

 

그 날의 슬픔, 분함을 토토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디오의 와글와글 일이 끝나고 나서 제1스튜디오에서 나올 때에 극단 1기생 남자 선배가 불러세웠다. 같은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드라마 주연을 연기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 독본실이 비었으니깐 거기로 가자."

선배는 퉁명스럽게 그런 말을 꺼낸 뒤 스튜디오 앞에 있는 독본실 문을 열고 터벅터벅 들어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선배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무시할 수도 없었다.

독본실은 텅 비었고 어두웠다.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약간 붉은 얼굴에 쓴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선배가 선 채로 토토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너 대사 말야, 그러고도 일본어냐?"

공포감을 느낀 것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토토가 예의바르게 물어봤다.

"제 일본어의 어떤 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어떤 점이고 자시고, 너무 이상하단 말야 죄다!"

토토로선 뭐라 답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토토의 말투가 지금까지 봐온 NHK 극단 사람들의 말투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말의 속도나 와글와글 때의 목소리 크기가 다르다는 정도 뿐이었다.

"너무 빨라!"라든가 "너무 커!" 같은 말을 연출가로부터 들은 적이 많긴 했다. 다른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말하는 법과 속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토토는 여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보다 말투가 빠른데도 그대로 말해버리니 틀어져 버린 것이다. 목소리 크기도 마찬가지로 속닥속닥이라든가 시끌벅적 같은 말을 들어도 "나라면 이렇게 말할 텐데"란 생각에 사로잡혀 조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선배는 토토의 일본어 전부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카무라 메이코의 흉내라도 내는 거냐?"

고개를 숙인 토토를 향해서 선배가 추가타를 날렸다. 나카무라 메이코 씨는 세계대전 전부터 아역으로 활약하던 배우로 방송계를 잘 모르는 토토라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라디오에서 메이코 씨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TV에 같이 출연하게 된 것도 그로부터 좀 지난 후의 이야기였으니 메이코 씨가 어떤 말투를 가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를 들었다 한들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토토는 선배를 향해 외쳤다.

"흉내 같은 거, 낸 적 없어요!"

으스대고 있던 선배가 한 순간 쫄은 것처럼  보였다.

"내일까지 전부 고쳐서 오라고."

선배는 그 말을 내뱉은 뒤 난폭하게 문을 연 뒤 또각또각 소리를 울리며 독본실에서 나갔다.

여태까지도 여러 선배들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지만 "누군가의 흉내를 낸다."는 말을 들었던 것만큼은 토토로서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누군가의 흉내를 낸다면 토모에학원의 코바야시 선생님께서 "넌, 사실은 정말 착한 아이란다."라고 해주신 것이나 엄마께서 "솔직한 것 하나는 장점이지."라고 하신 것을 전부 부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토가 NHK 극단원이 된 뒤로 운 것은 그 전까지도 그 후로도 이 때 뿐이었다.

 

독본실의 콘크리트벽을 주먹으로 치면서 토토는 혼자 울었다. 주먹이 저릿저릿해왔기에 이번엔 발로 벽을 쾅쾅 찼다. 마음 속 슬픔과 분함과 노여움 같은 감정들이 넘쳐나서 무언가에 쏟아내지 않으면 이것을 수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새인가 해가 져서 독본실이 컴컴해졌고 공기도 차가워졌다. 동기생들도 다들 갔을 테니 울어서 부은 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은 없을 것이다.

"흉내 같은 거, 낸 적 없어요!"

한번 더 입에 담아봤지만 토토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선배의 말에 충격을 받은 토토는 그 무렵 NHK에서 대형신작 아동 대상 라디오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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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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