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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 2025. 1. 12. 10:36

지유가오카 영화관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 오락거리라고 하면 영화였지만 피난 중이었던 토토로선 여자 좌장님이 선보인 연극 정도는 볼 수 있었어도 영화관에는 한번도 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토쿄에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이 무척 부풀어 올랐다.

근처 영화관을 꼽자면 그 어디보다도 지유가오카에 있는 난푸우자(南風座)가 제일이었다. 역과 토모에학원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어 역에서 도보로 일 분이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코우란 친구 중에도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서 함께 보러 가기도 했고 혼자 보기도 하면서 방과후 시간을 쏟아부었다.

난푸우자는 창업자가 세계대전 당시 군대 일에 종사해서 세계대전이 끝나자 필요 없어진 비행기 격납고를 받아 여기에 영화관을 차렸다고 한다. 카마보코(가로로 잘린 타원 형태 어묵 - 역자 주) 모양을 하고 있어서 "카마보코 영화관"이라고도 불렸다. 토모에학원도 필요 없어진 전차 차량을 교실로 썼는데 옛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재활용을 곧잘 했었다. 입구에는 종려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영화관 이름에 어울리는 남국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왜 난푸우자를 좋아했는가 하면 제대로 된 신작 외국영화가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굣길 도중에 어딘가 들르거나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토토와 친구는 신작을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기에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난푸우자에 들어가려 필사적이었다.

코우란 선생님들 중에도 난푸우자 팬이 많다는 걸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날 난푸우자에선 인기 시리즈 최신작 상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지라 엄청나게 붐볐고 토토와 친구는 어떻게든 이 영화를 보고 싶었다. 매표원이 "자리가 더는 없어요."라고 했지만 가장 뒤에서 서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기로 했다.

컴컴한 공간 안에서 둘이서 나란히 서서 보고 있으려니 뒤늦게 입장한 여자가 토토의 어깨에 부딪혔다.

"어머, 죄송해요."

낯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모습을 스크린의 어두운 빛이 비추었다.

"앗!"

토토가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곳짱 선생님이었다.

"쉿!"

곳짱 선생님이 검지를 입에 대면서 토토와 친구의 어깨를 두드린 뒤 아무 말도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못 본 척할 테니깐 여러분도 못 본 척해줘요. 어쨌든 영화나 재밌게 보자고요."

곳짱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그런 싸인이 느껴졌다.

이 때 상영된 영화는 밥 호프와 빙 크로즈비란 2대 스타가 같이 출연한 "~로 가는 길 시리즈" 중 하나였다.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는지 <알래스카로 가는 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다리와 난쟁이 콤비가 전세계의 여러 나라로 가는 길에 벌어지는 일을 담은 뮤지컬 코미디였다.

토토는 밥 호프의 말투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상영 후에 곧바로 흉내를 내보기 시작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연습 성과를 피로하니 영화를 보지 않은 친구들도 웃었을 정도였다. 곳짱 선생님도 보신다면 더욱 웃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곳짱 선생님의 손바닥을 떠올리며 참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더욱 영화를 좋아하게 된 토토는 에비스 쪽 영화관에도 가게 되었다. 여기에선 유럽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아침 여덞 시부터 밤 아홉 시 까지 여덞 편 연속으로 프랑스 영화를 상영해서 이걸 보러 간 적도 있었다. 엄마에겐 "내일 학교 행사를 준비해야 해서 평소보다 늦을 거예요."라고 거짓말을 하고서.

그러던 어느 날 토토는 그 후 인생을 좌우할 운명 같은 영화를 만났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토스카>를 영화로 보게 된 것이다!

푸치니가 작곡한 <토스카>는 정열적인 가희 토스카와 화가 카바라도시의 비극적인 사랑이 그려진 작품으로 토스카가 카바라도시를 만나게 되는 교회 장면에서부터 산탄젤로성에서 몸을 내던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토토는 토스카의 음성과 의상에 푹 빠져버렸다.

