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 2025. 1. 26. 13:39

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쁘다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TV도 라디오도 주당 몇 개고 고정출연을 하는 곳이 있었고, 매일 다른 대본을 외우고, 연습을 해서 본방송에 들어가고, 그 틈틈이 회의도 해야 되고... 집으로 올 때엔 당연하다는 듯이 심야택시를 이용했고 침대에 누워서 세 시간만 있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그래도 누가 뭐래든 젊으니 이런 것 쯤이야 하고 무아지경 상태로 견뎌냈다.

당시의 황태자와 미치코 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무렵 드라마 본방송을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이명 현상이 일어났다. "키잉~"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상대방의 대사가 들리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토토는 친한 병원 원장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용태를 설명했더니

"그대로 계속 일만 하고 있으면 죽을 거예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 말에 펄쩍 뛰다시피 한 토토는 시간을 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생님께서 "과로가 심하네요. 곧장 입원해요."라고 말하시기에 토토는 NHK에 돌아가 감독님 등 관계자들에게 "입원을 해야 하니 쉬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예정을 갑자기 바꾸는 건 어려웠기에 "그럼 안 되는데."라든가 "다른 방송은 몰라도 이 쪽은 해줘요."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토토도 이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고 "내가 없으면 NHK가 망하려나?" 같은 농담을 하며 설렁설렁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토토는 그 때까지 건강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명 현상 정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며 자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 현상은 더더욱 심해졌다. 어떤 날 아침엔 일어나보니 양 무릎 아래에 직경 오 센티미터 정도 되는 붉은 꽃이 핀 것 같은 반점들이 상당수 보였다. 엄마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엄마도 평소와는 다르게 "바로 병원에 가렴"이라며 안절부절 못하셨다. "죽을 거예요"가 떠올랐다.

서둘러서 병원에 달려가 선생님께 진찰을 받았다.

과로는 여러가지 증상을 동반해 나타난다고 하는데 토토의 경우엔 이명 현상과 붉은 꽃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면부족 등이 원인이 되어 다리의 모세혈관이 약해진 것이다.

"일을 쉬고 입원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나을 거예요."

선생님 말씀대로 일 개월 동안 입원하기로 결정했지만 정했다 해서 방송 관계자 얼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주는 건 아니었다. 고정출연 방송을 펑크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답이 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쯤 되자 토토가 간절히 부탁드려본 결과 방송 관계자들도 "몸이 재산이니 치료에 전념하세요."라고 말해주었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출연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계절>을 봤을 때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이 TV 드라마에서 토토는 아츠미 키요시 씨가 연기하는 요리사의 아내 역할을 맡았다. 가게에 단골손님이 찾아와 "어라, 사모님은요?"라고 물어보자 아츠미 씨가 "잠깐 친정에 내려갔어."라고 답해주었다.

그런가. "친정에 내려갔어."라는 한 마디로 정리가 되는구나. 토토가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연기했던 배역이란 그 정도였던 건가.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친정 가는 길에 죽었어."가 되어버리려나...

사회를 맡았던 방송을 보니 더욱 슬펐다. 토토 대신 나온 분이 "쿠로야나기 씨는 병으로 인해 쉬게 되었습니다만, 한 달이 지나면 복귀하실 겁니다. 그 때까진 제가 대신해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했다면 토토도 병실에서 안심하며 지켜볼 수 있었겠지만 토토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안녕하세요"라며 방송을 바로 시작해 버렸다.

"이럴 수가 있어? 병원에서 확실하게 나은 다음 반드시 저기에 다시 설 테다!"

복귀를 향한 정열을 불태우게 되었다.

현장이란 비정한 곳이라고까진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온정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현장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입원하고 있던 한 달 동안 토토는 그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퇴원했을 때 토토는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죽기 전까지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해주셨다.

"좀처럼 듣기 힘든 질문이네요. 지금까지 그런 걸 물어본 사람은 아예 없었고요. 그래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토토는 그런 거야 간단하다는 생각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즐거운 것들을 차례차례 입에 담아봤다.

