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친구
토토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빠 덕분이었다. 아이 돌보기를 엄마에게 맡겨두기만 했던 아빠는 토토에게 책읽기를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로서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밤에 토토가 침대에 누우면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와 의자를 침대 옆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낭독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아빠가 읽어준 책 중엔 소설이 많았다. 그 즈음 토토 나이를 생각하면 그림책이 어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쓴 <쿠오레>나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쓴 <소공자> 등등 여러 소설들을 매일밤 조금씩 읽어주셨다. 그 중에서도 토토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쿠오레>였지만
"아빠가 열심히 읽긴 하시지만 그다지 잘 읽지는 못하시네. 토토가 어른이 되면 자기 아이에게 책을 재밌게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입원했을 때에도 토토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으면 아픔이나 간지러움, 불안한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입원이 길어진 탓에 직접 책을 읽는 습관을 체득하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도. 그림책이나 어린이 대상 책만으론 질리게 된 토토는 퇴원 후에 아빠 책장을 물색하게 되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 시가 나오야가 쓴 <암야행로>였다.
"어디 보자..."
토토는 눈 앞에 있는 갈색 표지로 된 책을 집고서 펄럭펄럭 넘겨보았다. 아빠가 읽는 책은 두껍고 무겁고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봐도 그림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으며 글자도 작았는데 당시엔 한자에 전부 요미가나를 써놓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니 그런대로 읽을 수는 있었다. 동화나 그림책처럼 삽화가 없는 만큼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복장이나 머리카락 모양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책만 있다면 기분이 좋아지는 토토를 보며 아빠와 엄마는 <일본소국민문고>라는 어린이 대상 문학 전집을 사주셨다. 다 해서 열 권 이상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토토가 좋아했던 책이 <세계명작선>이란 제목을 단 책이었다.
그 책엔 레프 톨스토이, 로맹 롤랑, 카렐 차페크, 마크 트웨인 같은 작가의 작품과 칼 부세의 시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같은 것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어린이 대상 책 치곤 상당히 호화로운 내용이었다.
토토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핑크트헨과 안톤>으로 부잣집에서 자라난 핑크트헨과 가난하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안톤의 우정 이야기에 푹 빠졌다.
토토네 집에선 과자를 사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책을 외상으로 사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다. 책장과 눈싸움을 벌이며 한 권 한 권 집어보고서 "이거다!"라고 생각되는 책이 보이면 계산대에 앉아있는 아저씨에게 "쿠로야나기인데요, 이 책 외상으로 달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리고선 손에 넣은 책을 품에 넣고서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런데 서점의 책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빗이 이가 빠진 것처럼 책장에서 빈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세계대전 때문인데 물자부족이 인쇄용 종이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출판사가 좀처럼 책을 찍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황량해지는 책장을 바라보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어느 날 토토가 하굣길에 서점에 들러봤지만 역시 책장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텅텅 비었고 책이 아니라 책장 장사로 가게를 바꾸셨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히 어린이 대상 책장에는 한권도 없었다. 그래도 토토는 책장 구석에 놓여져 있던 얼마 없는 책들 중에 한 권을 집었다. 그건 <신작라쿠고>라는 책이었다.
정말 안 팔려서 놓여 있던 거겠네 하는 생각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읽어봤는데 이게 의외로 재밌었다.
도둑이 들지 않도록 집안 곳곳에 방범장치를 해놓았더니 자기가 거기에 걸려버린 얼빠진 집주인 이야기나 툭하면 방귀를 뀌어대서 시집을 가지 못했던 부잣집 아가씨가 간신히 결혼하게 되었더니 첫날밤에 참았던 방귀가 나와 그 기세에 남편이 방안을 일곱 번 반이나 날아다니다 기절한 이야기. 나오는 등장인물마다 얼간이거나 웃음이 터질 수 밖에 없는 결점을 가진 사람이거나 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댄 토토는 역시 책은 좋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대두 열다섯 알
세계대전 중 토쿄의 겨울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추웠다고 생각한다.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파."
토모에 학원에서 돌아오는 동안 토토와 친구들은 다들 그런 말을 하며 걸어갔다. 간단한 곡조를 붙여서 자신들의 테마송이라도 된 양 부르고 다녔던 적도 있다.
