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기사 2018. 10. 3. 14:59

인권운동가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정치활동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은 여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Israa al-Ghomgham(29) 씨는 아랍의 봄 당시 남편 Moussa al-Hashem 씨와 함께 Qatif 동쪽 지방에서  반정부 단체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2015년 12월에 체포되었다. 이달 초 Riyadh시의 특수범죄 법정에서 열렸던 심리에서 검사는 Ghomgham 씨와 다른 피고 다섯 명에게 테러방지법을 적용하도록 구형했다. 활동가들은 현재 10월로 예정되어 있는 항소심에서 이 결정이 뒤집혀질 수 있도록 로비를 하고 있다. 만약 구형이 그대로 선고된다면 이 판결은 왕국에서 모든 사형 건에 대해 승인권을 가지고 있는 Salman 왕에게 전달될 것이다.



독일에 위치한 사우디 인권단체 유럽지부(ESOHR)에 의하면 Ghomgham 씨는 "유명한 인권수호자"이다. ESOHR 이사인 Ali Adubisi 씨는 성명에서 이 결정이 매우 보수적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여성 활동가들에게 "위험한 선례"를 안기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단체는 Ghomgham 씨를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Ghomgham 씨가 삼 년이나 갇혀 있는 동안 변호사도 만날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Ghomgham 씨는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고 정부가 시아파를 차별하는 것을 중지하고 시아파가 주를 이루고 있는 Qatif 지방에 누명을 씌우는 것을 중지하라고 요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The Independent 지의 인터뷰 요청에 불응했다. Ghomgham 씨 사건은 최근 수 주간 사형과 관련된 잘못된 소식이 아랍어권 언론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계속 전달되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Qatif 지방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시아파 시민들에 대한 차별을 멈춰달라는 요구를 한 이후 주기적인 집단체포와 자살폭탄 차량, 공안기관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작년 여름에도 The Independent 지는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가 Qatif 지방의 Awamiyah 마을에 있는 무장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겠다는 명목으로 군대 파견을 한 이후의 참상을 보도한 바 있으며 많은 주민들이 십자포화와 극심한 포위망에 목숨을 잃은 시민들이 있음을 증언했다.


작년에 Mohammed bin Salman 왕자가 왕세자로 지목된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는 석유 수출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시도했다.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고 악명높은 종교경찰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등 뒤늦게나마 바뀐 조치들이 환영을 받는 한편 왕정이 내리는 사형에 대해선 자유로운 발언과 접근을 할 수 없다는 비판점이 있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형수 수용소엔 최소 쉰여덞 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추측되며 Amnesty International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 중 최상위에 올라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에 나온 UN 보고서 또한 올해 5월부터 수십 명을 혐의도 밝히지 않고 체포하는 등 여성인권 운동가를 탄압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전문가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얼마되지 않는 시민단체들이 아닌 왕족이 이루는 정부가 왕국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하겠다는 신호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https://goo.gl/MKXUVN



이 기사는 8월에 나왔던 기사이다. Israa al-Ghomgham 씨의 재판은 10월 28일로 예정되어 있으며 이 재판에서 사형 선고가 확정될 수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도 여성 인권에 대해서 여느 나라보다 뒤쳐져 있으며 사형에 대해서도 거리낌이 없는 나라이고 기사에 의하면 이것이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고장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니 사형이 선고될 확률이 매우 높다. 서명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나오긴 했는데 (서명 페이지) 삼만오천 명 목표도 못 채우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대상에서도 멀어졌다는 걸까?  그렇다 해도 최소한 누군가에게 알리기는 해야겠다 싶었다. 전에 여성 운전면허 허용 가지고 그 난리가 나는 걸 보며 결국 사우디 아라비아 왕정의 이익에 부합하니 풀어주는 것일 뿐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저러나 싶었는데 당연하다시피 그 한편에서는 이런 일이 진행형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런 나라를 미국이 좋아하니 더더욱 답이 없지 키득. 사우디 아라비아가 바뀌는 건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뤄지지 못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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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갔는데 영화 외에도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는 로힝야족의 난민 사태에 대해서이고 하나는 독일로 파견되었던 간호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다. 한국에선 독일로 파견되었던 선생님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선생님들 당신의 이야기로는 독일 파견 이야기야말로 하나의 기회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에 막상 왔을 때엔 교육 없이 바로 투입된 분도 있었고 환자의 수발을 일일이 다 들어야 하는 등(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에 잘 나와있다)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도 있고 고향 땅이 그리운 것도 있었겠지만 적응을 하고 보니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하는 한국의 사회와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독일이었던 것이다. 번 돈으로 차도 직접 몰고 다닐 수 있었고(사우디 아라비아 이야기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노동절에 한복을 차려입고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을 할 수도 있었다.(지금 한국 간호사들이 노동운동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요즘엔 태움 같은 이야기가 많이 돌아서 완화되긴 했지만...)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독일에서 쫒겨나게 될 뻔했을 때에도 당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독일 정부에 맞섰고 그 결과 독일 영주권을 쟁취해내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위와 같이 레즈비언이었던 분들도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지금도 가족에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털어놓았다가 관계가 파탄난 경우가 나오고 그런 결과가 나올까봐 두려워 숨기고 있는 LGBT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1960,1970년대면 말 다한 거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어거지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물론 그 때에도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같이 살았던 분들이 있다고 하지만 극소수이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 오니 이런 것마저도 자유로웠던 것이다.