가희 토스카는 커다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우아하게 등장해 높고 맑은 소프라노로 "아아아~"라고 화려한 노래를 불렀다. 드레스엔 호화로운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하고 커다랗게 파인 가슴엔 흔들릴 때마다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었으며 머리에는 롤 형태로 만든 머리카락이 수십 가닥은 있어서 하나하나 꽃으로 장식해 놓았다.

우와 멋지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을 것도 거의 없었던 토토로선 꿈만 같은 장면이었다.

이 꿈이 토토의 모든 감각을 휘저었다.

이 사람처럼 되자! 토토가 결심했다.

 

오페라 가수가 될래

 

어릴 적 토토는 스파이와 호객꾼과 역에서 표를 파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에 발레 <백조의 호수>를 봤을 때엔 자신도 언젠가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토모에학원 코바야시 선생님 앞에서 "어른이 되면 이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좋아했던 토모에학원은 공습으로 불타버렸다. 학생이 된 토토는 옛날처럼 "ㅇㅇ이 되고 싶어"란 이미지를 명확히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께서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배웠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기에 토토는 그 "하고 싶은 것"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고 <토스카>는 그것이 보이게 된 촉매가 되어주었다.

토토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눌러담은 듯한 오페라 가수라는 직업이 토토의 눈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토토는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쓰지 않고 "오페라 가수가 될래"라고 멋대로 결정했다.

"신께선 어떤 사람에게든 뛰어난 재능 한 가지를 꼭 부여해 주신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재능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고서 그걸로 생을 마친다.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 같은 사람들은 재능과 직업을 잘 맞춰낸 사람들이다."

토토가 <토스카>를 보았을 무렵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 직업과 연결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 결정했어도 어떤 걸 어떻게 배워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코우란 친구들과 상담해 보자 "그럼 역시 음악학교 같은 곳을 가야 되지 않을까?"란 말을 들었다. 토토의 엄마가 음악학교에 다니다가 아빠와 만나 결혼을 했으니 우선 엄마께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은데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로 답이 돌아왔다.

"그러니? 그거 좋네."

 

쇠뿔도 단 김에 빼라. 토토는 그 무렵 코우란여학교 4학년이었다. 당시 학제가 바뀌어 가고 있어서 6-3-3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다. 예전 제도상으론 중학교는 5년제였지만 4학년 때에 졸업을 하고선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토토도 4학년에 졸업하고서 음악학교로 진학했으면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음악학교에 들어가 하루라도 빨리 능숙해지면 더 빨리 배역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척이나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리 생각하게 된 건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도에도 원인이 있었다 본다. 그 길다란 줄! 당시 토토로선 줄 앞쪽에 서야만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빠른 자가 이긴다는 발상에 젖어있었다.

토쿄를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몇 곳이나 되는 음악학교의 접수창구에 "입학하고 싶습니다만."이라고 말해보았는데 학교 중엔 "얼마나 기부하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대놓고 물어보는 곳도 있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었기에 학교 건물을 다시 짓기도 하고 변경된 학제에 대응하기 위해 커리큘럼을 보충하기도 하는 등 당장 필요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좀 생각해 보니 기부액이 합격을 결정하게 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한들 아쉽게도 이런 답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겐 비밀로 하고 시험을 보러와서 기부 같은 건 무리입니다."

"아버지에겐 비밀로 했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여자가 일을 하는 것, 하물며 가수가 된다니 그런 업계에서 고생을 하는 꼴을 볼 수 없다 생각하는 분이라고 엄마께서 말씀하셨다.

추리고 추려낸 후보 몇 곳 중 엄마도 다니셨던 토우요우음악학교에서 기부금 같은 걸 내지 않아도 그냥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고 무사히 합격해 토토는 토우요우음악학교 학생이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충격적인 일이 있었는데 토토가 보았던 <토스카>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본인이 부른 것이 아니라 다른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준 것으로 토스카 역 배우는 거기에 맞춰 입만 뻥긋했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동급생 남자애가 쓰잘데기 없이 말하길

"그 있잖아? 소프라노는 추녀고 테너는 근육 밖에 모르는 멍청이라는 말. 그거랑 같은 거야."

토토도 소프라노 지망이었다.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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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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