쌀이 배급제로 바뀐 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들이 점점 폐업하기 시작해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고구마, 대두, 옥수수, 수수 등이 "대용식으로써 배급되었다.
매일 먹는 도시락이 하얀 쌀밥에서 대두로 바뀌었을 때엔 정말 배가 고파 살 수 없겠다 싶었다. 토토는 운동회 도시락에도 하얀 쌀밥이 완전히 사라진 걸 보며 "작년 운동회 도시락은 엄마가 만들어주신 달콤한 유부초밥이었는데."라고 회상하며 슬퍼했다.
어느 추운 날 아침에 학교에 가기 전에 엄마가 프라이팬으로 볶은 대두가 열다섯 알 들어간 봉투를 건내셨다.
"잘 들으렴, 이게 테츠코가 오늘 하루 먹을 음식이야."
엄마는 토토의 손에 봉투를 놓았다.
"서둘러서 전부 먹으면 안 된단다. 집에 와도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으니깐 언제 몇 알을 먹을지 네가 잘 나눠야 해."
그런가, 오늘부터 도시락이 콩알 뿐이구나. 배가 고파도 한꺼번에 먹으면 안 되는구나.
"먹은 뒤에 물을 많이 마시렴. 그러면 배가 찰 수 있거든."
엄마는 몇 번이고 토토에게 강조했다.
"열다섯 알이라... 그럼 아침엔 세 알을 먹자."
그렇게 결심하고서 학교에 가는 도중에 우선 한 알을 먹었다.
"오독오독오독"
어금니로 씹고 있으려니 첫 대두가 순식간에 입 안에서 사라졌다. 그럼 두 알 째.
"오독오독오독"
이것도 순식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알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벌써 세 알째야?"
학교에 도착한 토토는 엄마가 말씀하신대로 물을 잔뜩 마셨다.
"아까 먹은 대두가 뱃속에서 물을 잔뜩 머금고 불어오를 거야."
토토는 뱃속 모습을 상상했다.
"앞으로 열두 알이네."
토토는 대두가 들어있는 봉투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수업을 듣는 와중에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토토와 친구들은 교정 한구석에 있는 방공호로 피난했다. 방공호 입구를 닫자 그 안은 어두컴컴해졌다. 처음엔 몸을 둥글게 말고 숨을 죽였지만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봤어."라고 누군가가 말하자 토토도 "나도"라고 답했다. 좀처럼 경보해제 사이렌이 울리지 않자 어두컴컴한 방공호 안에서 대두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토토는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한 번에 두 알,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입에 넣었다.
"오독, 오독오독"
지금 당장 남은 대두를 전부 먹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지금 이걸 먹어버린다면 귀가 후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었다.
"참자 참아..."
그런 말을 하며 토토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대두를 열 알 가지고 있어. 어쩌면 지금 당장 이 방공호에 폭탄이 떨어져서 모두 죽을지도 몰라. 그럼 지금 먹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방공호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고 집이 공습으로 불타버려서 돌아가보니 아빠와 엄마가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럼 어떡하지? 역시 남아있는 열 알을 지금 먹는 게 나으려나?"
빙글빙글, 빙글빙글, 여러가지 일을 생각하니 토토는 슬퍼졌다.
"집이 타지 않아야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알을 먹었다.
좀 지난 뒤 공습경보 해제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토토와 친구들은 겨우 방공호를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돌아가도 좋아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집이 가까워질수록 불타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에 나왔을 때 그대로인 집이 보이자 안심할 수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집은 타지 않았고 엄마와 아빠는 살아있어. 게다가 대두도 아직 여덞 알 남아있고."
토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배가 너무 고파 잠이 오지 않을 때엔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리며 놓았다. 그 놀이는 엄마가 발명한 것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림으로 그리고서 "잘 먹겠습니다" "우물우물" "더 주세요"라고 말하며 먹는 흉내를 내었다. 달콤한 계란말이나 구워진 고기 그림을 그리고서 "우물우물"을 반복했다.
배급이 해조면이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해변에서 캐낸 두꺼운 곤포를 빻아서 곤약을 우동처럼 길게 뽑아낸 것에 섞은 것이 해조면이었다. 왠지 개구리알 같아서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조미료도 떨어져 가니 그저 물을 끓여서 개구리알을 후룩후룩 먹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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