"내일 연극을 보러가고, 모레엔 맛있는 레스토랑에 가고, 그 다음날엔 영화관에 가고, 그 다음날엔 백화점에 가고..."

"누가 놀기만 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라고 한 건 자기 스스로가 하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들을 골라서 해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면 사람이 병에 쉽게 걸리거나 하지 않아요. 하기 싫어, 너무 싫어라고 생각하면 이게 쌓이면서 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죠."

당시엔 아직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토토는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하기 싫다고 생각되는 일은 받지 않도록 하고 자기가 맡고 싶다 생각이 드는 일만 해왔다. 물론 TV 일도 연극 일도 즐거우니 계속해 온 것이다.

퇴원일을 맞이해 NHK 관계자들에게 "퇴원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모든 현장에서 "당장 돌아와주세요."란 답이 돌아왔다. "이제 당신이 있을 곳은 없어요."라고 하는 현장은 하나도 없었다.

 

오빠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은 매우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토토가 출연했던 방송을 몇 개 소개하자면 우선 <부 푸 우>가 있었는데 TV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인형극으로 1960년 9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육 년 이상에 걸쳐 방송되었다. 이것도 이이자와 선생님의 작품으로 아기돼지 삼형제가 주인공인데 투덜투덜대는 부, 의욕이 없는 후, 노력가인 우 중에서 토토는 막내인 우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1961년 4월부터 방송된 <마법융단>은 헬리콥터에서 공중 촬영을 하거나 영상 합성 기술을 구사했던 아동 대상 방송이었다. "아브라 카타브라!"라는 주문을 외우면 아랍풍 의상을 입은 토토와 터번을 두른 두 초등학생이 탄 마법융단이 그 아이들의 초등학교 상공까지 날아가는 방식을 이용해 호평을 받았다.

교정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인간문자를 만들어서 환영해 주기도 하는 등 아이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지만 토쿄 올림픽 중계를 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하다며 사용 허가를 내주지 않아 종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 년 넘게 이어온 인기방송이었던지라 지금도 가끔씩 "융단에 탔던 초등학생입니다."라며 모습이 완전히 영감님으로 변한 분들이 말을 걸어주시곤 한다.

성인 대상 방송도 많이 나오게 되어 1961년 4월부터 시작한 두 방송에 토토가 고정출연을 하게 되었다.

<꿈 속에서 만나요>는 토요일 밤 열 시에 방송되어 오 년간 계속된 전설적인 음악 버라이어티 방송이었으며 <젊은 계절>은 긴자의 프랭탕이라는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그린 코미디 드라마로 지금은 대하드라마가 고정적으로 편성되어 있는 일요일 밤 여덞 시에 방송되었으며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도 사카모토 큐우도 죄다 출연해서 "스타가 마흔다섯 명이나 나오는 방송"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꿈 속에서 만나요>도 <젊은 계절>도 실시간 방송이었는데 대본은 이틀 전에야 나와서 대사를 외우고 연습을 하려면 지금으로선 절대 있을 수 없는 빡빡한 스케줄로 움직여야 했기에 수 년 동안 주말에 제대로 잔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많은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할 수 있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젊은 계절> 대본이 지연되어 방송 당일에야 완성된 일이 있었다. 대본을 따로 인쇄할 틈도 없어 복사본을 돌렸는데 당시 복사본은 지금과 달리 진한 보라색으로 찍혀 나왔고 축축한데다가 가지고 있으면 식초 냄새가 풍겨왔다. 몇 부고 쌓여있는 탁상 아래엔 물방울이 떨어져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아츠미 키요시 씨와 만난 건 1960년 TV 드라마 <아버지의 계절> 스튜디오에서였다. "에노켄"이란 별칭으로 불리던 에노모토 켄이치 씨가 주연을 맡았으며 <젊은 계절>의 전신 격인 드라마로 아츠미 씨는 토토의 맞선 상대 역할로 도중참가를 하게 되었다.

아츠미 씨는 아사쿠사에 있는 프랑스자라는 스트립 극장에서 코미디언으로서 활약해온 일류 개그맨이었다. 프랑스자에서는 아즈마 하치로우 씨나 세키 케이로쿠 씨를 필두로 훗날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코미디언들이 즐비했으며 콩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 씨도 있었다.