내가 어제 짜증을 냈던 획일적이고 왜곡된 역사관 강요의 폐해솔직히 그냥 맹목적 문재인 지지의 폐해...를 이런 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을 강조한 나머지 정작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정작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유리천정을 논하고 있는 판인데 그 당시 독일로 일을 하러 갈 수 있었던 선생님들을 불행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국가주의를 내세운 박정희식 생각은 이제 걷어치울 때가 지나도 너무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807447


영화 <공동정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어디까지나 폭도여야 하는 것처럼 구는 자칭 보수 쪽의 태도도 짜증나지만 어디까지나 불쌍한 피해자여야만 하는 것처럼 구는 자칭 진보 쪽의 태도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피해자"로만 보려 하다가 <공동정범>식의 카메라가 작동하자 동정 속에 숨기고 있었던 속내를 드러냈다는 게 참으로 아니꼬왔다.


이 때 어딘가에서 들려왔던 비명에 가까운 "에엑?"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누군가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도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자기 자신, 개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아무리 동정이라 한들 일방적이고 독선에 가까운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난 그런 것이 싫다.

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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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님이 보고 계셔>에서 나온 판쵸라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싶음... -_-a

남자 입장에서 여자의 가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치료에 필요한 것을 이런 식으로 주관적인 판단으로 회피하는 것이 옳은 건가 싶다. 무슨 여호와의 증인 같은 곳에서 수혈 안 받으려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사회적인 구조가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보면서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한다는 명목 하에 가슴을 드러내는 일을 금기시해 왔고 그런 관성이 지금도 계속 전해지고 있다. 이에 반발해서 상체 드러내기 운동까지 펼쳐졌지만 결국 신문 등에서 19금 처리하여 실제 사진이 공개적으로 실리지 않았으니 결국 사회의 관성은 여전히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여환자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강간을 한 의사의 사례도 분명히 있다. 이런 점이 작용하면서 위와 같은 트윗이 날아다녔는데... 하지만 이렇게까지 불신을 해야 되는 건가하는 점은 의아하다. 케쉐르 님 말대로 정말 불안하다면 보호자를 동반하거나 하면 될 것인데 남자 의사를 무조건 못 믿겠다면서 제대로 진료할 수 없는 방법을 채택하겠다면 그냥 끝이 없어진다. 어느 과든간에 의사는 성별에 관계없이 존재하고 사회의 관성으로 인해서 남자 의사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럼 이걸 일일이 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이렇게 하면 여자 의사 수요가 더 늘어날 테니 여성병원이라고 광고를 붙이는 곳들처럼 여자 의사 공급이 더 늘어날지도... -_-a

예전에 트위터에서 여자의 가슴 노출에 대해서 한 사람과 말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난 사회적 구조상 그런 걸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무리라고 했고 그 사람은 가슴이 작으니깐 창피해서 노출을 하지 않는 거라는 괴상한 논리(?)를 내세웠다. 그 때 일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더욱 복잡해진다. 결국 여자들에게 입혀져 있는 코르셋은 앞으로도 계속 벗겨지기 힘든 걸까? 난 오히려 이런 제약이 있기 때문에 성평등이 이뤄지기 힘들고 어떻게든 시도를 해볼 기회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르겠다. 결국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에서 그칠 테니 뭐...

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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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것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 같은 곳에서만 이뤄지는 것이고 한국에 이런 개념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경각심을 가졌다. 이 때나 그 전에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동일한 개념인 것으로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니깐 한국에서 개인보다는 공동체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 같은 대도시는 삭막한 사회, 시골은 정이 넘치는 공동체로 묘사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요즘 들어선 한국 시골도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엔 무리가 생겼는지 외국의 두메산골을 찾아다니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가끔씩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하는 때 외엔 TV를 안 봐서 정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대중문화가 당연하다시피 돌아다녔던 시절에 성장기를 거쳤으니 나도 개인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공동체주의가 더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상을 바꾸게 된 것이 장애인 문제였다. 