"아사쿠사 극장에서 좌장을 맡으셨던 분이세요."

NHK 사람이 소개해 주었다.

"쿠로야나기 테츠코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아츠미 씨는 작은 눈 안의 검은 자위를 휙 움직였다.

우와, 이렇게 눈초리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가 토토가 아츠미 씨에게 품은 첫 인상이었다. 어깨에 힘을 주며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해온 아츠미 씨는 거기 있던 사람들 전원에게 경계심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아츠미 씨는 무척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렇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연습이 시작되자 토토가 맞선을 봐서 결혼까지 갈 수 있는 상대방 역할로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가 끝나자 다시금 퉁명스러워졌지만 주 1회씩 연습과 본방송 촬영을 들어가니 이러면서 익숙해지겠거니하고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이래 몇 주가 흘러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토토가 뭔가 말하자 아츠미 씨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뭐야 이 년은!"

이라며 한층 위압을 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년"이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건 처음이라 심술을 부리거나 비꼬는 말이 아니라 솔직한 심정을 담아 "이 년이라 하심은?"이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츠미 씨가

"아아, 됐다됐어. 이런 여자는 정말 싫다니깐."

이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사쿠사에서 고생하며 힘을 길러온 아츠미 씨가 보기에 종교 계열 여학교에서 음악학교를 거쳐 NHK 극단 소속으로 들어온 토토가 고생 따위 모르는 온실에서 자라난 아가씨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츠미 씨 자신도 NHK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음향 스태프로부터 "마이크가 망가지지 않게 조금 작은 목소리로"라고 주의를 받으면 "아사쿠사에선 얼마나 목소리가 큰가로 승부를 했단 말야."라며 분개했다. 토토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 녹음 일정 전에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골라서 이걸 선물해 보기로 했다.

"저기 이봐요. 세상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다고요. 이 자슥아 하고 외치기만 하지 말고 이런 책도 좀 읽어봐요."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를 내밀자 아츠미 씨는 잿빛 별 위에 금발 소년이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를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머뭇머뭇거리며 책을 받아들고서 "고마워"라고 부끄러운 듯 말을 꺼낸 뒤 현장을 떠났다. 

 

아츠미 씨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사쿠사에 대한 것, 영화에 대한 것, NHK에 대한 것, 그리고 항상 모두 같이 가는 중화요리점 같은 것도.

아츠미 씨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해서 어느 새부턴가 아츠미 씨는 토토를 "아가씨"라고 불렀고 토토는 아츠미 씨를 "오빠"라고 부르게 되었다.

토토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오빠는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실력이 있는 녀석은 말야, 혼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도 사십 분이든 오십 분이든 계속 할 수 있단 말이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너덜너덜한 신문 같은 걸 안고 있는 아저씨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같은 걸 물어보고 하다가 확 분위기를 끌고 당기고 하면서 그런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게 좋은 배우, 능숙한 배우라고 다들 믿으면서 그런 배우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안게 되는 눈물 같은 것도 있어. 대본 작가가 쓴 걸 이해하기 전에 우선 어떻게 자신을 내보일 것인가 다들 생각하게 되지. 하루 세 번 공연을 하는데 정월엔 하루에 여섯일곱 번으로 늘어나. 첫날부터 사흘 정도는 성의를 다해서 하지만 어느 정도 되면 모든 배역들이 할머니 가발을 쓰고 떼우려 하는 경우도 생기지. 그걸 저 녀석들 너무 엉터리네 하고 웃고 구르고 하지 손님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빠와는 <꿈 속에서 만나요>와 <젊은 계절>에서도 함께 연기했다. 그 후 오빠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토라 씨"를 연기했으니깐.(<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에서 맡은 배역의 애칭으로 TV 드라마로 시작해서 영화만 마흔여덞 편을 찍어낸 장수 인기작이었다 - 역자 주) 오빠가 말해왔던 "실력이 있는 녀석"은 아츠미 키요시 자신을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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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one glow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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