http://news1.kr/articles/?3271190

교육감도 소신대로 했다는 이유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


 가장 가까운 예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문제가 있다. 장애인들이 편하게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로 짓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구에 이미 있다!"를 논리를 내세운다. (그걸로 충분하면 뭣하러 반대를 무릅쓰고 짓는다고 생각하는지...) 이 대신 한방병원을 지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우는 것이 장애인이 다니는 것 자체가 자기 동네에 불이익이 된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원래 내가 인식해왔던 공동체주의라면 다른 사람이 불편함을 겪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설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반대한다면 타인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집단이기주의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집단이기주의는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옛날 공동체를 생각해 보면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그냥 방치하는 방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옛날이야 그런 동네 바보형이 한 동네에 한둘 있을까 말까했지만 도시가 생기면서 이런 바보형들(생각해 보면 이런 곳에 누나라는 단어는 없다. 옛날 바보누나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진다. 정신적인 문제뿐 아니라 육체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이 모이는 시설도 마찬가지다. 그 곳은 혐오시설이 되고 이런 시설 하나 짓기 위해 장애인들의 가족들은 마음으로든 신체로든 무릎을 몇 번이고 꿇어야 한다. 시설이 지어지지 않는 것만의 문제로 보기도 힘들다. 그냥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근처에 장애인이 앉아 있을 확률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만큼 장애인들은 집단 앞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오아시스> <Wonder>


비장애인을 돌아봐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여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면 가정 내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강요당해 왔지만 이게 사회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된다. 동네에서 잔치가 열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 잔치를 준비하는 모습에 남자가 들어갈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쉽게 들어가지지 않는다. 어떤 걸 설치하거나 하는 일은 남자가 해도 힘은 덜 들어가지만 그에 비해 시간은 상당히 긴 준비와 뒷정리들은 모두 여자가 맡고 있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된다. 실제로 지금도 그런 식인 것 같고.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서 여자들의 희생이 강요된다면 그것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같은 일부 힘이 있는 사람들의 친목회에 다수의 힘이 없는 사람들이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여자들이 불이익을 넘어서 성적으로 위협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미투 운동으로 알리기 시작하자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지금도 이런 개판 오 분 전 상황인데 옛날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만 그 이상도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마을을 위해서 남편과 사별한 여자에게 목숨을 끊게 하여 열녀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꽤나 신빙성 있게 들린다. 아니면 독수공방하게 된 여자를 위해서 보쌈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여자 개인의 삶은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남성 위주의 집단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나 진배없다.


손목을 비틀비틀


LGB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혐오 세력에 대해서 이건 차별이다를 계속 외치니 기껏 한다는 말이 "내 눈에 띄지 말라"였다. 그런 말이나 지껄이는 모습을 보는 내 눈은 어쩌고...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동성애자이건 자기의 몸과 마음이 품고 있는 성이 다르건 간에 기존의 관습에 따라 결혼을 하게 되고 그것을 마을의 경사처럼 여기는 것이 옛날의 공동체였다. 옛날 기록에도 동성애 관련 기록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록에 불과할뿐 그것을 존중하는 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힘이 없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공동체를 좋게만 볼 수 있을까? 이것이 좀 더 나가게 되면 국가주의가 되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되고 일부의 마음에 드는 사고방식에 반하는 사상은 배척당하는 세상. 한국식 민주주의를 외쳐도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던 세상. 자기들의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사생활을 가지고도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세상.

이렇기에 개인주의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이 존재를 인정하기 위한 개인주의인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본 결과 얼핏 보기엔 효율적으로 생각되는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끄는 방식이 많은 사람이 이끄는 방식보다 뒤쳐지는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이 과정이 지난해 보일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끌고 갈 때에 보이지 않았던 측면을 여러 사람이 끌고 갈 때에 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가 악인 것처럼 말을 해왔지만 내가 짚는 것은 공동체를 가장한 일부의 권위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이다. 이런 것을 내포하고 있는 허상의 공동체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일개 개인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개개인이 같이 이뤄내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서로의 개성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나중에로 억누르는 한 이러한 진보는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같은 선상으로 놓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정말 제대로 된 개인주의는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의 행복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타주의이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개인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말해왔듯이 집단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대로 된 공동체의 화합을 만들려면 이러한 이기주의를 다수의 합의에 의해 억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로선 이런 면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 아리송한 면이 있지만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발전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을 틈틈이 해봤는데 막상 글로 옮기니 갈수록 중구난방이 되는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활용하느냐이지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념의 작용을 풀어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귀찮은 일이기에 결국 개념 자체에 원죄를 뒤집어씌우는 오류를 흔히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일고 있는 개헌 바람도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꾼다 한들 좋은 방향으로 바뀔 확률이 높은 건지 알 수 없는 대통령 임기와 의원내각제를 서로 당리당략에 맞추어서 싸우고 있을 뿐이지 정말 원래의 헌법이 그렇게 잘못된 건지, 법률로 정하면 될 일들까지 시시콜콜 개헌에 맞추고 있는 것이 맞는 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바꿔버리면 나중에 아베나 시진핑 같은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차라리 엎어지는 게 답인 건지도...

제대로 된 마무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는 생각났나 싶지만. 그냥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글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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